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증사작반(蒸沙作飯)

‘증사작반(蒸沙作飯)’ 이란 '모래를 삶아서 밥을 만든다’는 뜻이다. 쌀이나 곡식을 쪄서 밥을 만드는 것(蒸米作飯)이 아니고, 모래를 쪄서, 모래를 삶아서 밥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일, 불가능한 일,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을 뜻한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다는 뜻의 ‘사상누각(沙上樓閣)’, 공중에 떠있는 누각이라는 뜻의 ‘공중누각(空中樓閣)’과 같은 말이다.

‘증사작반(蒸沙作飯)’은 신라 시대의 고승인 원효대사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 나오는 말이다.‘발심수행장’은 문장이 감동적이어서 발심하여 공부를 하게 하는 글이다. 앞뒤로 보충어가 몇 마디 더 있다.

“부지런히 수행을 해도, 지혜가 없는 사람은 동쪽으로 가고자 하지만 실제로는 서쪽으로 간다. 또 지혜가 있는 사람은 쌀로 밥을 짓지만, 지혜가 없는 사람은 모래를 삶아서 밥을 지으려고 한다. 누구나 배가 고프면 밥을 먹을 줄은 알면서도 불법을 배워 어리석은 마음을 고칠 줄은 모르는구나.”

지혜가 있는 사람은 누가 보아도 가능 한 일, 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러나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사람은 모래를 삶아 밥을 지으려고 하는 것과 같이, 되지도 않을 일, 말도 안 되는 일,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을 한다. 무지하고 고집스럽기 때문이다.

옛말에 ‘고집불통(固執不通) 패가망신’하고, ‘울뚝배기(화를 잘 내는 사람) 살인 친다’는 말이 있다. 대체로 고집이 센 사람들은 쓸데없이 자존심이 강하다. 그래서 한 번 주장한 것은 설사 틀렸다 하더라도 절대 수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업을 하는 사람의 경우 집에 빨간 딱지가 붙어야 자신의 주장을 겨우 바꾸는데, 이미 때가 너무 늦어서 결국엔 쪽박을 찬다. 잘 나가던 기업들이 망하는 것은 대부분 오너의 옹고집, 자존심을 앞세운 쓸데없는 주장 때문이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대부분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이 최고라고 생각하는데 큰 착각이다. ‘최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망할 때까지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지 않는다. ‘불원장래’, 곧 자신의 판단이 맞을 것으로 착각한다. 반면 지혜가 있는 사람은 현명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리고 타인의 의견을 많이 받아들이고 존중한다.

<초한지>에서 항우가 유방에게 패하여 그 유명한 ‘사면초가’라는 고사성어를 낳은 것은 항우의 무지와 고집 때문이었다. 반면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고 한고조가 된 것은 남의 의견을 많이 참고했기 때문이다. 지혜도 없으면서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하늘이 버린 사람‘, ‘신(神)이 버린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은 원효 스님의 말씀과 같이 모래로 밥을 지으려고 한다.

무지(無智), 어리석음은 불교에서 가장 적대시하는 탐진치(貪瞋痴) 삼독 가운데 하나이다. 삼독(三毒)은 깨달음을 방해하고 해탈과 열반을 가로막는다. 그런데 탐욕을 부리는 것도 어리석기 때문이고, 분노, 짜증, 증오, 그리고 화를 내고, 성질을 부리는 것도 무지하고 어리석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리석으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보면 된다.

어리석음을 벗어나서 지혜로 나아가는 방법은 마음이 정직하고 순수해야 한다.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면 지능이 좋아도 잔꾀를 부린다. 잔꾀는 순간적으로 짜릿한 쾌감을 주지만 두세 번 이상은 통하지 않는다.

지혜는 선(善)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은 물론 사회를 맑고 깨끗하게 한다. 함께 잘 사는 방법이어야 하는데, 잘못된 지혜는 자신의 이익만 챙기기 때문에 결국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사회를 어둡게 한다.

지혜 가운데는 부처님의 지혜가 최상의 지혜이다. 그것을 ‘불지견(佛知見)’이라고 한다. 불교의 지혜, 불지견은 미혹을 끊고 진정한 삶의 길인 깨달음을 얻게 한다. 모든 현상은 실체가 없는 것, 영원성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애착이나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불지견이다.

우리는 대부분 집착, 애착이 강하다. 남녀 간 사랑의 애착, 자식에 대한 애착, 돈에 대한 애착, 명예나 출세, 오래 살려고 하는 애착 등인데, 이런 것을 두고 어리석음, 지혜가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증사작반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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