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엔 출재가 없다… 재가불자 ‘롤모델’

하남성 남소 단하사 조사전에 있는 단하 천연 선사의 조사상. 옆에 방거사도 모셔져 있다. ‘단화소불’로 유명한 단하 천연과 방거사는 함께 과거를 보러 가던 중 한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발심하게 된다. 출가한 단하 천연은 조동종 계열의 선사가 됐고, 방거사는 재가자로서 수행을 했지만 훗날 ‘중국의 유마거사’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부처님 재세 당시, 우바리·니티 등 천민 출신 비구가 아라한이 되었고, 수많은 여인들도 정각을 이루었다. 곧 깨달음 앞에 남녀노소가 있을 수 없고, 출·재가자의 구별이 없다. 이 점을 크게 발전시킨 이들이 대승불교를 일으킨 보살들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수십생 동안 보살로서 수행(因)을 통해 부처가 되었듯이(果) 대승불교 보살들도 누구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부각되었다. 중국에서는 불교가 유입된 이래 재가자의 신행활동이 일반화되었으며, 역대로 깨달은 이들이 많이 있다. 또한 근현대 중국에서 불교가 나락에 떨어진 즈음 불학을 일으킨 이들이 재가자들이다. 당나라 때, 두 재가자인 방거사와 황삼랑을 만나보자.

마조 제자인 황삼랑과 방거사
재가자이면서 正覺 성취 이뤄

방거사 가족 모두 수행 생활
열반 설화 유명, 예술 소재로
재가자·사대부들의 동경 대상

황삼랑(黃三郞) 거사에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는 <마조어록>과 <조당집>에 전한다. 황삼랑은 서천(西川)에 살았는데, 두 아들을 모두 마조(709~788)에게 출가시켰다. 거사는 출가한 아들들이 사찰에서 잘 적응하는지 걱정되어 두 아들을 찾아갔다. 거사는 두 아들이 별 탈 없이 수행을 잘 하고 있어 안심되었다. 거사가 아들 스님들에게 말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를 낳은 이는 부모요, 나를 완성해주는 이는 벗이라고 했습니다. 두 스님은 나의 자식이지만, 출가자가 되었으니 나의 도반이 되어 이 늙은이를 잘 지도해 주십시오.”

자식을 출가시키고, 본인도 수행코자 두 아들을 도반으로 보는 황삼랑의 기개가 뛰어나다. 두 스님은 자신들은 아버지를 제도할 능력이 못된다며, 아버지를 마조에게 인도하였다. 마조가 먼저 황삼랑에게 물었다.

“서천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대는 서천에 있는가? 홍주(현 강서성 남창)에 있는가?”
“가정에는 두 가장이 없고, 나라에는 두 왕이 없습니다.”
“그대는 나이가 몇입니까?”
“85세입니다”
“비록 그렇게 계산하지만 무슨 나이인가?”
“만일 스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일생을 헛되이 보낼 뻔 했습니다. 스님을 뵈온 뒤에는 칼로 허공을 긋는 것과 같습니다.” 

마조는 거사에게 육신이 어디 있는가를 물은 것이 아니다. ‘지금 마주 서 있는 그 본체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이어서 마조가 육신의 나이를 물었는데, 이 또한 육신의 나이를 물은 것이 아니다. ‘지금 자신의 나이라고 말하는 그 사람의 본래면목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다. 이렇게 근기가 뛰어난 거사였기에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이루었고, 죽을 때까지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당시 유명한 강사였던 양좌주를 마조에게 소개시켜 사교입선(捨敎入禪)토록 만들었다. 다음은 <조당집>에 전하는 이야기인데, 내용이 조금 다르다. 

황삼랑이 마조선사에게 말했다.
“제가 스님을 뵙지 못했더라면 일생을 어영부영 살다갈 뻔 했습니다. 이렇게 늘그막이라도 스님을 뵙고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마치 칼로 허공을 베어버린 기분입니다.”

마조가 말했다. “거사님, 어디에서든 늘 진실 그대로입니다(隨處任眞). 서 있는 그 자리가 곧 참됨입니다. 모두가 자가의 본체입니다(立處卽眞 盡是自家體).”

진실과 관계없는 우리만의 존재 방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방식 그대로가 바로 진실(立處卽眞)이기 때문이다.

마조는 때에 따라서 어디에서든 늘 진실 그대로(隨處任眞)라고 하였고, 또 현실 있는 그대로가 참됨(卽事而眞)이라고 설하였다. 여기서 선사의 긍정적인 현실중시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

조사선을 완성시킨 임제(臨濟, ?~866)도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서는 곳마다 진리의 땅이 되게 하라(隨處作住 立處皆眞)’고 하였다. 즉 자신의 존재가치를 결정해 가면서 현실 그대로에 적응하면서 그 자리에서 느끼는 참된 자각이 바로 자유인 것이다.

다음은 선불장(選佛場)으로 유명한 거사를 만나보자. 방온(龐蘊, ?~808)은 성을 그대로 따서 ‘방거사’라고 한다. 방거사는 호북성 양양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유학을 공부했던 사람이다. 어느 해 단하 천연(丹霞 天然, 739~824)과 과거시험을 보러가는 길녘에 한 스님을 만났다. 잠시 길가에서 대화를 주고받는 도중, 스님이 이들에게 물었다.

“지금 두 분은 어디 가는 길입니까?”
“우리들은 과거시험 보러 갑니다.”
“세속에서 명예를 추구하는 관리로 선택되는 것보다 수행해서 부처에게 선택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부처에게 선택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조라는 유명한 선지식이 있는데, 그 선사를 한번 만나 뵙지 않겠습니까?”

이 소리를 듣고 천연과 방거사는 과거시험을 단념하고, 마조 선사를 찾아갔다. ‘선불장’이라는 단어는 방거사와 관련되어 시작되었고, 한국이나 중국 사찰의 선방 편액으로 많이 걸려 있다. 훗날 방거사가 선불장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시방(十方)의 무리가 한 자리에 모여서 제각기 무위(無爲)의 진리를 배우나니,
여기는 바로 부처를 뽑는 곳, 마음의 공(空)을 깨닫고 급제하여 돌아간다.

이후 방거사는 재가자로 수행하였고, 천연은 출가 승려가 되어 조동종 계열의 선사가 되었다. 이 천연과 관련된 공안이 ‘단하소불(丹霞燒佛)’인데, 목불을 태워 방을 따뜻하게 하였다는 그 선사이다. 다음은 방거사의 유명한 시 구절을 보자. 

내 일상생활에 특별한 일이 따로 없고 내 스스로 차별 없이 즐긴다.
취하고 버릴 것이 따로 없으며 너무 법석 떨 것도 치워 버릴 것도 없다. 
누가 주사(朱紫)라고 불렀는가? 산과 언덕엔 티끌하나 없는데
신통과 묘용은 물 긷고 땔나무 줍는 일이로다.

앞의 선시는 일상생활 속에서 선을 실천하는 대표 시 구절로 유명하다. ‘주사(朱紫)’라는 말은 붉은 색의 관복을 입은 고관대작을 상징한다. 방거사는 세속에서 얻은 명예인 관복 입은 관리보다는 최상의 진리인 진여(眞如)이니 실상(實相)이라는 것조차 마음 두지 않는 경지를 추구함을 시사한다. ‘신통과 묘용은 물을 나르고 섶을 나른다’는 표현은 중국 초기 선의 신비한 신통사상이 극복되어 일상성의 종교로 변화된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시 구절이다.  

방거사는 수행자로서 출가도 하지 않고 제자도 없었으나 ‘중국의 유마거사’라고 칭한다. 그는 지식인이요, 수행자로서 선사들과 날카로운 법거량을 하였고, 공부가 부족한 승려들에게 따끔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방거사는 당시 선종의 거장인 석두(700~790)선사를 뵙고 선지(禪旨)를 얻은 뒤, 마조를 친견하여 2년 동안 정진하였다. 방거사가 마조를 친견했을 때, 방거사가 마조에게 이렇게 물었다.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대가 서강의 물을 다 마시면, 그때를 기다려 말해주리라.”

이 이야기는 ‘마조서강’이라는 유명한 공안이다. 방거사에 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다. 참선을 시작한 후 재산을 모두 배에 실어서 동정(洞庭)의 상강(湘江)에 침몰시키고, 호북성 양양 교외의 작은 집에서 대나무 소쿠리를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어른들께서 수행자는 춥고 배고파야 공부한다고 하듯이 재가 수행자의 삶도 가난해야 수행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여튼 방거사의 삶은 무소유와 무집착의 실천이었다. 이러한 방거사의 소식을 알려주는 게송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오랫동안 산에 살아 일찍이 이미 성안을 벗어나 있다.
집이라고는 초가 삼칸 뿐이니, 한 칸이라야 두길 정도가 될까?
방대(아들)에게 물려 줄 것도 없다. 공공(空空)하여 앉을 곳조차 없다.
집안은 공공공, 공공하여 재물이 있을 리 없다.
해가 뜨면 공 속을 걷고, 해가 지면 공 속에 눕는다.
하염없이 앉아 공하게 시(詩)를 읊으니, 시가 공하여 그 화답 또한 공하다. 

방거사가 아들에게 유산으로 남긴 재산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상의 진리(空)’였다. 방거사가 입멸할 무렵, 딸 영조에게 “해 그늘을 보아서 정오가 되거든 말해 달라”고 하였다. 잠시 후 영조는 “아버지, 일식이어요. 조금 나와 보세요”라고 하자, 방거사가 잠깐 나온 사이 딸 영조가 평상에 올라가 열반에 들었다. 방거사는 “내 딸이 솜씨가 빠르구나!”라는 말을 남겼다.

일주일 뒤, 그 마을 태수인 우적공이 방문했을 때, “모든 것은 공무(空無)한 것이니 한갓 그림자나 산의 메아리와 같은 것이오. 몸 건강히 지내시오”하고 그의 무릎에 기대어 입멸하였다. 우적공이 그의 아내와 아들(방대)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아들은 밭에서 일을 하다 선(立) 채로 입멸하였다. 방거사 부인은 아들을 다비한 뒤 어디론가 떠났다고 하는 일화가 전할 뿐이다.

방거사 가족이 모두 깨달음을 이룬 이상적인 가족으로, 그림·창극 등 주된 소재거리가 되고 있다. 방거사는 중국사에서 사대부들이나 재가불자들의 롤 모델이며,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유학자와 문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