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이 길, 그냥 걸을 뿐이에요

형제 법우님들, 앞으로는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 가야 할 뿐만 아니라, 더욱더 마음을 계발해서 천체를 앉아서 조절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우리 모두 스스로, 근본으로부터 배출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이건 정말이지 절실한 일입니다. 

안으로도 노예가 되지 말고
바깥으로도 노예가 되지 말라.
네 정신 네가 깆고 있고 
네 주인공 네가 깆고 있으니.

이런 걸 여러분이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부처님 법은 무조건입니다, 무조건! 비유해서 조그마한 티끌만도 못한 것을 한마디 하겠습니다. 그전에 여기 한 처사님이라고 아시죠? 그분이 사흘을 못 넘긴다고 의사 셋이 다 그랬습니다. 그런 걸 “몸에 꽂은 거 다 빼고 죽든지 살든지 나갑시다.” 하니까 말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거리더군요.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느냐 하면, 무조건! 무조건 말입니다. 이유는 불문에 붙이고 무조건 이 사람은 누구든지 데려 갈 수가 없다고 그랬습니다. 무조건입니다. 왜 그랬느냐? 상원사(上院寺)를 지을 때에도 그랬었지만 뭐든지 무조건이지, 거기는 이유가 붙는 자리가 아니다 이 소립니다. 무슨 ‘어려워서 못살겠네’, ‘죽겠네’, ‘이것이 잘못됐네’, ‘저것이 잘됐네’ 이런 게 붙으면 그건 진짜 부처님 법이 아닙니다.
부처님 법이란, 여러분의 법이란, 그 묘하고 슬기롭고 진짜 아무것도 붙지 않는 그 자리에서, 눈은 샛별같이 떠지고 한생각은 불끈 (주먹을 쥐어 보이시면서) 솟는 그 무조건적인 생각! 예, 이런 것이 건질 수 있는 겁니다. 그거는 크고 작고가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이렇게 꼭 하겠노라! 하고 주먹을 불끈 쥘 때, 마음속에서 정말 절절한 눈물을 흘리지마는 눈은 생동생동하게 더 똥그랗게 떠지고 눈에서 불이 번쩍번쩍 나는 이러한 그 무조건’의 생각, 그겁니다. 그냥 구렁이 담 넘어가듯 주인공이 해 주겠지.라고 한다면, 아니, 그러면 주인공 따로 있고 여러분 따로 있습니까? 그것도 관법을 통해서 여러분의 지혜 물리가 터져야 알 겁니다, 아마. 네가 있다는 것을 네가 증명을 하는 거지. 그게 관(觀)입니다. 또 지금 내가 무조건이라고 그런 겁니다. 어떠한 문제를 꼭 해야만 되겠다 할 때 무조건입니다, 무조건! 거기에는 아무 이유가 붙지 않아야 된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망상은 끊는 게 아니라 바로 여러분에게 물리가 터지게 할 수 있는 수련 재료이자 바로 여러분을 성장시키는 과정이죠. 그렇기 때문에 망상을 끊지 않고 여여하게 그대로 넘어가는 무조건! 망상을 한다고 여러분이 생각을 하니까 망상이지, 아니, 누가 망상이라고 이름을 지어 놨는지, 그것도 사람이 지어 놨지 누가 망상이라고 지어 놨겠습니까? 그것에 왜 흔들립니까? 

줄창 말하지만, 이 세상에 누구나가 다 수억겁에 걸쳐서 엄청난 그 과정을 걸어왔습니다. 그랬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여기에 쓸리고 저기에 쓸리면서 진짜 부처님의 골수를 모르게끔 자기 마음으로 그렇게 만들 겁니까? 그러니까 부처는 너무 가까워서 위 속눈썹하고 아래 속눈썹하고 똑같이 작용을 하는 그것이 바로 부처님 법이기 때문에, 부처님은 자기와 아주 가깝게 있으니 멀다고 생각을 하지 마시라 이겁니다.

언젠가 한번 이런 예가 있었습니다. 요새 암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그 암이라고 하는 이름에 그만 끄달려 포기를 해 버리는 마음이 생깁니다. 또 백혈병이라고 해서 포기합니다. 뼛속으로 썩어 들어간다고 해서 포기합니다. 무엇이든 여러분이 포기를 하니까 포기가 되는 겁니다. 이건 여러분이 절실히 느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골수에 전부 병이 들어서 썩어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 속에서 벌레가 뼈를 긁어 먹는다고 의사가 그러더라고 그럽니다. 병원을 여섯 군데를 다니면서 진찰을 해 봐도 다 그러더라는 겁니다. 내가 그때에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뼛속을 긁어 먹는 게 아니야.” 왜냐하면 그 사람이 알면 좋은데 모르니까, 그거는 긁어 먹는 병이 아니니까, 그냥 우리가 감기 조금 들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줬습니다.

또 한 가지는, 거기에서 한 거니까 무조건, 이건 절대로 이런 병이 돼서는 안 된다고 아주 작심하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 이름을 모르겠습니다만 저 원주 소태면이라나? 소천면인가요? 소초면인가요? 이제 이름도 잊어 버렸어요. 너무 오래 되어서요. 그랬는데 그 사람이 그렇게 병원에 다니면서 집을 팔고 땅 있는 걸 다 팔았습니다. 나중엔 정말이지 남의 행랑채에 들어 있어서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공부를 모르기 때문에 방편상 그렇게 한 거죠. 이 부처님 법은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약으로 해서 되는 게 아니라 그대로가 약입니다, 그대로.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그렇게 얘기했죠. “야, 감자 한 관 살 돈은 있느냐?” 그러니까 있대요. 감자 한 관에 2천 원이래요. 그래 2천 원어치를 사 가지고 가서, 갈아서 즙을 내서 거기에 미숫가루를 멀겋게 타서 간식으로 먹으라고 그랬습니다. 또 맛있게 해 먹으려면 누런 설탕 사다가 가미해서 그냥 먹으라고 그랬습니다. 

그게 거기에 해당이 됩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글쎄. 그게 거기에 해당이 되는 겁니까? 하지만 그 사람은 진짜로 믿었던 겁니다, 진짜로! 아는 사람 같으면 그거 안 믿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믿었죠. 자식들은 칠 형제나 되고, 쉰 살에 또 늦게 아들을 낳아 가지고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런데 진짜로 믿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살고 계시고, 쉰 살에, 늦게 낳은 그 아들의 덕을 보고 지금까지도 사시고 계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래서 아리송한 게 부처님 법입니다. 아주 정말이지 이것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가끔 한 처사님한테도 그랬지만, 이렇게 해 본 예가 있습니다. “안 돼! 절대로 안 돼!” 보이는 세계에 나오는 모든 거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나온 거거든요. 그래서 딱 진을 쳐 놓고선 “안 돼!” 하면 아예 그냥 못을 콱 쳐 놓는 거나 다름없는 겁니다. 그런 예가 더러더러 있죠. 왜? 내 가슴이 너무 아파서요. 그 사람이 죽고 살고, 또는 ‘여기 믿으러 다녔는데 안 고쳐져서 어떡하나?’ 그런 거를 다 떠나서, 믿고 안 믿고 그걸 떠나서 말입니다. 이렇게 정립이 되고, 그 못을 박는, 정말이지 굵은 불바퀴를 그냥 콱 (주먹을 쥐어 내리쳐 보이시면서) 박는 그 마음은, 아마도 이 세상 다 없어진대도 그건 빼지 못할 겁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참답게 아신다면 정말 여러분은 법신(法身)이요, 불부처요, 산 부처요, 여러분이 화신(化身)이요, 법신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글자도 붙지 않고, 이론도 붙지 않고, 더한다 덜한다, 이게 옳다 그르다도 붙지 않고, 가난하다 또는 부자다도 붙지 않고, 위대한 사람이다 위대하지 않은 사람이다도 붙지 않습니다. 진실한, 그 뼈저린, 아주 진한, 바닷물을 다 모아서 한 방울이 되는 그 피 한 방울이 말해 줍니다. 이건 말로 형용할 수가 없는 겁니다. 난 어저께도 그저께도 그끄저께도 너무 가슴이 아파서, 눈물은 한없이 쏟아지고 누구한테 보일 수도 없어서 보이진 못하나마 눈이 생둥생둥하게 떠지면서 기둥이 와짝 (주먹을 쥐어 보이시면서) 섰습니다. 그건 왜 그랬을까요?

또 한 가지는, 우리는 지금 정신계로 치닫고 있습니다. 공부하시는 여러분이 이 세상을 바로 여러분의 어깨에 짊어진 채 한생각을 내서 둥글려서 모든 걸 해 나가신다면 우리나라는 진짜 융성하게 될 겁니다. 오늘은 너무 느낀 점이 많은데요, 조그만 그릇에다가 재료를 많이 부어서 막 흘러내려서 부작용이 나 가지고 저렇게 야단들을 하지 않도록 우리는 정립을 해야 됩니다, 또. 그럼으로써 자라나는 새싹들이 주인이 돼서 살 때, 그리고 그 밑으로 밑으로 내내 선맥(禪脈)이 끊어지지 않고 끝 간 데 없이 이어지도록 지키고 나갈 수 있게끔 법신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남들이 “학술적으로 하지 않고, 경전으로 하지 않고 왜 그렇게 딴말을 하느냐?” 그래서 내가 이런 말을 했죠. “풀포기 하나도 생명이 있고 이심전심으로 전달하고, 같이 공생(共生)을 하고 공식(共食)하고 있는데 무엇이 부처님 법이고 무엇이 부처님 법이 아니냐?”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가톨릭교인이고 기독교인이고 다 와서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어디 호텔을 정해서 설법을 한다 하고 기별을 하니 심지어는 가톨릭교 신부나 목사도 모입디다. 어떤 질문을 해도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그냥 서슴지 않고 대답을 해 줄 수 있느냐고, 나중에 저녁 식사를 대접해 주면서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러면서도 남에게 해롭게 대답도 하지 않고 어떤 거 하나 나쁘다는 것도 없이 그렇게 대답을 할 수 있느냐고 그러는 겁니다. 그랬는데,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내가 잘났다는 게 아니라 부처님 법이 그렇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지금. 내가 잘났다고 해 봐야 이 고깃덩어리가 얼마나 잘났으며, 이 고깃덩어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그러나 부처님의 골수는, 여러분의 누진(漏盡)으로서 오신통(五神通)을, 법바퀴를 벗어나야 바로 불바퀴를 굴릴 수 있으며, 불바퀴를 벗어나야 바로 이 마음이 천백억화신으로, 분신으로 화해서 바깥으로 전 우주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들락거리면서 이걸로 쓸 거는 이걸로 쓰고, 저걸로 쓸 거는 저걸로 쓰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겁니다. 

또 이 지구만 해도 이 안의 세계를 위하여 지구 바깥으로 세 개의 소임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뭐냐? 지구 바깥에 법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법계라는 그 자체는 무엇이냐? 우리네들의 마음, 생명이 있기 때문에 바로 우리네들 털구멍을 통해서 나고 들고 하는 것처럼, 지구도 살아 있는 생명들을 가지고 있는 그러한 물질, 혹성이기 때문에 많은 물질들이 입자를 통해서 분자가 돼 가지고는 세 가지 소임을 합니다. 아주 질서 정연하게 단계 단계 단계…, 그래서 지구 바깥으로 그 단계가 되어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소임을 맡은 단계입니다. 안으로 들이고 바깥으로 내는 소임, 안으로 바깥으로 전부 통신하는 소임, 그리고 책정을 하는 소임, 세 가지를 그렇게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에 안으로 들이고 밖으로 내는 것만 보더라도, 더 넓게 보면 이 지구 안으로 모두가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것도, 우리가 지금 발을 붙이고 다니는 것도 남극 북극에서 그 소임을 하면서 들이고 내기 때문입니다. 남극이 똥 누는 데라면 북극은 먹어야 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나쁜 건 내놓고 좋은 건 들여놓듯이, 지금 인간 혹성 자체가 그렇게 살듯 지구도 그러하다 이겁니다.

그런데 우리네들 마음 자체의 보이지 않는 입자, 즉 말하자면 화신들이, 내 몸뚱이도 보호하려니까 그렇게 3단계로 나누어서, 아니, 인간에겐 5단계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다섯 단계로 보호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걸어 다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끌어 잡아당기는 것과 끌려 들어가는 것의 양면을 다 책정을 잘하는 작업이 하나 있습니다. 세균성이 들어와도 우리가 들여놓을 건 들이고 내놓을 건 내놔야만 하는 작업도 있죠. 이 허공에도 지금 세균성이 그냥 욱시글득시글하니까요, 안에서도 그렇지만. 또 유전성으로 온다든가 영계성이라든가 이런 것도 인연에 따라서 들입다 침입을 하게 방치가 된다면 우리가 도저히 살 수가 없죠. 임신을 했어도 임신한 그 자체에 자꾸 집어넣기 때문에 그 애가 이 세상에서 대통령감인데도 소통령도 못  하게 만들어 놓을 수도 있는 거죠, 얼른 쉽게 말해서.
그러면 우린 어떻게 되느냐 하면,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미래세계 정신세계의 노예로서 산다 이겁니다. 우린 맘대로 살 수가 없어. 내일 어떻게 될는지 모레 어떻게 될는지도 몰라. 그래서 부처님께선 “안으로도 노예가 되지 말고 바깥으로도 노예가 되지 말라. 네 정신 네가 가지고 있고, 네 주인공 네가 가지고 있으니….” 그 소린 뭐냐 하면, 네 주장자가 있다면 이렇게 끌리고 저렇게 끌리고 그러진 않을 거다 이거야. 네 집이 비지 않았다면 이것도 들어오고 저것도 들어오고 들락날락하지 않을 거다 이거야. “네 집이 비었기 때문에 수없는 게 들락거리면서 네 집을 망가뜨리느니라.” 이랬거든. 

그러니 네 기둥이 없는데 내 기둥을, 네 기둥이 없는데 내 주장자를 줄 수가 있느냐 이거야, 네 집이 비었는데. 네 집이 비지 않고 주인이 있다면 내 주인을 너를 줄 것이로되, 줘서 한마음이 돼서 하나가 돼 가지고 일을 크게 할 텐데, 네가 집이 비어 가지고 네 마음에 주장자가 없는데 내 주장자를 어떻게 너에게 한데 합쳐 줄 수 있느냐 이거죠, 쉽게 말해서. 그러니 네 주장자가 없다면 빈집이 돼서 털구멍을 통하고 눈구멍을 통하고 콧구멍을 통해서 들락거리면서 그저 깡패니 뭐니, 예를 들어서 얘기예요. 보이지 않는 데서 전부 그냥 드나들기 때문에, 사람의 영혼만 드나드는 게 아니라 짐승들의 그 의식도 드나들기 때문에 집이 망가져서 나중에는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공부를 못 할 거며, 또 집이 먼저 망가지면 내가 나를 찾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겁니다.

그래서 집을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몸으로 고행을 하지 말고 정신 수행을 하라 하신 거죠. 정신 수행으로서 진짜로 “들고 나는 데에 누가 하는가. 네가 하는 것을 알라. 몸은 사대가 돼서 흩어지고 말지만 이 정신, 너의 진짜 참마음은 끝 간 데 없이 바로 너를 살리고 너의 중생을 살리고 수많은 외부의 중생들을 다 건질 수 있다.” 하는 걸 알라고 하셨죠. 그 말은 “위로는 억만 분이 깨달으셨다 하더라도 한 도량의 한 부처니라. 그러니 평발 한 발로 디뎠느니라.” 이거야. 그러니 얼마나 거룩한 말씀이냐는 거죠. 그 말을 고렇게까지는 안 하셨어도 금강경이나 화엄경이나 반야심경을 본다면 거기에 그냥 탁탁 들어가 박혀 있어, 아주. 글자 아닌 글자를 아주 거기에다 똑똑 박아 넣었다고. 
엊그저께 어느 스님이 “왜 반야심경을 그렇게 풀이해서 미국에 가서까지 하느냐?” 그러더라고요. 그거를 영어로다가 써서 우리 발음대로 그냥 하는 거예요, 미국 사람들도. 조곤조곤 차근차근 그걸 읽어 내려가는데, “참 잘 읽는다.” 내가 그랬다고요. 그걸 어떻게 따집니까? 그러니까 우리말 영어죠. 하하하. 그랬는데 아, 그것도 흉인 거예요, 글쎄. 

그래서 그 스님더러 그랬어요. “부처님이 좋은 말씀을 하셨다고 경전을 보고 지금 그대로 해야 한다면…, 그때 시절에 트럭이 있었겠느냐, 짐차가 있었겠느냐, 짐차라는 이름이 있었겠느냐?” 그랬습니다. 예를 들어서 얘긴데, 그때 만약에 지게꾼이 있었다면 “지게꾼!” 하고 불러야 그땐 대답을 했는데 지금은 짐차 트럭을 불러야 됩니다. 그것도 전화로 해도 됩니다. 그러면 짐차를 불러야 하는 지금 시절과 지게꾼 부르던 그 시절이 다른데 지금도 그럼 “지게꾼! 지게꾼!” 하고 불러야만 하느냐? 그럼 트럭 운전수는 대답도 안 합니다, 지게꾼을 부르니까. 자기 이름이 아니거든. 그런데 지금 지게꾼! 지게꾼! 하고 부르란 말입니까?” 그랬어요. 그랬더니 싱긋이 웃으면서 하시는 말씀이 “스님 말씀이 옳소! 참, 우리가 못하는 걸 당신이 해 줘서 얼마나 감사하고 좋은데….” 그러고는 그만두더군요, 허허허….  

오늘은 이렇게 설법하는 날이 아닌데 하다 보니까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마는, 내가 그렇게 잘하니까 나를 믿고 따르라 이런 게 아니고, 본래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이 진리가, 뜻이, 법이, 중용이 바로 그러하다 이런 겁니다. 오늘은 우리가 서로 토론을 하는 날인데 나 혼자만 지껄여서 안됐지만 어떡합니까? 하하하…. 그러니 질문들을, 청년회도 그렇고 모두 질문들 하십시오.

질문자1(남) 질문드려야 될 내용들을 미리 다 법문 중에 말씀해 주셔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질문드릴 것이 많아서 무엇부터 말씀드려야 될지 모르겠는데, 오늘은 습에 대해서 여쭙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찰나찰나 돌아가기 때문에 습이 붙을 자리도, 업이 붙을 자리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우리 중생은 몇억 겁을 거치면서 습이 쌓이고 쌓여 가지고 그 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체가 없다고 그러는데 체가 없는 마음에 어떻게 습이 붙어 가지고 이생에 와서 중생들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 하나는, 큰 깨침을 얻으셨다는 어른들께서도 끝까지 그 습이 남아 가지고 가끔은 부지불식간에 그 습의 행동이 나타나는 때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좋을지 가르침 받자옵고자 합니다.

큰스님 그 얘기 하는데 뭐가 그렇게 깁니까? 하하하. 첫째는, 무조건 ‘네가 있다는 것을 네가 증명하는 거다.’ 하고서 관하는 거고 둘째는, 가정살이 돌아가는 것 전부 ‘그놈이 하는 거니까’ 하고 관하는 거죠. 그놈이 하는 건데 뭐가 그렇게 답답하고 그렇습니까, 네? 이거 보세요. 내가 말하는 건 잘되고 못되고 그걸 떠나서 말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답답한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 잘 안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 잘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여기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이겁니다. 

그거를 아까 내가 얘기했죠. 그것이 다 내 속에서 나오는 건데 진짜 우주간 법계와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일체제불이 한 골수에 들어서 한자리를 할 수 있다면…, 아까 그 소리 한 겁니다. 내일 죽는다, 이따 죽는다, 우리 식구가 다 멸망한다 이러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런 결사적인, 나를 버린 그 마음이 정통으로만 들어간다면 뭐가 그렇게 어렵겠습니까? 뭐가 답답합니까? 그게 다 욕심입니다. 그렇게 생각 안 됩니까? 욕심입니다. 그 욕심을 부리지 않고 그냥 닥치는 대로 늠름하게 넘어가면서, 진짜 칼을 악으로다 뺄 때는 그냥…. 이거 보세요, 악으로 사는 사람은 진짜 칼을 썩 뺐을 때는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됩니다. 그러나 살리는 칼을 썩 뺐을 때는 수많은 중생들을 다 살릴 수 있고 한 나라를 세울 수가 있고, 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전체를 다 한 칼로다가 부릴 수도 있다 이 소립니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답답합니까? 내일 죽으면 어떻고 이따 죽으면 어떻고 식구가 다 죽으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한 번 죽을 거! 안 그렇습니까?

아니, 내가 그 말을 하는데 너무 잔인하고 너무 안됐다고 생각합니까? 아휴, 참! 이 세상 이 길, 그냥 걸을 뿐이에요. 우리가 그냥 살 뿐이에요. 왜 사나? 내가 어디서부터 이렇게 와 가지고 지금 무엇을 하고 가는지 알아야 답답하지 않다 이 소립니다. 야! 이거 뭐, 캠핑 와서 잠시 있는데, 내가 생각하고 이러는 것이 우주간 법계에 다 통신이 되는구나. 이럴지언대 내가 뭘 그렇게 걱정하랴. 하나도 걱정할 게 없어요. 소 한 마리를 잡는다 해도 걱정이 없고, 소 한 마리를 죽인다 하더라도 걱정이 없고, 이 세상이 다 없어진대도 걱정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살릴 수가 있는 거지, 아니, 그놈의 거 하나하나 걱정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건지고 살릴 수 있습니까? 가정도 그래요. 이판사판이에요. 두 가지뿐이야. 죽느냐 사느냐 요거뿐이지, 거기에 또 뭐가 붙습니까?

어떤 스님이 날더러 이렇게 말하더군요. “스님, 이 토굴의 문에 못 좀 박아 주십시오.” 그래서 “왜?” 그러니까, 난 그런 것도 모르고요, 생각을 안 했으니까. “못 좀 박아 주십시오.” 그래서 “못은 왜?” 그러니까 “들어간 뒤에 바깥에서 못을 박아서 못 나오면, 죽지 않으면 얻을 거 아닙니까? 죽지 않으면 얻고 얻지 못하면 죽고, 이거 둘뿐 아닙니까?” 이거야.

여러분이 이 도리를 알면요, 정말 아주 너그럽게 살아갈 수 있고 너그럽게 두루 할 수 있고, 항상 싱그레 웃고, 남이 갓 미쳤다고 할 정도로 싱그레 웃고 길을 지나갈 수 있고, 소 둥구리를 봐도 싱그레 웃을 수 있어요. ‘저거 가엾다.’, ‘저거 죽으러 가지.’ 뭐, 이런 생각조차 없습니다. 왜? 아주 곧바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소 만 마리를, 아니 어떤 거든지 만 마리가 모두 죽었다 그럴 때 그것을 빗물 방울로 친다면 한 골짜기에 다 모였다 해도 한 골짜기에서 한 바다로 들어가는 물일 뿐이지, 한 그릇이지 그게 두 그릇입니까?(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1년 5월 5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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