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정화정화운동(淨化運動)’ 혹은 정화불사(淨化佛事)’로도 불리며, 1954년부터 1962년까지 대처승의 배제, 비구승에 의한 종단 재건, 한국불교 전통 재건, 불교 근대화 운동을 내용으로 하는 불교 내 자정운동이다.

직접적 계기는 1954520일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승은 물러가라는 요지의 유시를 내린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이 유시의 요지는 대처승 제도가 일제의 잔재로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말살코자 한 의도가 있는 것이므로, 대처승은 사찰에서 떠나야 하며, 사찰의 주도권은 비구승이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정화운동은 화합을 통한 불교개혁 차원보다는 비구승과 대처승 사이의 분규 양상으로 급전됐다. 정화운동의 주도측은 비구승이 되었다. 비구 측은 일제하에서 한국불교가 타락한 원인을 대처승이 불교계를 장악한 데에서 찾았다. 그러나 수적으로 불리했던 비구측은 대처승과의 분규과정에서 그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비구니 스님들도 동원했다.

음력 11월 경으로 기억된다. 범어사 대성암에 있던 나도 당시 범어사 조실이셨던 동산 스님의 명으로 부산역서 오후 6시 출발하는 완행열차를 타고 다음날 아침 8시에 서울역서 내려 견지동 조계사로 갔다.

조계사에 도착해 보니 대웅전은 자물쇠가 굳게 채워져 있었다. 조계사 뒷마당엔 발이 빠질 정도로 눈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전국서 모인 대중들이 눈위에 그냥 앉으려 하자, 전국신도회장 박충석 의원이 가마니라도 깔고 앉으라고 권했다. 하지만 자운 스님이 오늘 모인 대중들은 정화불사 때문에 왔으니, 고생이라 생각말고 그냥 앉읍시다고 말하시자, 일제히 대중들은 말없이 눈위에 그대로 앉았다.

그날부터 소승은 전국서 올라온 스님들과 함께 조계사에 머물며 정화 운동에 동참했다. 대웅전 동쪽은 비구 스님 처소, 서쪽은 비구니 스님들 처소로 정했다. 3일간 단식 후 동대문운동장서 청와대 입구까지 서울시내를 행진 하면서 구호를 외쳐댔다. “대처승 물러가라! 아기 아빠 물러가라! 비구승이 주인이다! 총무원을 넘겨라등등. 단식과 시위는 그후로도 계속 되었다. 한번은 시위를 하다가 종로 경찰서에 3일간 감금된 적도 있었다.

18개월동안 우리는 조계사를 지키며 계속 머물러 있었다. 한 번은 새벽 예불시간에 깡패인지 대처승인지 모르겠지만 300명 이상이 법당으로 쳐들어와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욕하고 발로 차고 밖으로 집어던지는 등 폭력과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소승도 그때의 후유증으로 60여년 이상을 위장병, 관절염, 심장비대증 등으로 투병중이다.

이처럼 정화운동서 우리 비구니 스님들의 역할도 한 몫 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이런 숨은 공로를 인정 받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한국불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중 하나인 불교 정화에 참여한 공로자들을 발굴하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종단 차원에서 숨은 공로자들을 찾아내 치하하는 일들이 하루빨리 추진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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