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 원찰 흥천사(興天寺)

정릉 원찰인 흥천사는 정릉의 이전에 따라 정조18년 현재 위치로 옮겨 중창됐다. 정릉의 부침에 따라 흥천사도 쇠락과 중흥의 시기를 겪었다.

신덕왕후 원찰로 건립된 흥천사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게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姜氏)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 부인은 즉위 한 해 전 죽었고, 둘째 부인만이 조선왕조 최초의 왕비가 되었다. 강씨는 건국이란 힘든 시기를 함께 한 까닭에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왕비가 된지 4년 만인 태조 5년(1396) 8월에 죽었다. 조강지처를 잃은 태조는 안타까운 마음에 능을 경복궁 서남쪽 가까이 조성하고 묘호를 정릉(貞陵)이라 하였다.

태조는 왕비의 극락왕생을 위한 원찰을 창건하였다. 그것이 흥천사이다. 태조의 원찰 창건은 정치적 모험이었다. 왕조의 이념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조선은 유교가 국시(國是)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도성 안에 사찰을 세웠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새로운 왕조 첫 번째 왕비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건국 이념 조차 막지 못한
정릉 일대 원찰 불사
억불숭유의 아픔 간직한 곳

조는 흥천사 창건에 관심이 많았다. 태조는 5년(1396) 12월 흥천사 공사 현장을 찾아가 인부들을 격려하고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6년(1397) 2월에도 흥천사 역사를 찾았다. 그런데 본인의 뜻과 어긋나게 사찰의 공사는 점점 커져갔다. 태조는 정릉에 조석 향화(香火)을 받들기 위해 절을 세운 것이었다. 그런데, 환관(宦官) 김사행(金師幸)이 잔재주를 보였다. 태조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흥천사를 사치스럽게 하였다.

흥천사는 태조 6년(1397) 10월 상의중추원사 최용소를 흥천사에 보내어 소재 법석을 베푼 것으로 볼 때 이 무렵 낙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흥천사가 세워진 곳은 서부 황화방(皇華坊)이다. 황화방이 어딘가. 그곳을 알려면 영조 때 기록을 참고해야 한다. 영조 45년(1769) 11월 임금이 황화방 명례궁(明禮宮)에 거동하였다고 전해진다. 명례궁은 인조가 즉위한 곳으로 본래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었다. 이곳이 고종이 순종에게 선위하고 머물면서 덕수궁이라 하였다. 정릉과 흥천사 모두 이 부근에 있었던 것이다. 현재 그곳이 정동(貞洞)인 것도 능 이름에서 연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흥천사는 처음부터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조선 최초의 원찰이며 170여 간이나 되는 대가람이었다. 능조차 도성 안에 두려했던 태조의 지극한 사랑이 담겼으니 당대의 최고였을 것은 당연하다. 그 가운데 압권은 정종1년(1399) 10월에 조성된 사리전(舍利殿)이었다. 5층으로 지어진 사리전은 크기도 웅대하고, 그곳에 올라가면 경복궁이 잘 보였다. 세종 5년(1423) 사신이 흥천사를 구경하고 사리전 높은 곳에 올라 경복궁을 바라보고 말하기를, “산세나 물 흐름이 모두 음양의 이치에 맞으니 참으로 하늘을 만든 도읍이다”고 하였다.

조선 초 흥천사에서 행해진 불사

배불의 조선이었지만 흥천사에서는 많은 불사가 행해졌다. 태조 7년 7월 우란분재를 베풀었다. 이후에는 왕자의 난으로 왕위를 던져버리고 함흥으로 가는 바람에 더 이상 자신이 불사를 지속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이 상왕과 태상왕으로 있었던 정종, 태종 때에 이곳에서 불사를 지속적으로 행하였다.

정종 1년 10월에 흥천사의 사리전이 낙성되자 태조는 이곳에 와 수륙재를 베풀었다. 선왕(先王), 선비(先廬), 현비(顯廬), 죽은 아들들과 사위, 그리고 고려의 왕씨(王氏)를 제사하기 위함이었다.

정종이 왕위를 선위하고 태종이 즉위하며 경복궁으로 돌아간 뒤에도 개성에 머물렀던 태조는 태종 1년 대장불사(大藏佛事)를 베풀기 위해 흥천사에 행차하였다.

이성계 사후에도 흥천사 불사는 행해졌다. 태종 8년 5월 이성계가 죽었다. 태종은 7월 흥천사에서 〈원각경〉 법석을 베풀었다. 이성계는 죽을 무렵 유언으로 흥천사에서 〈법화경〉을 독송해 달라고 하였다. 그 뜻을 잊지 않은 태종은 11년 5월 흥천사에서 승려 50인을 불러 3일 동안 〈금자법화경〉을 독송하였다.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을 불러 향을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은 오늘 법석을 베푼 뜻을 아는가? 우리 황고(皇考) 태조께서 도읍을 여기에 세우시고 사리전을 설치하시므로, 나와 이인수가 그것을 준공하였다. 근자에 들으니 탑이 기울어져서 위태롭다 하기에, 그것을 수리하게 하였는데, 마침 기신(忌晨)을 만났으니, 태조와 신의왕후(神懿王后)를 위하여 법석을 베푸는 것이다.”

흥천사는 신덕왕후 강씨의 원찰이었다. 그렇지만 태종에게 강씨는 계모였고 정적이었다. 힘들여 건국한 조선의 왕위가 강씨의 소생 방석에게 넘어갈 뻔하였다. 아버지 태조의 유언을 따라 법화경을 독송하였지만 강씨는 빠지고 친모인 신의왕후 한씨를 위한 법석으로 바꾼 것이다.

흥천사의 시련

임금의 사랑으로 크고 화려하게 시작한 흥천사이지만 조선조의 배불의 세파만은 피해갈 수 없었다. 정종과 태종은 부왕이 살아있는 관계로 흥천사를 홀대할 수 없었다. 태조 사후에도 흥천사를 수리하는 등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세종 때 이르러 상황은 달라졌다. 태조의 유훈도 알지 못하고, 관리들의 요청과 자신의 뜻에 따라 배불정책을 추진하였다. 세종은 7년(1425) 흥천사의 종을 남대문에 옮겨 달게 하였다. 종을 문루에 다는 것은 시간을 알리기 위함이다. 관리들의 출근이 늦어지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흥천사 종을 떼다가 문루에 달고 활용한 것이다.

세종은 아쉬울 땐 흥천사를 이용하였다.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낼 때는 이곳에서 하였다. 세종 15년(1433) 창덕궁 문소전에 있던 내불당을 정리할 때 불상과 불구를 보관하는 장소로 활용하였다.

물론 흥천사를 수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선왕들이 아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종 17년(1435) 가뭄이 들자 비용 문제로 흥천사의 역사를 정지하게 하는 등 관심 밖에 두었다.

그밖에도 종파 축소, 참배 금지 등이 계속되었다. 그런 조치로 폐사에 이르지 않았지만 화마에는 어쩔 수 없었다.

연산 10년(1504) 법당이 화재로 전소되면서 급격하게 쇠락해졌다. 그나마 화마를 모면했던 사리전은 중종 5년(1510) 3월 28일 흥천사의 보물과 경문을 훔치던 유생들의 방화로 전소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중종은 가슴 아파하면서도 7년(1512) 성 안의 흥덕, 흥천, 원각 등 세 폐사의 땅을 사대부들에게 갈라주자는 대간의 건의에 따라 흥천사 땅을 나누어 주었다.

정릉과 흥천사의 복원

흥천사는 정릉의 원찰로 지어져 화재로 사라졌지만 정릉 때문에 다시 생겨날 수 있었다. 왕후는 자신의 막내를 세자로 책봉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그렇지만 그 아들이 왕이 되지 못하고 왕자의 난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을 지하에서 지켜보아야 했다. 자신도 파헤쳐 도성 밖으로 옮겨지는 수모를 당했다.

태종 8년 5월 아버지 태조가 죽자 태종은 자신과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왕후를 9년(1409) 삼각산으로 옮겼다. 처음에는 의정부에 명하여 정릉을 도성 밖으로 옮기는 것을 의논하게 하였다. 의정부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었다.

“옛 제왕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지금 정릉이 성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고, 또 사신이 묵는 관사에 가까우니, 밖으로 옮기도록 하소서.”

태종은 그대로 따랐다. 뿐만 아니라 조석전(朝夕奠)과 삭망제(朔望祭)를 없애고, 춘추의 두 중월(仲月)과 이름이 있는 날에 2품의 관리를 보내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왕릉의 석물은 광통교가 무너지자 수리에 사용되었다.

왕실의 관심이 사라지면서 정릉은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선조 14년(1581) 양사가 정릉에 전례에 따라 제사하는 일을 청하면서 다시 부각되었다.

“정릉을 한번 옮긴 후에는 전례(典禮)도 미처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본시 그 당시 일을 맡은 자의 잘못이었습니다. 어찌 선왕의 본의이겠습니까. 후손의 처지에 있어서는 마땅히 서둘러 폐지 추락된 예를 분명히 닦아 우리 선후(先后)를 받들어 모심으로써 깊이 백년의 원한을 씻고 크게 신인(神人)의 원통한 마음을 풀어줘야 할 것입니다. 이는 옛날 역사를 증빙해 보더라도 어긋나지 않으며 장래의 성인을 기다린다 해도 의혹하지 않을 것인데 전하의 선조를 추모하시는 마음에만 유독 시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선조는 윤허하지 않았다. 이후 정릉은 현종 10년(1669) 송시열 등의 청원으로 왕후의 제삿날을 새삼 기리면서 자연히 원찰도 논의되었다. 정릉 앞에 있는 신흥암이 능과 너무 가깝고 작아 조금 떨어진 함취정(含翠停) 터로 옮기고 신흥사(新興寺)라 하였다. 이름은 달랐지만 원찰은 복원된 것이다.

정조 18년(1794)에 성민(聖敏)과 경신(敬信) 두 스님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창하였다. 이후 신흥사로 불리다가 고종 2년(1865) 흥선대원군이 중창불사를 지원하면서 원래 이름인 ‘흥천사’ 편액을 내렸다. 지금 만세루에 걸려있는 편액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해서 신흥사로 불렀다. 60년대 말 70년대 초 이 주변 식당은 회갑잔치가 빈번하게 열려 강북지역의 대표적인 요릿집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요즘 지역안내서와 인터넷에 흥천사로 소개되고 부르고 있어 본래의 이름을 찾은 듯하다. 사격 역시 점점 정비되면서 강북의 포교도량으로 거듭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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