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아름답고도 부정적인 삶
본래 인간은 부정성 노출 쉬워
긍정적 기억 더듬어야 성장해
부정적 기억은 당당히 마주하고
허용하면서 소멸되는 것 알아야
예닐곱 살 시절, 나의 겨울밤은 고열과 편도선염, 기침의 기억으로 가득하다. 초저녁까지 잘 놀고 잘 자던 아이가 새벽녘이면 목줄을 세워 피를 토하듯 기침을 해댔다. 붉은 선홍색으로 부풀어 오른 목젖에 기생충이라도 기어 다닌 걸까. 어린 생각으로도 목젖에 손가락을 넣어 한바탕 득득 긁어댈 수만 있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땀에 전 몸을 굼벵이처럼 오므렸다 펴기를 반복하며 기침을 해댔다. 달궈진 조약돌 같은 얼굴로 이불 안팎을 나뒹굴며 자다 깨다 했다.
어머니는 혼절 지경이 되어 몸부림치는 내게 새벽 어스름을 더듬어 다가왔다. 미친 듯이 기침하는 아들 걱정에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를 비웠을 터다. 당신은 일단 내 이마를 손바닥으로 가만히 덮어 체온을 쟀다. 오메, 어쩌끄나. 내 아들. 이마를 짚은 손으로 내 가슴을 쓸어내리거나 배를 둥글게 문질러댔다. 이상도 하지. 어머니의 새벽을 들깨운 나의 몸부림은 빠르게 자지러졌다. 당신은 지난 밤 내 목에 둘러주었던 수건을 풀어 제쳤다. 어머니는 자신의 혀를 내밀어 내 목덜미 이곳저곳을 핥았다. 어머니의 혀는 변함없이 따뜻하고 시원하고 간질간질했다. 제삿날 향불 내음 같은 것이 어디선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나는 밭은 숨을 쉐엑거리면서도 새끼의 목을 여기저기 핣아대는 어미의 혀에 목울대를 길게 뻗어 내맡기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끈끈하고 시원한 침이 내 목구멍 속 득시글거리는 기생충을 모두 잡아 죽인다는 상상을 했다. 한참동안 아들의 목을 핥아댄 어머니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엄마 침 발라 났응게 인자 곧 좋아질 거여. 염려 말고 한숨 푹 자.”
내 삶이 아름다운 이유
‘내 삶이 아름다운 이유’는 내 기억 속 어여쁜 사연을 발굴하자는 의도다. 살아온 날들을 찬찬히 돌아보면 이런 봄꽃 같은 일들이 삶의 갈피 여기저기에 피어 있다. 그럼에도 당신은 사랑 받은 기억보다 상처 받은 일을 더 많이, 선명히 붙들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아니다. 당신 탓이 아니다. 인류는 긍정성보다는 부정성에 더 노출되기 쉽다는 것이 심리학의 정설이다.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지나간 일에 대한 반성이나 후회, 미래에 대한 근심, 걱정의 기제가 없었다면 문명 발달을 기약할 수 없었고, 그것의 효능을 현생 인류의 유전자는 쉽게 털어내기 어려울 것이었다. 우리의 유전자에는 두려움과 의심의 프로그램이 모든 순간 작동한다.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고 하지 않던가.
글쓰기명상을 안내할 때 자주 던지는 질문이 있다. “길을 가다가 불길이 치솟는 화재 장면과 두 연인이 오래만의 만남을 기뻐하며 눈물 짓는 장면이 동시에 포착됐다. 이때 당신의 관심은 어느 쪽을 향할 것 같은가?” “거의 모든 선거에서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막판에 흑색선전이 판을 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의도적으로 ‘아름답거나 긍정적인 대상’을 발굴해내는 마음 근육을 강화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불편과 두려움, 핍진, 불안, 근심이라는 관념에 포박되기 십상이다. 당신의 의식 80% 이상이 자동화된 부정성 위에 놓여 있다지 않은가. 삶 전반을 뒤져서라도 애써 아름다운 기억을 추출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라도 해야 당신의 내면은 겨우 균형과 조화의 힘을 회복한다. 나는 이 에너지의 활용이 행복한 인간관계의 바탕이라고 생각한다. 긍정성은 인류 역사 이래 두려움과 근심 등에게 야금야금 빼앗긴 마음의 영토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내 삶이 아름다운 여러 가지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집중력과 지구력이 필요하다. 녹슨 곡괭이로 마른 땅을 찍어대는 개척 근성이 필요하다. 이것이 어쩌면 당신의 행복을 구체적으로 확장해 가는 일 아니겠는가.
- 살아오면서 타인과 나눴던 아름다운 대화를 시나리오 형식으로 재현하는 글쓰기
- 인연 중에서 긍정적 인상으로 남은 사람의 이름 적고, 인사 나누기
- 아름다운 사건을 공유했던 친구에게 전화해서 취재 형식으로 이야기 구성하기
- 아동에서 어른이 되는 동안, 사건 속 갈피에 끼어있는 예쁜 이야기 발굴하기
- 살아온 동네 구석구석을 기억 속에 되살리면서 그때의 내 모습 발견하기
-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더듬으며, 그 안에서도 아름다웠던 순간 포착해내기
물론 위와 같은 나의 제안을 심각하게 받을 일은 아니다. 본격적인 산문 쓰기를 하자는 것이 아닌 바에는 사명감으로 무겁게 무장할 필요도 없다. 그저 마음의 시선을 살아온 생애 속으로 돌려서 가만히 굽어 살피자. ‘무엇이 있었더라’하면서. 처음에는 새까만 강물을 바라볼 때처럼 막막하리라. 하지만 찬찬이 내 안을 들여다보면, 아름다운 사연이라는 물고기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지나가는 모습이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럴 때 적어보자. 딱 한 줄만 드러낸다는 마음으로 가볍게. 그러면 반드시 두세 줄 쓰게 돼 있다. 내가 찾아낸 ‘내 삶이 아름다운 이유’.
- 53세, 친구 석이가 죽었다. 폐암 말기였고, 손 쓸 틈이 없었다. 죽기 며칠 전, 석이는 나를 보자고 했다. 병실에는 다른 남자가 하나 있었다. “내 친구다” 석이가 말했다. “나 대신 이 친구하고 잘 지내.”
- 초등학교 4학년 담임, 장현수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장난치다 들킨 나를 교탁으로 불렀다. “잘못했지?” “예.” “그럼 매 맞아야지?” 울상이 된 나를 선생님은 번쩍 들어올렸다. 두 팔로 내 몸을 아나콘다처럼 휘감은 선생님 얼굴은 온통 털북숭이였다. 선생님은 그 화장실 수세미 같은 털북숭이로 내 얼굴을 박박 문질러댔다. “아프지?” “예.” “그럼 됐어. 들어가.”
내 삶이 부정적인 이유
9년 전 4월 어느 날이다. 그날 내 앞에 앉은 네 사내의 체구나 자세는 범상치 않았다. 한 사람은 황토색 죄수복을 입었고 나머지 세 사람은 푸른 옷을 입었다. 20대 초반 청년, 40대 초반, 40대 후반,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이들의 공통점은 헐렁한 죄수복 속에서도 살집이 두텁고, 어딘지 기세등등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20대 초반 청년의 낯빛은 깎아놓은 오이 속살 같았는데, 그의 긴팔 죄수복 팔목 부위에 뱀 대가리 문신이 보일락 말락 하면서 소매깃을 들랑거렸다.
나는 몇 달 전 전화를 통해 이들 상황을 전해 들었다. 수감 중에 ‘사고를 쳐서’ 징벌방을 들락거리는 수인들인데, 그들에게 명상 안내를 해달라는 문의였다. 그때만 해도 교도소 명상 안내를 해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도전해보고 싶었다. 3개월 후부터 일주일에 하루 내내, 4회씩 부탁한다는 상담 실무 교도관의 부탁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1개월이 지나고 또 1개월이 지나면서 마음이 점점 무거워져갔다. 교도소라는 데는 어떤 곳일까. 감옥 속 징벌방에 있는 그들은 얼마나 심각하기에 그런 처지가 됐을까. 정신적으로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말 한마디 삐끗했다간 순식간에 한 방이 날아들지도 몰라.’ 친구하고 껄껄거리다가도 교도소 생각만 스치면 가슴 한편이 문득 묵지근하고, 몸 안에서 ‘터엉’하는 소리가 울려오는 듯했다. 그 교도관에게 전화해서 그날 갑자기 아들 결혼식이 잡혀버렸다고, 쩔쩔 매는 시늉을 하고도 싶었다.
교도소 명상 안내 1주일 전, 막바지에 몰린 심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나는 2500년 전 인도의 한 수행자를 떠올렸다. 생과 사의 문제를 풀기 전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결의한 그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하찮은 주제로 짓눌려 있는가. 오늘은 하다못해 그 흉내라도 내보리라. 그날의 주제는 ‘내 안의 폭력’이었다.
오래지 않아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누군가의 몸을 휴지처럼 찢어버리고 싶었던 기억과 마주했다. 저주와 피해의식의 불구덩이에서 불면했던 밤. 그 인간을 죽여서 땅 속에 파묻어버리리라 하는 생각과 그런 나를 보면서 진땀을 흘렸던 기억들. 보지 않고 확인하지도 않은 생각에 붙들려서 누군가를 난도질했던 상상들. 이것이 내 몸을 통한 행위로 일부라도 드러났었다면? 그랬다. 나는 아마 그들이 있는 곳에 함께 있을 것이었다. 이런 사유는 내 의식의 변성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놀랍게도 그들이 오히려 친근해지는 경험을 했다. 혹시 내 안의 어둠이 그들에게 전이된 건 아닐까.
내면의 부정성을 속 깊이 살피다보면 세상의 부정성을 변명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당신들의 분노, 추악함, 두려움, 근심, 찌질함, 욕설 따위가 모두 나의 내면 어딘가에 쌍둥이처럼 놓여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나의 욕설과 당신의 욕설이 다르지 않음을 봤을 때, 나의 이유가 분명한 것처럼 당신의 이유도 분명하리라는 이해. ‘내 삶이 부정적인 여러 가지 이유’를 참을성 있게 서술하다보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말세의 난잡과 혼란, 추악함에게서 따뜻한 동류의식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닐까. 직접 실행해 보는 수밖에 없다.
- 살아온 중에 슬프거나 두렵거나 수치심에 휩쓸리게 한 사람의 결정적인 말 한마디 적기
- 살아온 중에 나를 부정적 감정에 빠지게 한 사람의 표정 묘사하기
- 오늘 하루, 평온한 표정 속에 감춘 내면의 욕설, 분노, 슬픔, 좌절 등의 기억을 말하듯이 드러내보기
- 내 기억 속, 상처 입은 내가 하지 못했던 말, 구어체로 적어보기
- 나를 수치심에 휩싸이게 했던 그의 말, 다시 떠올려 적어보기
- 혐오감이 올라왔지만, 직책이 낮아서 하지 못했던 말, 구어체로 드러내기
- 나를 두려움(슬픔, 좌절, 우울, 분노 등)에 떨게 한 말, 들은 대로 적어보기
- 그동안 감추고 싶었던 말, 차마 입에 담지 못했던 말, 남에게 꺼내지 못했던 상상 등을 마음껏 적어보기
메스로 뱃살을 그어 자신의 내장을 꺼내보는 일은 잔인하고 혐오스러울까. 그럼으로써 당신이 죽을병에서 살아나는 기회를 얻게 된다면? 글쓰기명상에서 내 삶의 부정성을 드러내는 일은 무슨 의미일까. 내 몸의 내장을 꺼내보는 일만큼 힘겹고 잔인한 작업이리라. 하지만 그럼으로써 내 안의 부정성과 세상의 부정성이 쌍둥이처럼 동일함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어떤 사유를 하게 될까. 안쪽의 나도 나이고 바깥쪽의 너도 나임을 알게 됐을 때, 혼란스러울까? 아니다. 당신은 안팎이 다르지 않음을 보는 순간, 진실로 긍정하게 된다. 부정과 긍정의 사이는 상대적이고 밀어내는 힘의 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당신의 의식에서 거부할 대상이나 밀어낼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당신은 부정을 허용함으로써 부정을 소멸하는 알아차림의 근육 만들기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