참선아카데미 대강좌
4월 27일 강의
“너의 마지막까지 수행하라”
정과 스님(참선지도자협회 간화선연구원장)

한국참선지도자협회(회장 각산)는 4월 12일부터 7월 20일까지 참선아카데미 대강좌 ‘이것이 수행이다’를 개최한다. 한국 선승과 심리의학 전문가, 명상 고수들이 강의에 나선다. △초기불교와 간화선 통합수행 △안반선(호흡명상) △선과 융합한 심리치료 △선문화를 통한 불교전법 △젊은 세대와 공감하는 불교수행 등 다양한 강의가 진행된다. 4월 12일 백담사 유나 영진 스님과 참불선원장 각산 스님의 법문에 이어 4월 27일 진행된 참선지도자협회 간화선연구원장 정과 스님의 법문을 소개한다.

선악, 시비 벗어난 마음 도달
佛法의 공성은 허무주의와 달라
쉼이 수행의 처음이자 마지막

 

경북 문경에 명상마을이라는 것이 들어섭니다. 제가 5년 전부터 준비위원회 일로 모임에 나가면서 ‘명상’이라는 것을 접하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거기(명상마을)에 순수한 간화선 수행공동체를 만들기로 했어요. 내후년쯤에 정식으로 개원하는 것으로 계획했습니다. 이름도 ‘국제선센터’로 정해져 있었고, 수행프로그램도 간화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름도 ‘명상마을’로 바뀌었고, 수행프로그램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서울 강남에만도 ‘명상’이라는 간판이 5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이 얘기는 제가 한 달 전에 동국대 정각원에 강의하러 갔다가 들었던 얘기입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삶에 지쳐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내고 거기에 가면 편안함을 얻거나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구, 그런 수요가 있기 때문에 500개가 넘는 명상센터가 생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현실인데 문경 명상마을에서 간화선을 해도 되겠는가. 우리 같은 출가수행자가 해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수행과정인데, 그래도 저희는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하면 또 되는 일이고, 해야 되는 일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하고 안 되면 다음 생에 또 하겠다는 생각으로 하지만 명상마을을 찾는 일반 사람들에게 이런 수행법을 일방적으로 내밀고 수행하라는 것은 맞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이런 강의(명상)를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명상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일정한 성과를 내는 분들과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그분들에게 배우고, 성과가 입증된 그분들의 프로그램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명상과 간화선을 융합해서 양쪽의 장점들을 뽑아내 일반인들이 수행하면 성과를 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관련 모임에 갔다가 책을 한 권 받았습니다. 오늘은 그 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책은 티베트 스님이 쓴 책입니다. 제목은 ‘쉼의 기술’입니다.

△첫 번째는 ‘기본좌선명상’입니다. 우선 앉는 자세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앉는 자세는 일정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체형이나 습관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자세를 적용할 수 없습니다. 책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몇 가지 자세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앉은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기본좌선명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산스크리트어의 ‘옴’, ‘아’, ‘훔’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옴’은 머리의 차크라와 연결되어 있고, ‘아’는 목의 차크라, ‘훔’은 가슴의 차크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발음들을 하면서 차크라와 연결되거나 열어가면서 수행의 토대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차크라’라는 것은 몸에 있는 에너지가 고여 있는 곳, 또는 ‘근원’ 쯤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 몸속에는 7개쯤의 차크라가 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남방불교에서 말하는 ‘사마타수행’인데요. 마음을 한 대상에 집중해서 고요하게 하는 명상입니다. 집중하는 대상은 여러 가지인데요. 호흡, 불상, 관세음보살상을 대상으로 집중해도 됩니다.

△세 번째 명상은 ‘다듬어진 기본좌선명상’입니다. 여기서는 명료함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고요함이 더 깊어진 단계입니다. 그동안의 거칠고 들뜬 마음이 한결 더 평온해지는 겁니다. 일념집중이 되다가 안 되다가 하는 반복과정에서 점점 깊어져 가는 단계입니다.

△네 번째 명상은 ‘통찰명상’, 남방불교에서 말하는 ‘위빠사나수행’입니다. 통찰, 명확하게 본다는 뜻입니다. 그럼 무엇을 본다는 것일까요? 자기 내면의 본성을 보는 것입니다. 이런 말들이 어려운 말입니다. 익숙하지도 않고, 내면과 본성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어려운 것입니다. ‘내면’이라는 것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본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해 훈련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우 어렵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교수행은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 내면의 본성을 보는 것. 다른 말이 아니라 불성을 보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도 이런 것들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특히 불교(불교수행)는 온전히 이것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방해받지 않는 마음, 자유로운 마음을 본성이라고 합니다. 본래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불필요한 것들에 이끌려 이것저것 생각하고 행동하느라 우리 스스로를 얽어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상이나 참선을 통해 그런 것들을 자기 스스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수행이 깊어질수록 보입니다. 보인다는 것은 눈으로 본다는 의미가 아니고 ‘인식한다’입니다. 조금씩이나마 인식이 되기 시작하면 부처님 가르침이나 이 공부에 대해서 믿음도 생겨나고 공부하는 재미도 생기는데, 그러기 전까지는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마음이 답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 답답함을 빨리 떨치기 위해서는 각자 공부를 열심히 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단, 제대로 된 지도자 밑에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여기 참불선원을 활용하시면 좋은 공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위빠사나수행 단계에서는 초월의 상태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초월에 대해서도 궁금해하고 답답해하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는 초월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초월은 고요함, 청정함, 편안함, 광활함 등을 느낄 때를 ‘초월’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초월을 경험하는 이때쯤에는 ‘공성’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공성이라는 것도 역시 어려운 개념인데, 쉽게 설명하자면 모든 것은 상호 의존적이며 그것을 이루는 요소들의 집합일 뿐, 그 어느 것도 독자적인 실체는 없다는 것, 그것이 공성의 정의입니다.

책의 저자인 티베트 스님은 비유를 통해 다시 공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테니스 경기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테니스 경기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테니스 공이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테니스 라켓이 있어야 하고 선수가 있어야 하고, 경기장, 관중 등등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갖추어졌을 때 테니스 경기가 성립되고 존재하는 것이죠. 그런 게 바로 공성의 의미라는 겁니다. 테니스공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무, 섬유, 접착제, 공의 공기 등이 합쳐졌을 때 테니스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성입니다. 처음서부터 테니스공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테니스 경기나 테니스공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른 것들에 의해서 만들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놓지 못하고 있는 ‘나’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에 대해서 많이 잘못 알고 있습니다. 수행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이토록 놓지 못하고 있는 ‘나’도 그런 것들로 만들어져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삶의 질이 가벼워집니다. 깊이 본 사람은 엄청 밝아지는 것이고, 더 깊이 보고 끝까지 다 열어서 본 사람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대자유, 깨달음, 내면 본성 자리에 바로 들어가는 것이죠. 이러한 것들은 수행을 오래 했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냥 되는 것은 더욱 아니지만 자기 성품을 본다는 것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올 수도 있습니다. 그냥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특이하게도 어느 날 갑자기 오기도 합니다. 그런 순간을 경험하고 나면 자기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이 조금씩은 벗겨져나갑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자기 본성을 열어보고 깨닫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승속의 구분이 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미국에서는 그런 개념들이 잘 정립되어 있습니다. 재가자이지만 스승 역할을 하는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 그 중에 데이비드 호킨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앞서 말한 ‘돈오(어느 날 갑자기 오는 것)’를 이렇게 말합니다. ‘눈사태’ 같은 것. 눈사태는 외형상 아무런 징후 없이 갑자기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 내면에서는 눈사태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던 겁니다. 그것이 돈오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을 듣는 일들이 안에서 작용하다가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 한 순간에 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늘 부처님 가르침을 잃지 마세요.

△다섯 번째 명상입니다. ‘열린 기쁜 명상’입니다. 이때쯤 되면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상태가 되는데, 편안하고 익숙한 기분이 든다고 합니다. 책에서는 이런 경험이 오면 직감적으로 ‘집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집에 있다’고 표현한 것은 ‘나는 여기 있었구나’ 그것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늘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죠. 우리는 자신이 본래의 상태에서 벗어나 멀리 떠나있거나 방황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삽니다. 그래서 자신이 떠나온 것으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공부를 통해 마음이 깨끗해지고 맑아지면 우리는 늘 그곳에 있어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떠돌아다닌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래서 티베트 스님이 ‘집에 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집에 돌아왔구나’가 아니고 ‘늘 집에 있었구나’라는 것이죠.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위의 말들을 잘못 이해하면 허무주의와 혼동할 수 있습니다. 공성의 의미는 절대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허무주의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삶을 살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서 편안해집니다. 시비와 경계가 사라집니다. 이것이 곧 ‘쉰다’는 것입니다. ‘쉰다’는 것은 불교수행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섯 번째, ‘청정한 마음명상’입니다. ‘청정한 마음명상’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실제로는 청정한 것을 바라거나 잡으려 하지도 않고, 청정하지 않은 것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괴로워하지도 않습니다. 이때쯤 되면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런 구속에서 벗어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은 대부분 우리가 만들어낸 생각들입니다. 자기가 만들어낸 생각들에서 오는 불안, 그런 것들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모두의 바람이죠? 부처님 말씀대로 하면 할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생각을 제어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올라오는 생각들을 지켜볼 뿐입니다. 끌려가지 않습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