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업원과 청룡사

서울 낙산성곽길에 위치한 청룡사의 모습. 정업원 터에 지어진 사찰이 청룡사이다.

 

조선조 후궁과 정업원

왕조시대 임금이 죽고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후궁들은 궁궐 밖으로 나갔다. 먹고 지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재가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왕실에서 마련해준 거처에서 조용히 지내는 일뿐이었다.

그들 가운데 혼자 지내느니 부처님을 섬기며 지내겠다고 출가를 선택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곳이 정업원이었다. 지체 높았던 그들이 머물렀던 곳이어서 이곳의 주지 역시 남달랐다. 태종 8년 2월에 공민왕(恭愍王)의 후궁이었던 이제현(李齊賢)의 딸 혜비(惠妃)가 정업원에 머물다 죽었다. 그러자 왕자의 난으로 희생당한 이방석의 부인 심씨(沈氏)를 정업원의 주지로 삼은 기록이 그런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창덕궁서 멀지 않은 위치
동쪽 바라보며 세워져
억불숭유에도 맥 이어와

고려 의종 18년 윤11월 왕이 정업원으로 거처를 옮기고, 고종 38년(1251) 6월 박훤(朴暄)의 집을 정업원으로 만들어 성내 비구니를 모여 살게 한 것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 정업원은 도성 내에 있었다. 태종 11년(1411) 6월 병조에서 승려들이 남산과 안암 등지에 초막을 짓고 재를 베풀자 모두 철거해 버리자고 주장하였다. 이때 도성 안에서 비구니 사찰이 세워지는 것이 금지됨과 동시에 정업원 이외에는 모두 철거되었다.

정업원이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여타의 비구니 사찰과 위상이 달랐기 때문이다. 실제 세종 29년(1447) 6월 왕은 정업원 주지가 자신의 친속이며, 그곳에 있는 여승들은 모두가 사족(士族)으로서 논밭과 노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달라도 한참 달랐을 것 같다.

조선시대 정업원은 어디에 있었을까? 세종 15년(1433) 7월 도성의 풍수를 이야기 할 때 정업원의 위치가 나온다. 정업원에서 동으로 동대문에 이르러 왼편을 막는 난간이 되었고, 또 한 줄기는 동남으로 내려가서 종묘와 창덕궁의 맥이 되었다는 내용으로 볼 때 동대문 안 창덕궁 위쪽임을 알 수 있다. 그 후 정업원이 궁장(宮墻) 곁에 있어 범패 소리가 궁중에까지 들렸다는 기록과, 창덕궁 담 밖의 정업원이란 표현으로 볼 때 창덕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임을 알 수 있다.

좀 더 정확한 위치는 연산 9년(1503) 11월 정업원 서쪽 골짜기 북쪽 고개를 따라 소격서(昭格署)로 가는 길에 담을 쌓아 잡인의 통행을 금하고, 정업원 동쪽 언덕에서 성숙청(星宿廳) 북쪽 고개까지 모두 푯말을 세우고 사람을 금하여 올라가 바라보지 못하게 하였다. 소격서는 도교와 관련된 곳으로 지금의 삼청동 쪽이고, 성숙청은 무속과 관련된 곳으로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대략 창덕궁과 창경궁 위쪽으로 짐작된다.

정업원의 수난

그런 정업원이었지만 조선의 배불정책은 피해갈 수 없었다. 태종 때부터 없애자는 논의는 세종 때까지 이어졌다. 세종 29년(1447) 6월 의정부는 정업원 여승의 특혜가 다른 곳보다 지나쳐 폐단이 있고, 전답의 세금을 사사로이 쓰므로 없애자고 하였다. 이런 견해에 세종은 갑자기 없애면 과부들이 갈 곳이 없으므로 앞으로 정업원에 있는 사람들이 줄면 보충하지 않고 점점 없어지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정업원의 사세가 기울었고, 세종 30년 11월 정업원 노비를 상림원(上林園)에 주면서 결국 없어지게 되었다. 다만 이곳의 불당에 금으로 만든 인왕불, 미타삼존, 옥불, 불치(佛齒), 불골(佛骨) 등의 법보가 있기 때문에 대궐을 청소하는 사람들 가운데 서울에 사는 여덟 사람을 선발하여 살피도록 하였다.

없어진 정업원이 다시 복원된 것은 세조 때였다. 불심이 남달라 재위기간 동안 불교를 보호하였던 그는 3년(1457) 9월 정업원을 세우고 노비와 전지 백결을 주어서 여승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복원 이유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대개 과부와 외로운 여자들이 출가하여 여승이 되는데, 여승이란 실로 궁박(窮迫)한 무리들이다. 그래서 내가 다시 정업원(淨業院)을 세우고 이곳에 모여 살게 하여 이들을 구제하려고 한다.”

세조는 복원 후 이곳을 방문하여 비단을 내릴 정도로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성종 때 와서 다시 불거진 불교배척의 분위기를 피해갈 수 없었다. 1년(1470) 9월 예조가 도성 내 사찰을 없애자고 하자 관청에서 창건한 사찰과 사당은 다른 곳으로 옮겨 짓도록 하였다. 6년(1475)에는 비구니들이 도성 안에 여염집과 섞여 살아 품행을 어지럽힌다는 원상들의 의견에 비구니 사찰을 헐게 하였다. 이런 분위기가 지속되면서 11년(1480) 정업원의 노비를 각 관사에 나누어 주면서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이어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9년(1503) 11월 정업원 주변 길에 담을 쌓아 잡인의 통행을 금하였다. 그리고 10년(1504) 7월 이곳의 비구니를 한치형의 집으로 옮겨 살게 하면서 결국 정업원은 없어지게 되었다. 폐사된 정업원은 중종 때 사대부의 독서당으로 이용되었다. 그 후 독서당이 동호(東湖)로 옮겨지면서 빈터로 남게 되었다.

단종비 정순왕후와 정업원

단종을 영월로 유배 보낸 세조는 정순왕후에 대해서는 선처를 베풀어 한양 안에 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왕후는 동대문 밖 동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살기를 원했다. 세조는 재목을 주어 집을 짓도록 하였다. 홀로 남은 왕후는 단종의 누이 경혜 공주의 아들 정미수를 양자로 삼아 단종 없는 66년을 지냈다. 그렇게 긴 세월을 집과 마주한 봉우리에 올라 영월 쪽을 바라다보면서 보냈다.

왕후는 자신을 돌봐준 고마움에 죽기 3년 전인 중종 13년(1518) 7월 노비와 재산을 정미수의 아내에게 줄 수 있도록 상소를 올렸다. 1521년 왕후가 죽자 정미수의 선산에 장사지냈고, 그 후에는 정씨 후손들이 그의 제사를 받들었다고 숙종 24년(1698) 11월 9일 기록은 전하고 있다.

이곳에 정업원을 다시 세운 사람은 문정왕후였다. 명종 1년(1546) 7월 26일 왕후는 선왕의 후궁을 위하여 인수궁(仁壽宮)을 지으면서 별도로 정업원을 세우려 하였다.

“인수궁은 선왕의 후궁을 위하여 지난 3월부터 수리하도록 하였는데 엊그제 내관을 보내 살펴보았다. 지금 수리가 끝나지 못하여 후궁들이 이주할 곳을 찾지 못하고 아직도 사제(私第)에 있다. 또 전날의 정업원을 인수궁에 소속시켰다가 사무가 좀 헐후해진 뒤에 아울러 수리하여, 선왕의 후궁 중에 연고가 생기는 이를 거기에 이주시키도록 하라. 또 정업원 수리에 소요되는 목재와 기와는 호조와 내관이 동시에 자세히 조사하게 하라.”

이때 관리들은 후궁을 위해 인수궁을 세우는 일은 괜찮으나 비구니를 위해 정업원을 세우는 일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러자 명종 4년(1549) 11월 원래 정업원이 있었던 터에 인수궁을 지었다. 그리고 후궁이 질병을 앓게 될 경우 옮겨 살 수 있도록 정업원을 세웠다. 그곳이 지금의 청룡사이다. 명종 11년(1556) 4월 정업원이 성 동쪽 10리쯤 되는 지역의 땅을 사들였다는 기록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영조의 방문과 친필

명종 20년(1565) 문정왕후가 죽은 뒤 다시 시작된 불교배척으로 불교계는 선교 양종이 폐지되고, 승과도 없어지는 등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분위기는 선조가 즉위하면서 계속되었다. 도성 밖이었지만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정업원도 배불의 분위기를 벗어날 수 없었다. 폐쇄를 주장하는 대신들과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선조는 예전부터 선왕의 후궁이 있었던 곳임을 들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생들의 끈질긴 상소와 관리들의 배척으로 정업원은 제 역할을 할 수 없었고, 이후 광해군, 인조, 효종, 그리고 현종 등 오랜 기간 실록에도 거론되지 않는다.

이렇게 세간의 뇌리에서 사라진 정업원이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숙종 24년(1698) 행해진 단종의 복위와, 무너진 사릉(思陵)을 고치고 글을 내린 영조의 배려 때문이었다.

영조는 정순왕후 일에 관심이 많았다. 47년(1771) 8월 능의 일부가 무너지자 즉시 보수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바로 행해지지 않고 지체되자 25일 책임자 예조 판서 이창수를 파직할 정도였다.

8월 28일 영조는 이곳에 오면서 누가 정순왕후 일에 대해 잘 아는지 물었다. 참판을 지낸 정운유가 추천되었다. 정운유는 단종의 누이 경혜 공주의 아들 정미수의 후손이었다. 정순왕후의 사연과 정업원이 지어졌던 사연을 들은 영조는 이곳에 누각과 비석을 세우도록 명하고 친히 글씨를 내렸다. 현재 청룡사에 있는 비석인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가 그것이다. 이곳이 옛 정업원 터임을 가리키는 내용이다.

9월 6일 영조는 왕세손과 창덕궁에 나아가 진전(眞殿)에 비석 세운 일을 직접 아뢰고 이곳에 들렸다. 사찰과 마주한 봉우리에 올라 정순왕후가 이곳에서 영월이 있는 동쪽을 바라봤다는 이야기를 듣고 ‘동망봉(東望峰)’이란 글을 써서 바위에 새겼다.

청룡사 한쪽에 세워진 비각 속에 비석은 존재하나, 바위에 새긴 글씨는 일제 때 채석 하느라 없어졌다. 봉우리 역시 지역 주민을 위한 쉼터로 바뀌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재개발로 들어선 아파트 때문에 정순왕후가 바라보던 동쪽 시야가 가려버린 것이다.

그래도 240년의 세월을 지내온 비각 속의 비석을 보면 세상사에 묻힌 정업원의 역사를 복원한 영조의 고마움이 묻어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 조선조 후궁들의 가련한 삶을 보는 것 같아 애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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