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로 세상을 변화시키다

마하시 선원 초대 선원장인 마하시 사야도 스님의 진영.

마하시 선원은 마하시 사야도(Mahs Saydaw, 1904~1982) 스님과 관련한다. 선원의 역사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스님의 일대기를 대략 알아 볼 필요가 있다. 마하시 사야도 스님은 1904년 북부 미얀마의 세잇쿤(Seikkhun) 마을에서 농부의 자녀으로 태어났다. 같은 마을의 사찰에 12살의 나이로 출가해 신 소바나(Shin Sobhana, 상서로운 자)라는 법명을 받았다.

다시 20세에 구족계를 받은 후 4년 동안 정부의 공인 시험의 과정을 모두 통과하였다. 다시 유명한 만달레이를 거쳐 남부 미얀마 몰메인(Moulmein)에서 <대념처경>을 중심으로 하는 위빠사나를 공부하였다. 이후 위빠사나 수행 지도로 널리 알려진 타톤의 밍군 제타완 사야도(Mingun Jetawun Saydaw)로부터 지도를 받는다.

마하시 스님 1947년 창건해
‘대념처경’ 새 번역하고 포교
세계 각국에 ‘위빠사나’ 전파
우 빤디따 등 뒤이어 전법행

지도법사들 영문으로 수행지도
양곤 韓고려사도 마하시 계통

마하시선원, 전세계 500개 분원
출가자와 재가자 함께 수행 특징
빤디따·자띠랄 스님 초청 내한
영문으로된 수행 법문집 출간도

수많은 연구논문과 책자 편찬
한국서 한글번역서 펴내기도

1938년 그는 고향인 세잇쿤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위빠사나 지도를 하게 된다. 여기서 그가 머문 절의 이름이 ‘큰 북’이라는 의미의 마하시(Mahs)이다. 이로부터 소나바 스님은 그의 명성과 함께 마하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1941년에는 정부 주최의 승과 고시에 합격하여 법사(Dhammcariya) 칭호가 부여된다.

이후 중요한 계기는 1947년이다. 당시 우 누(U Nu) 수상으로부터 양곤에 설립된 수행처에 그가 초대된다. 이 수행처가 바로 현재의 마하시 선원이 된 것이다. 정식 이름은 마하시 사사나 예익타(Mahsi Ssana Yeiktha)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8년에 미얀마 독립에 이어 1949년에, 그는 <대념처경>의 새로운 번역을 완성한다. 현재까지 널리 읽히는 위빠사나 수행의 교과서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는 1949년부터 본격적으로 위빠사나를 지도하게 되었고, 수행자들의 수가 갈수록 늘어나게 되었다.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지도받았던 스님들에 의해 전국 각지에서 분원들이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다시 미얀마만이 아닌 태국·스리랑카·캄보디아 그리고 인도 등지까지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1972년의 통계에 따르면 이미 70만 명 이상의 수행자가 마하시 선원을 거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영향력은 1952년에 악가 마하 판디따(Agga Maha Pandita)라는 법계가 수여된다. 아라한으로 간주되는 40년 이상의 법랍의 수행자에게 전국 대덕승가 위원회(State Sanghamahanayaka Committee)의 엄격한 심사 후 주어지는 칭호이다.

더 나아가 그는 1954년 5월에 개최된 역사적인 제6차 불교 경전 결집 계획을 수립하고 주도하였다. 이때 결집된 삼장은 현재까지 전 세계에 다방면에 걸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후 마하시의 위빠사나 포교단은 인도와 상좌부 불교권을 넘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수행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대중을 위해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것이 그가 제시한 위빠사나 방법이 유명해진 열쇠라 생각된다. 예를 들면, 경론과는 달리 출입식염 수행에 있어 복부의 들고 남을 관찰하게 하거나 경행 시 발동작의 단계를 구분하여 지도하였던 것 등이 그것이다. 한 때 이러한 방법이 경론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스리랑카와 논란이 된 적이 있지만 실제 수행에 있어 누구나 쉽고 또한 효과를 바로 느낄 수 있어 현재까지도 널리 수용된다.

현재 마하시 위빠사나는 서구와 미국을 거쳐 여러 가지로 분야에 응용되어 다시 우리에게 소개되고 있다. 특히 심리 상담과 심리 치료 분야에서도 널리 응용되고 있다. 그는 위빠사나를 국내는 물론 미국과 서구 등지에 두루 활동을 하다가 1982년 심장 마비로 78세의 일기로 입적하였다. 입적하기 전날까지도 새로 들어온 수행자들을 지도하였다.

이후 마하시 스님의 제자인 우 빤디따(U Pandita, 1921~2016) 스님이 약 8년 동안 마하시 절의 선원장으로 지도하였다. 하지만 그는 1990년에 빤디따라마 선원으로 독립하였다. 마찬가지로 미얀마는 물론 우리나라 등 여러 나라에 분원 수행처를 두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2006년 4월 우 빤디따 스님이 내왕하여 법문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1947년에 마하시 스님이 양곤의 선원에 초대되어 마하시 선원이 시작하여 우 빤디따 스님, 그리고 필자가 머물 때 우 자띨라 스님에 이르고 있다. 마하시 선원의 계보인 것이다. 필자가 마하시 선원에 머물 때 국내외 수행자들은 거의 이러한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수행자들의 빤디따라마 선원과 서로 내왕하며 공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마하시 선원의 선원장은 우 자띨라 스님이다. 자띨라 선원장 스님은 지난 2016년 12월 28일에 82세로 입적하였다. 필자가 스님을 뵌 지 약 5년 후에 입적하신 것이다. 그때 생각으로는 연세에 비해 체력도 좋으시고 활동적이라 생각했는데 이미 지병이 있었다고 한다. 마하시 선원 입방 후 2012년 1월22일 떠나기까지 약 49일 동안 거의 매일 원장스님을 뵈었다.

출재가를 막론하고 많은 한국의 수행자들이 자띨라 스님의 지도를 받았다. 이러한 점에서 스님은 한국불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스님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스님의 법문집에 설명된 간단한 생애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사야도 우 자띨라 스님은 1935년 11월 26일 북부 미얀마, 밍쟌(Myingyan), 까도(Kadaw)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우 먀지(U Mya Gyi)와 도파틸(Daw Phwa Thit)이었다. 그는 7살이 되었을 때, 웃따라(U Uttara)스님의 지도아래 현지의 사찰로 출가하여 그곳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다. 10살이 되어서는 ‘아신 자띨라(Ashin Jatila)’란 법명으로 사미계를 받았다. 1956년에 그는 불교교육의 중심지로서 알려진 사가잉 산(Sagaing Hills)으로 진학해서 우 위짜린다(U. Vicrinda) 대덕 스님과 다른 뛰어난 스승의 지도아래 경전을 연구했다.

그 해에 그는 정부가 시행하는 아비달마 시험(초급)을 통과하고 다음해에 중급, 상급 과정은 물론 마찬가지로 정부에서 주관하는 계율 시험에도 모두 통과했다. 아신 자틸라는 1955년 7월 24일에 비구 구족계를 받고 정식으로 비구 승가에 일원이 되었다.

구족계를 받은 후, 계속 공부하여 1959년에서 1961년 기간에는 정부 기관인 종교성(宗敎省,  Ministry of Religious Affairs)에서 시행한 경전과 관련된 3개의 최고과정 시험을 모두 통과하여 사사나다자 시리빠와라 법사(Ssanadhaja Siripavara Dhammcariya(Vinaya Pliprag)라는 칭호의 법계(法階)를 받았다.

1966년 그는 양곤의 마하시 선원에 와서 마하시 스님을 보좌하는 우 빤디따위맘사(U Paitbhivasa, 1921~2016.3.16) 법사 스님의 지도 아래 집중적으로 위빠사나 수행을 했다. 위빠사나 수행을 마치고, 그는 사가잉 산의 빠알리 불교대학에 돌아가 빠알리 초기경전 강사로서 3년 동안 재직하였다.

1969년 양곤에서 북쪽으로 320km 떨어진 삔마나(Pyinmana) 시로 가서 마하시 선원 분원을 창건하고 20년 동안 위빠사나 수행의 지도 법사로서 대중을 이끌었다. 또한 지난 15년 동안 그는 미얀마 전국 마하시 법사 협회(All-Burma Mahs Dhammakathik)의 회장도 역임했다. 1988년에 그는 미얀마 전국 마하시 승가 협의회(All-Burma Mahs Sagha Council)의 (연합)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자틸라 스님은 수행 지도법사 정부기구(Governing Council of Kammahncariya)의 일원으로 양곤 마하시 선원에서 외국인 수행자를 위한 위빠사나 지도에 역점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스님의 일대기는 미얀마 불교에서 스님을 관행적으로 소개하는 형식과 내용을 알 수 있다. 미얀마 스님의 약력은 출생지와 함께 양친의 이름을 거론하며 사미계와 비구계 수여의 년도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사찰 교육기관의 과정과 국가에서 시행하는 승가 고시를 거쳐 공식 칭호와 공식 법계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공식적인 자격을 취득하였을 때 스님들은 자격에 부합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미얀마 헌법에 불교를 국교로 한다는 명시가 없더라도 실제로는 정부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불교가 행해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마하시 선원은 미얀마 국내는 물론 스리랑카나 동남아, 그리고 아시아 전역과 유럽과 미주에도 수많은 분원이 설치될 정도로 전 세계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에 500개 분원을 두고 있으며, 출가자와 재가자가 위빠사나를 함께 수행한다. 빤디따 스님과 자띨라 스님은 한국에도 여러 번 초대되어 법을 설한 적이 있다. 이렇게 마하시 선원의 지도 법사스님들은 일찍부터 세계인을 상대로 불교수행을 지도하기 위하여 모두 영문 수행 법문집의 출간과 수행지도를 해 왔다.

이러한 각고의 불교포교 노력에 의해 세계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불교를 알고 위빠사나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들의 지도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우리나라는 물론 유럽과 미주 사람들에 의해 이러한 선사들의 수행사상과 행법에 관한 수많은 연구논문과 책자들이 출간되어 읽힌다. 물론 한국에도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도 마하시 선원에서 공부를 하였고 지금도 하고 있다. 미얀마 양곤의 큰 규모로 건립된 한국 사찰 고려사도 마하시 선원 계통이다. 고려사에 가면 마하시 스님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한국불교는 지금 세계화 시대에 한국불교 전통과 함께 더욱 다양한 불교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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