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인식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림. 강병호

병원 동산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벚꽃이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다. 가까이 있는 친구들도 많이 변하고 늙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존재의 본질은 무상이고 무아이다. 무상과 무아를 모르는 상태가 무명이며 무상과 무아를 아는 상태는 명이고 명은 연기이다. 이것이 불교의 기본적인 존재에 대한 내용이다. 여기서 우리 모두는 존재인 것이다. 불교의 출발은 삼법인이다. 또한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본적인 속성도 삼법인이다. 부처님 당시에 제자들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상상해보자.

어떤 대상을 바라본다고 할 때
판단·분별하는 ‘식’은 모두 다르다
식의 속성은 다르게 인식하는 것
업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이게 된다


존재는 인식이다   
존재란 무엇인가? 한번 제대로 생각해보자. 이것이 모든 것들의 출발점이 된다.

나도 존재이고, 또 나를 둘러싼 주위의 모든 것도 다 존재이다. 이 우주에 존재 아닌 것이 없다. 먼지에서부터 우리 인간까지 모두 존재이며,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법을 물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한 말씀이 “너는 있느냐? 없느냐?”였다. “저는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그러면 네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였다.

우리들도 한 번 생각해 보자. 내가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다음은 부처님과 문답이다.

“너는 내가 보이느냐?”
“예, 눈이 있어 부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보기 때문에 인식할 수 있으며, 인식하기 때문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존재란 인식이다.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존재는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존재가 아니다.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의 첫 출발이 인식에서 시작된다. 내가 인식할 수 있으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6근과 6경 그리고 12처  
인식이란 어디서부터 오는가? 우리 몸에는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인식체로서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코가 있고, 혀가 있고, 몸이 있고, 의식이 있다. 즉 안·이·비·설·신·의를 갖고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안·이·비·설·신·의에서 ‘의’는 완전히 따로 전개되었다. 우리 몸에서 인식할 수 있는 인식체는 6근인 눈·귀·코·혀·몸뚱이·뜻이 전부이다.

먼저 눈을 생각해보자. 눈이 있기 때문에 대상을 볼 수가 있다. 예를 들어 눈을 가리면, 혹은 눈이 없다고 하면 대상을 볼 수가 없다. 눈이 있기 때문에 대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대상은 모두 형상을 가지고 있고 형상으로 보인다. 이것을 색이라 한다. 그래서 6근의 대상이 되는 것을 육경이라 하며 색(안의 대상), 성(이의 대상), 향(비의 대상), 미(설의 대상), 촉(신의 대상), 법(의의 대상)으로 불린다. 색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대상인 것이다.

안·이·비·설·신·의에 대응하는 대상이 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먼저 눈에 보이는 색이 있다. 여기서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출발인 6근과 6경이 나온다. 근은 인식할 수 있는 인식체이며, 경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대상물이다. 6근과 6경 중에서 눈이 있기 때문에 형상, 모양인 색을 볼 수 있으며, 눈이 있기 때문에 대상을 볼 수 있고 내 눈을 통해서 대상을 봄으로써 보는 작용이 일어난다.

보는 작용이 일어나는데 눈으로써 보고 판단을 하는 것일까? 아니다. 여기에는 보는 작용밖에 없다. 판단은 ‘의’가 한다. 그래서 눈과 색, 대상이 부딪치면 식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것들을 총괄하는 의가 작용하여 분별하고 판단하는 능력인 의식이 생기는 것이다.

눈이 있어서 대상을 볼 수 있는 보는 작용에 의해서 안식이 생기고 눈으로 보는 작용은 안식에서 일어난다. 안식은 ‘의’에 의해서 의식과 결부되어 판단하고 분멸하는 의식이 생긴다.

부처님의 가장 위대한 점은 ‘의’를 회복하고 ‘의’에 의해서 구체화 시키고 ‘의’로써 불교의 모든 것을 만들어 내게 된다. 불교는 바로 ‘의’의 종교인 것이다. 기독교를 하느님의 종교라 한다면 불교는 ‘의’의 종교인 것이다. ‘의’와 불교의 마음의 ‘심’, 그리고 의식인 ‘식’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다면 불교의 반은 알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마음인지 의인지 식인지, 구별하는 것이 모호하다. 혼돈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분명히 다르고 내용이 다 틀린다.

6근과 6경의 속성은  
‘안·이·비·설·신·의’의 6근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은 눈은 보려하고, 귀는 들으려고 하고, 코는 냄새를 맡으려고 하고, 혀는 맛을 보려고 하고, 몸은 감촉을 느끼려고 한다. 즉 하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의지적 작용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눈으로 대상인 색을 보면 필연적으로 보이게 된다. 눈을 통해서 보는 작용을 한다. 그러면 눈으로 대상을 보았을 때 대상은 눈에 보이는 필연적 반응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항상 눈으로 보면 그 대상은 눈에 대한 반응의 작용을 하는 것이다. 안은 보려고 하는 의지적 작용을 하고, 색은 보이려는 필연적 반응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에게 더하기 빼기를 가르칠 때 그 개념은 가르치지 않는다. 그저 ‘5+7=12’식으로 더하고 빼고 곱하기는 다 잘한다. 그것에 대한 기본개념을 안 가르치다 보니 어릴 때는 공부를 잘하는데 고등학교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미국이나 유럽의 학생들과 비교해 보면 너무 처진다. 아는 것만 알지 응용을 할줄 모르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기본개념에 대한 설명이 없다. 어떤 상황이라든지 그 문제가 어떻게 이루어졌고 왜 이렇게 밖에 답이 나오지 않는지 대한 기본원리에 부딪치면 아무것도 모른다.

지금 불교가 어렵고 잘 모르는 이유도 바로 불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을 전혀 안 배우기 때문이다. 선불교가 어려운 것은 불교에 대한 기본개념이 없는 상황에서 보면 선불교는 말 장난 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불교에 대한 기본개념을 알고 보면 그 기본개념의 흐름에 의해서 초기불교나 대승불교나 선불교나 똑같이 전개되는 것이다.

6근이 나를 이루는 주체이다. 연기의 법칙을 말할 때 6근은 인이 되는 성분이고 6경은 연이 되는 성분이다. 내가 주체가 될 때 대상은 연이 되며 또 누군가가 인이 될 때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은 연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인연과의 법칙의 출발점은 6근과 6경으로부터임을 알아야한다.

가장 기본적인 속성인 안과 색에서 볼 때 안은 의지적 작용의 속성을 가지고 있고 색은 필연적 반응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안과 색이 부딪치면 식이 일어나는데 식은 판단, 분별을 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내용은 바로 6근이나 6경이나 모두 삼법인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상이고 고이며, 무아인 것이다.

의식에 대한 이해
눈을 통해 어떤 대상을 보면 인식을 하게 된다. 인식하는 것을 식이라 한다. 이것이 합하여 불교의 가장 기본인 6근과 6경과 6식이 된다.

제자들이 부처님께 “불법(佛法)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면 부처님께서는 “6경과 6근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인 12처가 불교”라고 설했다. 또 “6경과 6경, 6식의 18계가 불교”라고 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법당에 들어갔을 때 부처님을 본다고 가정하자. 우리는 눈을 갖고 있다. 부처님을 봤을 때 식이 생긴다. 우리가 눈을 가지고 부처님을 보았을 때 부처님은 색이며, 눈이 색을 봄으로써 안식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부처님을 보고 머릿속에 생기는 식은 전부 다르다. 

우주에 있는 모든 생명이 어떤 대상을 바라본다고 할 때 그 대상을 보고 판단하고 분별하는 식은 전부 다르다. 똑같이 판단하는 식은 없다. 묘한 이야기인데 사실이 그렇다. 식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은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자신의 업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이고 분별하는 것이다. 이것은 12연기의 중요한 속성 중의 하나인 식이 된다.

제행무상·제법무아·일체개고
불교, 기독교, 천주교 등 어느 종교든지 진리를 바로 본다면 인식하는 내용은 다 같을 수밖에 없다.

연기는 우주의 본질적인 법칙이다. 깨우친 눈으로 볼 때 그 사람이 어떤 종교를 믿든지 인식하는 내용은 다르지 않고 똑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만물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속성은 종교나 철학이나 과학이나 어떤 것도 같다. 존재의 속성은 무상이고, 고이고, 무아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삼법인으로 불교의 기본적인 진리가 되면서 제행무상·일체개고·제법무아가 된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일정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무상(無常)인 것이다. 제행무상,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속성의 하나인 것이다.

부처님께서 “끊임없이 변화는 것이 ‘고’이겠느냐, ‘낙’이겠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었다. 제자들은 ‘고’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지 않고 허물어지는 것은 ‘고’라고 했다. 변화의 시작은 생이고 변화의 끝은 멸이다. 무상한 모든 것은 생멸하는 것이다. 생멸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고라고 하셨다. 그래서 불교의 기본적인 속성이 제행무상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모든 것은 바로 ‘고’인 일체개고(一切皆苦)이다.

제법무아(諸法無我)는 나라고 내세울 독립적인 어떤 실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바른 눈으로 존재의 본질을 보니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독립적인 실체를 가지지 않으며, 나라고 주장할만한 것이 없는 것이다. 제법무아이다. 무아이기 때문에 대승불교에서는 무자성이며, 공이라 했다. 연기가 곧 공이며 무자성인 것이다. 그래서 초기불교의 교리나 대승불교의 교리는 다르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불교의 진리를 말씀하실 때 삼법인을 말씀하셨고, 불교가 삼법인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이 존재의 내용은 무상이며, 고이며, 무아이다. 그리고 존재의 관계 법칙은 연기인 것이다. 연기, 무상, 무아는 초기불교부터 대승불교, 밀교, 선불교의 불교를 관통하는 진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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