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파자파티와 안징재

무엇으로 어머니를 대신할 수 있나?
“신은 세상에 고루 존재할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 자식의 오욕을 자신의 어떤 고통보다 크게 느끼며, 평생을 걱정과 기대 속에 살아가는 어머니. 우리는 역사 속에서 수없이 많은 어머니를 만나게 되고, 어머니가 있어 훌륭하게 성장한 자식들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듣는다. 그 숭고한 모성애(母性愛)가 있었기에 어쩌면 인류가 아직까지도 존속하는지 모르겠다.

동서고금의 자식 사랑
성현에게도 부모가 있어
가장 큰 스승은 부모

전지전능한 신과 유일하게 대체가능한 존재인 어머니. 이 봄날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를 느끼면서 다시 한 번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 생각난다.
맹자(孟子)의 어머니는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 가는 삼천지교(三遷之敎)의 정성을 보였다. 또 맹자가 학업을 단념하고 일찍 귀가하자 짜던 베를 잘라 맹자가 다시 학업에 전념하도록 이끌었다. 율곡 이이(李珥)의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표상이 되어 우리나라 최고액 지폐에 초상을 올렸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필이라는 한석봉(韓石峰)의 어머니가 불을 끄고 떡을 썰며 자식의 부족한 기량을 깨닫게 한 예도 있다. 이처럼 어머니는 희생과 인욕(忍辱), 그리고 교육의 상징으로 거룩함을 다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자식을 걱정하고 돌보느라 한 세월을 보내지만 자식이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하기란 쉽지 않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겠다. 자기에게도 자식이 생기면 어머니보다는 자식 걱정이 앞서게 되고, 어머니의 사랑을 상기할 때쯤이면 이미 어머니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그때의 망극한 후회와 어머니의 은혜를 기리면서 당나라 때의 시인 맹교(孟郊)는 그 유명한 시 <유자음(遊子吟)>을 남겼다.

어머니 손에 잡힌 바느질 실은
길 떠나는 아들 위해 짓는 옷이지.
떠나기에 앞서 꼼꼼히 깁는 것은
혹여라도 늦게 돌아올까 걱정함이네.
한낱 풀포기 같은 마음으로
석 달 봄날의 햇빛 은혜를 갚기가 어렵구나.
慈母手中線  游子身上衣
臨行密密縫  意恐遲遲歸
誰言寸草心  報得三春暉

이 시의 마지막 두 구절에서 맹교는 아들의 심정을 촌초심(寸草心), 즉 한 포기 풀에 비겼고, 어머니의 마음은 봄날의 햇빛, 삼춘휘(三春暉)에 비겼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하기 어려운 것을 가리켜 촌초춘휘(寸草春暉)라고 부르게 되었다.
어버이를 지극정성으로 섬긴다는 뜻의 한자 효(孝)는 늙은 부모[老]를 자식[子]이 엎고 있는 모습을 본떴다고 한다. 말로만 외치는 효도가 아닌 몸으로 실천하는 효도가 참된 자식의 효성임을 기억하게 만든다.

부처님에게는 어머니가 두 분 계셨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세상에 낳은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석가모니의 아버지 정반왕(淨飯王)의 왕비가 되어 석가모니를 낳았다. 그녀는 석가모니를 잉태하기 전에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온 석가모니가 흰 코끼리가 되어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내로 들어가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만삭이 되어 출산을 위해 친정으로 가던 중 룸비니 동산에 이르렀을 때 산통이 왔다. 무우수(無憂樹)에 오른팔을 뻗어 나뭇가지를 잡는 순간, 석가모니가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를 뚫고 탄생하셨다고 한다. 위대한 어머니 마야부인은 살갗이 찢기는 고통을 이겨내고 부처님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나 마야부인은 석가모니가 위대한 각자(覺者)가 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출산한 지 이레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마야부인은 부처님의 탄생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주었던 것이다.

졸지에 어머니를 잃은 석가모니를 돌본 이는 마야부인의 동생인 마하파자파티였다. 그녀 역시 언니와 함께 정반왕의 왕비였는데, 제 피붙이보다도 더 귀하고 소중하게 석가모니를 키웠다. 그녀는 정반왕 사이에서 석가모니의 배다른 동생 난타(難陀)를 낳기도 했다. 난타는 나중에 형 석가모니를 따라 수행자의 길을 걸었다. 기른 아들과 낳은 아들이 모두 어미의 품을 떠나 더 큰 세상의 구도자가 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두 자식이 세상과 중생을 이끌 스승이 되어 그녀를 떠났을 때 마하파자파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석가모니와 난타는 개인적으로는 자식이지만 둘 다 한 나라를 이끌어나가야 할 왕자들이었다. 그녀는 왕비였고, 국가의 안녕과 미래에 대해 일정 정도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런 그녀에게 왕자들의 출가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손자이자 석가모니의 유일한 아들인 손자 라훌라마저 수행자의 길을 걸어 버렸다. 한 나라를 유지해야 할 기둥들이 송두리째 뽑혀나간 형국이었다. 기쁨 속에 저미는 슬픔은 누구보다 컸을 그녀였다.
그런 위기감 속에서도 깨달음을 얻은 아들 석가모니에 대한 그녀의 사랑과 흠모는 줄어들지 않았다. 한 사람의 아들이 아닌 만인의 스승으로서 석가모니가 아버지의 초청에 응해 왕궁 가필라성을 찾았을 때 직접 실을 자아 만든 비단옷을 부처님께 공양했다. 아들이자 부처님인 자식에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였다.

그런 그녀의 정성을 석가모니는 나 아닌 교단에 선사하라며 받지 않았다. 속세의 인연을 끊고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의 고귀함을 우선해야 할 석가모니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기에 그 어떤 섭섭함도 드러내지 않았다. 어머니로서 어디에도 빗댈 수 없는 희생과 숭모의 자세였다.
마하파자파티의 말년의 삶에는 더욱 더 가혹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왕이자 남편 정반왕은 세상을 떠났고, 나라는 위축을 넘어 망국의 길로 접어 들었다. 그녀로서는 선택할 길이 많지 않았다. 세속의 축복은 시들어갔고, 의지할 이들은 그녀 곁에 없었다. 오랜 고민 끝에 그녀는 아들 석가모니 부처님을 찾았다. 아들과 손자가 걸어간 수행자의 길로 자신을 인도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청했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아직 어머니를 불제자로 맞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험난한 수행자의 길을 걸으려는 그녀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스스로 삭발하고 출가를 원하는 많은 여성들을 이끌고 그녀는 난타에게 가서 석가모니 부처님가 출가를 허락하도록 주선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제야 부처님은 여성의 출가를 허락했고, 이들을 위해 여덟 가지 계율인 팔경계(八敬戒)를 주었다. 마하파자파티는 연로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부처님이 정한 계율을 성실하게 지켜 비구니 승단의 모범이 되었다. 그녀는 부처님이 열반하기 석 달 전에 찾아가 열반을 허락받고 거룩한 이승의 삶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녀는 비사리(毘舍利)에서 열반에 들었다.

그녀는 부처님의 친모는 아니었지만, 세상의 그 어떤 어머니보다 석가모니의 삶과 깨달음, 이후 승단의 운영과 진로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마야부인과 마하파자파티가 없었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거룩한 행적도 쉽게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거룩한 어머니의 모습을 두 사람은 보여주었다.

아픔을 가슴 속에 삭이며 살아간 공자의 어머니
석가모니 부처님의 출생과 생장을 비교할 때 공자의 유년기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집안은 아주 가난했고, 아버지인 숙량흘(叔梁紇)의 축복조차 받지 못하고 태어났다. 추읍대부를 지낸 숙량흘은 노나라의 시씨(施氏)를 아내로 얻었지만, 딸만 아홉을 낳았고 아들이 없었다. 첩이 아들 맹피(孟皮)를 낳았지만, 절름발이였다. 이에 안씨 집안에 혼인을 청해 결혼해 공자를 얻었다고 하는데,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공자의 어머니는 이름이 안징재(顔徵在)인데, 공자의 명성에 비하면 후세에 거의 알려진 게 없다. 유가(儒家)에서도 공자는 교조로 숭앙했지만, 그를 낳은 어머니를 위한 어떤 의식도 봉행되지 않았다. 이처럼 무시당하는 성현의 어머니가 또 있었을지 의심이 들 만큼 안징재는 생전이나 사후에 관심의 밖에 놓여 있었다.
역사에서는 숙량흘과 안씨는 정식으로 결혼하지 못했고, 공자도 야합(野合)을 통해  낳았다고 전해진다. 야합이란 혼례를 올리지 않고 남녀 관계를 맺은 사실을 듣기 좋게 표현한 말이다. 이런 부끄러움 때문인지 그렇게 바라던 아들이 태어났음에도 숙량흘은 두 모자를 돌보지 않았다. 그 때문에 공자는 어머니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비천한 신분으로 살아야 했다.

어머니 안징재는 공자의 대화록인 〈논어〉에서도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공자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 숙량흘은 회갑을 훌쩍 넘긴 나이였고, 그녀의 나이는 갓 열여덟 살이었다고 한다. 이 나이 차이가 두 사람의 결혼이 정상이 아니었음을 암시해준다. 더구나 남편에게 버림을 받아 미혼모나 다름없이 자식을 키운 안징재는 아들 공자에게 끝까지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묻다 지친 공자는 차부(車夫)에게서야 아버지의 정체를 듣게 되었고, 아버지가 귀족 출신임을 안 그는 원망보다는 자부심을 느꼈다고 한다. 공자의 성씨인 공씨조차 아버지의 성씨가 아니라 6대조인 공보가(孔父嘉)의 성씨를 이어받은 것이다. 공자가 그렇게 고위관리가 되고 싶어 했고, 유가가 일종의 권력 지향적인 정치철학이 된 데도 이런 공자의 아픈 경험이 원인(遠因)이 되었을 것이다.

공자가 위대한 성현이 된 데 가장 큰 슬픔을 안고 산 어머니 안징재의 가르침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굴욕과 고통을 감내하면서 꿋꿋하게 살아간 어머니 안징재는 어쩌면 공자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이었을 것이다.

이 봄날 따스한 햇볕이 있기에 만물이 생명의 꽃을 피우듯 어머니란 존재는 우리들에게 육신과 인격, 참다운 인간의 삶을 이끌어주는 훈훈한 불씨다. 아버지의 훈육에 대해서도 잊지 말아야겠지만, 어머니의 은혜를 되새겨보는 봄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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