⑨ 알아차림과 꼭두각시놀음

외부조건 집중하면 산만해지고
자신에게 집중하면 고요해진다
명상은 주인 되는 힘을 키워내
내면에 고여 있는 것 들춰보자

우리는 평생 심리적 꼭두각시놀음에 빠져 사는 건 아닐까. 꼭두각시는 조종자의 의도대로 온몸을 촐싹대며 반응하는 인형이다. 끊임없이 촐싹대면서 어리석게 굴며 구경꾼의 실소나 박장대소를 불러일으킨다. 꼭두각시를 둘러싼 사태가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구경꾼(관찰자)이 웃을 수 있는 이유는 그것과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꼭두각시와 조종자와 구경꾼. 이 세 요소 중 가장 비극적 존재는 누구일까. 물론, 꼭두각시다. 내가 즉각 꼭두각시라고 하는 이유를 당신도 알 것이다. 꼭두각시는 자신만의 독립적인 의도나 생각이 없다. 조종자의 의도나 손놀림에 반응할 뿐이다. 조종자가 왼쪽 조종실을 잡아당기면 왼팔을 들어 올리고 오른쪽을 당기면 오른발을 들어 올릴 뿐이다.

꼭두각시를 연상시키는 일이 인간계에도 흔하다. 나라는 존재의 여섯 보초인 , , , , 피부, 마음이라는 기관은 상황이나 조건이라는 조종자의 의도에 끊임없이 반응한다. 한 아이가 약속 시간에 늦은 엄마 손을 잡고 시장 길을 걷는다. 갑자기 아이가 엄마 손을 끌어당긴다. “엄마, 나 튀김!” “?” “튀김 먹고 싶어!” 아이는 막무가내다. 엄마 입에서 짜증 섞인 일갈이 터져 나온다. 같은 튀김 냄새지만 아이는 좋아함으로 반응하고 엄마는 싫어함으로 반응한다. 두 모자의 공통점은? 즉각 반응했다는 것이다.

외부조건에 반응하는 당신

명상은 외부 조건(조종자)에 반응하는 내 몸과 마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알아차리는 작업이다. 망상(妄想)은 약속이라는 조건, 아이라는 조건, 그 아이가 하필 내 자식이라는 조건, 냄새라는 조건 따위에 오락가락 집중한 상태이다. 외부 조건에 집중하면 산만해지고 자신에게 집중하면 고요하고 평온해진다. 사냥개는 조련사가 던지는 원반을 쫓지만 사자는 조련사를 겨냥한다. 사냥개는 조건을 쫓고 사자는 원인을 겨냥한다. 나는 나로부터 원인이고, 나에게서 원인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원인을 관찰한다는 것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내면의 숱한 염려나 생각을 주시하면서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붙들 것은 붙들고, 감당할 것은 감당하는 선택과 책임의 아이콘을 의미한다. 그래서 명상을 자신의 진정한 주인 되기라고도 한다.

두 모자의 사례를 들여다보았다. 미안하지만, 그 반응 속도나 양태가 꼭두각시와 별반 다르지 않다. 남의 일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나 또한 하루에도 수백 번, 보이는 것, 냄새, 소리, , 감촉, 생각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지내지 않았을까. 싫어서 밀어내거나 좋아서 당기거나, 싫지도 좋지도 않아서 미적지근하거나. 그러면서 이것이 내 인생이며, 나는 꽤나 주체적 인간이라고 믿기도 한다. 명상의 스승들은, 그러는 자신을 구경꾼(관찰자)의 자리로 빠져나와 3자처럼 바라보라고 조언한다.

흐르는 강에서는 같은 물을 두 번 만날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인연, 물건, 지식, 관념, 생각. 이들은 강물처럼 흐른다. 그런데 자신만은 변함없다고 믿는다면? 타인의 변화에는 현미경이면서 자신의 변화에는 나무안경이라면? 혹시 나는 나를 붙들고 있는 건 아닌지 되물어야 한다. 세상의 욕망, 언어, 눈치, 계급, , 명예, 서열이라는 철사에 묶여 그때그때, 즉각즉각, 덜렁덜렁 춤추며 사는 건 아닌지.

누군가 나에게 매서운 눈빛을 보낼 때 나는 멈칫한다. 이때, 그 누군가는 내 의식의 조종자이자 조건이고, 반응하는 나는 꼭두각시? 아니다. 아직은 덜렁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위기다. 저 눈빛이라는 조종자가 나의 내면에 저장돼 있는 기억이나 감정, 생각, 견해, 관념 따위를 어떻게 건드리는지 깨어서 알고 있으면 나의 평온과 존엄도 지속될 것이다. 저 눈빛에 탁구공처럼 반응하여 화를 내거나 두려움에 빠지는 순간 나는 눈빛이라는 조종자에 반응하는 꼭두각시가 된다.

그러므로 평소 훈련이 필요하다. 자신의 내면에 무엇이 고여 있는지 들여다보고 아는 것. 자신의 내면에 무엇이 주인 노릇하고 있는지 끄집어내는 일. 이것은 우리가 틈틈이 집안 살림을 점검하여 쓰레기는 버리고 먼지는 털어내는 이치와 같다. 글쓰기명상은 문자로써 그것을 꺼내보자고 한다. 나의 내면에 처박히고 고여 있는 언어, 지식, 관념, 신념, 가치관, 감각, 기억, 생각, 판단, 견해 따위들. 좋다고 붙들어 놓은 것, 싫다고 처박아놓은 것. 그런 자동화 작업장 저 안쪽, 컴컴한 창고 속을 플래시로 비춰보고 햇빛 아래 꺼내보는 일이다.

언어로 풀어낸 감정

오늘 우리가 살펴야 할 단원은 비교적 가볍다. 나를 기쁘게 하는 말, 100〉 〈나를 부정적 감정에 빠뜨리는 말, 100이 두 가지를 함께 묶었다. 우리는 늘상 나를 기쁘게 하는 말을 듣고 싶다. ‘나를 기분 나쁘게 하는 말이나 느낌은 생각만으로도 싫다. 하지만 이 말들은 내 안에 담겨 있어서 직접 꺼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막연하게 나는 이런 말이 듣고 싶어라고 할 수는 있다. ‘나는 이런 말이 싫어라고 할 수도 있다. ‘듣고 싶어듣기 싫어는 내 의도지만 막상 듣게 되는 말은 내 의지와 상관없다.

당신을 둘러싼 조건은 그런 점에서 냉정하다. 아무리 듣고 싶은 말이지만 그는 까맣게 모른 듯하다. ‘옆구리 찔러 절 받기전에는 별 대책 없다. ‘나를 기쁘게 해주는 말을 해주지 않는 그에게 불만의 화살을 쏴붙여야 할까.

진실을 털어놓자. 당신에게 그의 언어는 왜 중요한가. 당신을 기쁘게 하는 말이 단지 언어일 뿐인가. 아니면, 언어에 수반한 조건이나 상황들인가. 이를테면, 누군가가 당신 참 예뻐라고 했다 치자. 그래서 무조건 기쁠까. 같은 사람이라도 호젓한 산길에서 듣게 됐을 때와 궁지에 빠진 그가 상황 모면용으로 당신 참 예뻐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같은 말이라도 이 사람이 해주면 기분 좋을 텐데, 딴 사람이 함으로써 두렵기까지 하지 않던가.

호젓한 산길당신 참 예뻐라는 언어, 그리고 나! 이것들을 좌악 펼쳐놓고 보자. ‘호젓한 산길은 물론 조건이나 상황이다. ‘당신 참 예뻐라는 언어는? 조종자이자 조건이다. 그리고 내가 있다. 나는 이 조건과 조종자를 거리 두고 관찰할 수도 있고, 홀린 듯이 빠져들어 덜렁댈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선택자다. 오늘 하루 나는 수많은 언어(조종자) 속에서 얼마나 선택하며 지내왔을까. 혹시 지금도 조종자(언어)의 손아귀에서 덜렁대며 반응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아니, 십수년 전 조종자의 손아귀에서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일단 내 안쪽을 들여다보자. 들여다보는 일은 빠져나옴으로써 가능하다.

나를 기쁘게 하는 말, 100

- 지금 이 순간 내 몸이나 마음속에 들어 있는 기쁨, 드러내보기

- 나를 기분 좋게 했거나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게 했던 말, 받아적기

-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그에게 기쁨 줄만한 말, 떠올려보기

- 살아오면서 부모, 형제에게서 들었던 기분 좋은 말, 기뻤던 표현, 받아적기

- 여러 이유로 그에게 직접 하지 못한 칭찬이나 감사, 기쁨의 표현 적기

- 마음에 스치는 사람을 떠올리면서 그를 향한 기쁨의 감탄사, 하나씩만 적어가기

- 기쁨이 솟구치는 미래의 내 모습, 묘사 글쓰기

나를 부정적 감정에 빠뜨리는 말, 100

- 지금 이 순간 내 몸과 마음의 부정성, 언어화하기

- 나를 화나게, 슬프게, 우울하게, 불쾌하게, 질투 나게 했던 말, 기억 그대로 받아적기

- 요즘 나를 우울하거나 슬프게 하는 말, 적어보기

- 차마 직접 하지 못한, 누군가를 향한 부정적 표현, 드러내기

- 오늘 하루 차근차근 떠올리면서 내 안에 갇힌 부정적 감정들, 언어화하기

- 최근 뉴스를 떠올리면서 함께 떠올랐던 부정적 감정, 언어화하기

나를 기쁘게 하는 말나를 부정적 감정에 빠뜨리는 말, 말 하듯이 적어가는 게 좋다. “사랑해, 당신이 좋아.” “당신 옆에 앉을 거야.” “엄마, 안마해줄까?” 이보다 더 섹시하고 노골적인 대화들이 왜 없을까. 소위, 입말 그대로 표현되는 언어들은 싱싱한 오이를 생으로 씹는 기분이 들게 한다. 지금 이 원고나 교과서에서 애용하는 언어는 규격품 포장용제로 장식돼있기 십상이다. 그런 장식용 표현은 당신의 내면에서 활약하는 언어의 맛과 향기, 신선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소설 쓰기를 열심히 하던 시절, 나는 교과서용 포장 언어들을 시니컬하게 노려보면서 내뱉곤 했다. ‘밥맛이야!’ 당신의 내면에는 아직도 짝다리를 덜렁대며 침을 찍찍 뱉는 그 친구가 있다. 이성 친구를 만들기 위해 밤새워 편지 쓰던 친구도 있고, 땡땡이치고 영화관으로 직행하던 친구, 학교 뒷담 골목길에서 한판 뜨던 친구, 부모님 지갑을 뒤져서 용돈을 확보한 친구, 이미 돌아가신 할아버지 돌아가셨다고 조퇴를 획책하던 친구 따위가 즐비하다. 이럴 때 애용했던 언어를 원음 그대로 일으켜보면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도 지켜볼 일이다.

지난날의 사연 안쪽에는 잉꼬 같은 기쁨의 대화가 있는가 하면 박쥐 같은 음울한 대화들도 붙어 있을 터. 그런데 어떤 이는 부정적 감정에 빠뜨리는 말적어보기를 하기 전에 이런 근심을 토로한다. 부정성을 적다보면 부정성을 연습하는 꼴 아닌가요? , 그런 걱정은 타당하다. 자칫하면 내 안의 부정성을 베껴 쓰고 학습하는 훈련이 될지도 몰라. 하지만 살펴보라. 드러난 언어와 드러내는 자는 누구인가. 불빛을 받는 자와 불빛을 쏘는 자는 같을까 다를까.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데이비드 케슬러 부부는 인생수업에서 진정한 자신이 되려면 자신의 어두운 면과 결점에 대해서도 솔직해져야 한다고 조언하다. 그러므로 드러내는 자여, 당신의 상처에 기생하는 그 아픈 사연들에게 솔직이라는 빛을 쪼여주기를. 당신의 심리적 직사광선에 드러난 언어는 빛에 놀란 박쥐처럼 당신이라는 동굴을 떠날 것이다. 거의 모든 심리상담 또한 본인의 상처를 드러내는 데 초점 맞춘다. 왜 그럴까. 스스로 알지 못한 상처는 외부 조건을 만나는 순간 주인의 통제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욕설이 튀어나오거나 힐난이 새어나오는 이유. 웃으면서 화내는 습관. 끝없이 웅얼거리며 화내기. 대답은 빠르고 행동은 느리게 하는 분노 표현. 이것들 또한 내 안의 곰팡이 같은 언어들을 쳐다보지도 않으려 한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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