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배려 돋보이는 수행 프로그램들

현지 탐방에서 익명성은 도움이 된다. 미얀마 수행처에서 내 자신이 불교학 전공자라는 것과 인도 유학으로 상좌부 불교에 익숙하다는 사실을 숨겼다. 그래야만 많은 것을 새롭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하시 선원에서도 20여 일이 지났건만 서로 인사도 하고 가끔 이야기도 하지만 나 또한 한국의 젊은 스님, 노스님의 법명과 사찰 이름을 묻지 않았다. 물어보려면 나부터 먼저 소개하는 것이 예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원 입구의 명단 게시판에 의무적으로 이름을 적게 되어 있다. 하지만 나의 지정 숙소인 4호실 칸에 ‘J. H. CHO’로 적어 구체적인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른 한국 스님들은 모두 빠알리 법명을 써 놓아서 한국식 법명을 알 수 없었다. 재가자는 한국식 이름을 써 놓았다.

매일 수행 일정표대로 생활
나라별 인터뷰 시간 정해져
한국인들은 매주 화·목 오후
법회·인터뷰 시 통역 봉사도


그래서 한국 사람끼리 서로 한국스님에 관해 이야기할 때 ‘젊은 스님’, ‘노스님’으로 구별하여 불렀고, 재가 수행자는 몇 번 방 요기(Yogi)로 불렀다.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에 불교와 수행처에 문외한처럼 행동하며 다른 이의 이해와 관점을 들여다보려 했다. 아는 것이라도 먼저 말하지 않고 물어 보기도 하였다. 어떤 것에 내가 먼저 말해 버리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불교관이나 불교 수행에 관한 견해를 알 수 없다. 더구나 사람들이 내가 불교문화에 익숙한 불교 전공자라는 것을 알면 거꾸로 나에게 많은 것을 물어 볼 것이다. 그것을 감당하기는 힘들다. 선원에서의 공부는 가능한 대화를 줄여야 한다.

외국인 선원 건물의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수행에서는 천천히 움직일수록 선정수행 공부에 더 큰 진전이 있을 것이다.” 마하시 스님 이후의 선원장이셨던 우 빤디따 스님의 말씀이다. 빤디따라마 선원의 입구에도 마찬가지로 게시돼 있다. 이어서 다음의 순서로 게시된 공지를 볼 수 있다.

△1.외국 선수행자를 위한 일과표(Time Table) △2.팔재계(八齋戒) △3.선수행자의 규칙 △4.칠불통계게(七佛通戒揭) △5.12가지 생활상 규칙 시행 △6.선원 거주자의 4가지 의무(수행처 안팎의 청결·수행자 출입 기록·새벽 3시 기상·저녁 9시30분 건물 출입문 폐쇄) △7.방 번호와 요기 명단 게시판

12가지 생활상 규칙 시행의 구체적인 내용은 미처 기록하지 못했다. 남성 외국인 수행처에는 모두 14개의 방이 있다. 한국인 6명, 일본인 2명, 싱가포르 스님, 말레지아 스님, 방글라데시 스님 등이 머물며 함께 수행하고 있다. 한국은 처음에는 스님 2명에서 나중에는 네 명으로, 그리고 일본인은 한 스님과 한 명이 재가자가 함께했다. 이외에도 중국 승복을 입은 헝가리인 등이 머물렀다.

건물의 입구와 로비에는 선원의 하루 일과표가 게시돼 있다. 이는 각 방의 책상 앞에도 붙어있으며, 매일 반복되는 하루 일과이다.

일과표의 공양 시간대에 “공양청의 출입 시 일거수일투족의 신체적 현상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문구가 추가되어 있다. 정기 수행점검일(interview)은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 3시 30분과 정기법회(Dhamma Talk)는 일요일 오후 3시 30분이다. 또한 선원 청소일은 월요일 아침공양 이후 시간으로 정해져 있다.

다음은 마하시 선원에 머물며 인상적이었던 시설과 관리에 관한 기록을 옮겨본다. 첫째, 선원은 수행자 관리에 큰 배려를 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에 고마움을 느낄 때가 많다. 나라별로 수행점검일이 배정 되어 있다. 한국인은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에 이뤄진다. 수행 점검은 선원장 스님이 직접 나와서 수행자들의 공부 내용을 묻고 조언을 해준다. 한 사람 한 사람 기다리고 있으면 오후불식이지만 잔 받침의 유리컵으로 오렌지 주스가 친절하게 제공된다.

또한 한국어가 가능한 현지 통역자가 있다. 먼저 한국어 통역하는 미얀마 여성에게 자신의 공부 상태를 말한다. 예를 들면 호흡으로 인한 복부가 들고 나는 관찰과 경행 시 움직임 그리고 몸과 마음의 특별한 상태 등을 설명하면 이를 다시 선원장 스님께 통역해 준다. 그러면 사야도 스님은 미얀마어로 다시 자세히 설명해 준다. 통역자는 다시 한국어로 선원장 스님의 지도를 전한다. 이러한 시간과 힘을 아끼지 않는 배려와 꼼꼼함도 놀랍지만 통역자에 대한 비용을 어떻게 감당하는지가 궁금했다.

둘째, 매주 일요일 오후 3시 30분부터는 외국인 전체가 선원장 스님의 지도 아래 위빠사나 수행과 사상을 담은 사야도 스님의 저서를 가지고 공부한다. 매주 한 장 씩 약 2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이를 ‘정기법회(Dhamma Talk)’라고 한다. 이 때도 친절하게 주스 제공은 물론 통역 봉사도 이뤄진다. 한국인들이 많아 한국어로 번역을 읽고 일본어 등의 순서가 된다.

셋째, 숙소의 편의 시설로 냉온수기·커피·차·의약품·사탕류 등이 제공된다. 남성 외국인 숙소에는 냉장고는 없지만 비구니 스님 이야기를 들으니 여성 수행처는 냉장고까지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은 선원의 공양물이 분배된 것이다.

다음은 마하시 선원에 머물며 정리했던 마하시 수행법 또는 위빠사나 지도법을 소개해 본다.

첫째, 기본 행법으로 출입식념 수행에 있어 복부의 들고 남과 경행 시의 관찰(알아차림)을 지도한다. 이 같은 행법을 일상생활에서 지속할 것을 말한다. 이는 초기경전에도 나오는 불교 본래의 입장이다. 초기경전에서는 낮 시간의 일거수일투족의 주도면밀한 관찰은 물론 수면 중의 자기관리까지 설한다. 예를 들어 과식이나 포식을 경계시키는 이유가 그것이다. 왜냐하면, 잠에 떨어져 통제력을 잃고 본능이 작동되어 몽정까지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모든 생활, 행주좌와 어묵동정의 일거수일투족에서 정념정지의 수행 상태이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마하시에서는 잠들기 전까지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 뒤부터를 수행 시간으로 말한다.

둘째, 마하시의 ‘알아차림’ 수행은 일상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의식화 방법’에 초점이 놓여있다. 순간순간 알아차리게 하여 ‘무의식적 여지’를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일종의 대중요법과 병인요법 중 굳이 말한다면 심층보다는 표층을 중심으로 하는 대중요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끊임없이 놓치지 않고 끊어지지 않고 알아차리는 것으로 ‘무의식적인 병리적 활동’을 차단하는 방법이다. 이를 지속적으로 하면 무의식적 병리적 활동을 치료하는 효과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문제는 사마타와 좌선을 통한 깊은 선정 수준을 강조하지는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더 깊은 심층의 무의식과 번뇌(병인)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고 교정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잠재 번뇌까지 정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도 해보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몇 년을 하더라도 항상 같은 수준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수행을 할 때만 ‘의식적으로 알아차리려고’ 마음을 챙기는 등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항상 그 만큼의 힘이 들어야 할 수도 있고, 애쓰지 않아도 얼마나 저절로 수행이 되는지는 문제이다. 천천히 그리고 언어적 이름붙이기와 같은 의식적, 의도적 행법으로 묶여 버릴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해 본다. 항상 같은 힘을 들이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나 의도하지 않아도 알아차림이 가능해지는 것이 관건일 것이다.

넷째, 이렇게 알아차림이라는 의식화 행법은 체화(體化) 수준이 떨어질 수 있다. 수행은 몸에 베이게 하는 체화가 문제이다. 사마타 수행은 무의식적인 체화방법이다. 예를 들어, 자비관은 자비심을 일으켜 마음 깊이 자비심을 심고 확대하는 체화의 방법이다. 그렇게 될 때 자비에 반대되는 무자비한 화와 분노 등이 효과적으로 교정된다. 대치되는 생각으로 대체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영상을 마음에 떠올려 차츰 생각을 바꾸게 하는 법이다. 강한 의지로 생각을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일어난 생각에 의지가 무력화되기도 쉽다. 사마타 행법은 의지보다 생각을 활용하는 행법이다. 이에 반해 위빠사나는 일어나는 무의식적인 생각이나 의지(힘)을 바라보는 행법이다. 위빠사나는 선정 속에서 생각과 의지를 떠오르게 하여 정화시키는 행법이다. 철저하게 수동적으로 바라만 봄으로써 자연스럽게 소거시키는 방법이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생각의 대치법과 생각과 의지의 소거법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결국 깊은 선정 단계인 ‘비상비비상처정’이나 ‘상수멸정’은 무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무의식적 수준으로 깊이 들어가 정화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언어적으로 이름 붙이기와 움직이는 경행으로는 깊은 선정에 들 수가 없다. 이러한 생각을 해 보면서 과연 마하시 행법이 어느 정도까지 무의식과 관계하는 체화 수준이 가능할까를 다시금 따져 본다.

이 같은 필자의 마하시 행법의 평가는 당시 기록에 의한 순전히 개인적 이해이다. 원래 마하시 선원장 등은 초기경전과 논서에 바탕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중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취지의 행법이라 생각된다. 이 때문에 마음의 정화 문제에 수행의 무게중심이 있음을 간과할 수 있다.

즉 청정심이나 명징한 마음, 고요하고 명료해진 마음에 대한 점검은 어렵다. 그래서 수행처 내에서도 위빠사나 수행을 일종의 테크닉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처럼 위빠사나를 일종의 기법으로 오해 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마하시 행법의 알아차림은 어떻게 일상의 모든 활동에 연장하여 확대, 정착할 수 있는가는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마하시의 알아차림은 일상사에서 불선업(不善業)의 차단이라는 효과가 있다. 늘 의식화라는 알아차림의 노력은 불선업이 일어날 소지를 근본적으로 제어한다. 이 때문에 마하시 행법은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의 최소화’라는 말로도 일지에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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