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에 같이 한자리를 하게 돼서 참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마음의 봄날이 온다면, 각계각층 무엇을 막론해 놓고 다 녹일 수가 있고 얼릴 수도 있어서 자유스러울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럴 수 있도록 서로 도반으로서 잘해 나가 봅시다. 오늘은 더군다나 또 서로 토론하고 서로서로의 모자라는 거를 메꾸면서 해 나가는 자리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질문과 답으로써 서로 나누겠습니다.

구정물을 맑은 물로 그냥 대치해서 쓰라
무조건 자기 뿌리는 자기 싹을 지니고 있으니
누가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절대로 흔들리지 마세요.

질문자1(남) 항상 스님께서 저희들과 함께 계셔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님께 두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주인공!” 하면서 정진을 할 때 입으로는 “주인공!” 하면서 소리를 내는데 생각은 어디에 두어야 되는지요? 예를 들면 아무것도 생각지 말아야 하는지, 아니면 부처님을 생각해야 하는지, 아니면 내 마음속에 있다 하여 내 가슴속을 생각해야 하는지, 과연 어디를 생각하면서 주인공을 찾아야 할지 궁금합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큰스님 인간이 태어났으면 본래 자기 뿌리와 싹이 동시에 같이 태어났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질문할 줄 알고 이 염주를 들고 나왔습니다. 하하하…. 어떻습니까? 염주가 되려면 줄에다 알을 꿰어야 염주가 되죠? 그렇다면 사람도 염주와 같이 그렇게 겸해서 가지고 나왔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어디를 찾아야 하고 어디를 믿어야 하고 이런 게 없이, 육신과 정신계가 본래 이렇게 꿰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염주알은 어디를 믿어야 되겠습니까? 염주를 꿴 줄이죠? 이 줄은 정신계라고 비유할 수 있고, 이 알은 물질계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염주는 불가부득 누가 믿어라, 안 믿어라 할 게 없이 이 줄을 믿어야 하겠죠. 그런데 믿는다는 언어도 붙지 않는 겁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그대로니까, 그대로 꿰어져 있으니까 그대로 염주가 되듯이 인간이 된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라는 위치에 놓여 있으면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해야죠? 그리고 인간으로서 해 나갈 수 있는 그런 기반이 필요하죠. 그럼으로써 “그대로 믿어라. 그대로 믿어라. 그대로 같이 겸해서 있으니 그대로 믿어라.” 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거를 안다면 줄이다, 알이다 이런 이름을 찾을 필요도 없죠. 안 그렇습니까? 내가 비유를 할 때에 싹은 뿌리에 붙어 있고 뿌리는 바로 싹을 살리기 위해서 생긴 거니까, 그렇게 아주 밀접하게 붙어 있으니까 무조건 믿어야지요. 아, 그 뿌리로 인해서 사는데, 다른 데 어디를 믿는다는 겁니까? 그대로 믿어야죠. 종교를 믿는다 안 믿는다도 떠나서, 부처님을 숭상한다 안 한다 이걸 떠나서, 그대로 자기를 믿어야죠. 바로 싹을 내게 한 장본인이기도 해요, 뿌리가. 그리고 모든 것은 그 뿌리가 흡수해서 올려보내니까요. 싹은 또 모든 걸 흡수해서 아래로 내려보내고요. 이런 거니까 내가 “이걸 믿으시오!” 이러지 않아도 그대로 결집이 돼 있다니까요. 그대로 이렇게, 이 염주와 같이. 그러니 이 염주는 이 줄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소립니다.

내가 항상 말씀드리듯이, 저 은하계나 태양계도 그렇지만 지구도 그렇게 이 염주알처럼 줄에 매달려서 돌아갑니다. 이 마음의 줄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고 돌아간다 이겁니다. 인간도 이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이 안에서. 이 줄은 매듭도 없고 시발점 종점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알은 시발점이 있고 종점이 있다 이런 겁니다. 그러니 모든 것은 이 안에서 훌떡 벗어나야, 정신계 물질계를 벗어나야 자유권을 가질 수 있다 이런 겁니다. 이 물질계 테두리 안에서는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이 법이 정신계로 무(無)의 세계를 맛볼 수 있는 그런 광대무변한 묘법입니다.

그러니 이걸 내가 믿으란다고 믿지도 말고, 믿지 말란다고 안 믿지도 말고, 또 누가 이러고저러고 한다고 해도 흔들리지 마세요. 무조건 자기 뿌리는 자기 싹을 지니고 있으니까 누가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절대로 흔들리지 마세요. 부처님의 뜻과 돌아가는 인간 생활 자체와 진리가 바로 합류화되어야 진리지, 만약에 거기에서 벗어난다면 이거는 부처님 법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꼭 누가 믿어야 한다고 해서가 아니라 자기 뿌리를 자기가 믿듯이, 염주알이 자기 줄을 믿듯이 그렇게 믿는 겁니다. 이 염주알이 저절로 이 줄에다 꿰어져 있기 때문에, 튼튼하게 꿰어졌기 때문에 염주알은 걱정도 안 해요. 줄 끊어질까 봐 걱정도 안 하고, 줄에 매달려 있으니까 그대로 줄을 믿고 그냥, 믿는다 안 믿는다도 없이 그냥 하면 그대로 움죽거려져요. 그러니까 그대로입니다, 그대로!

지금 여러분의 뿌리와 싹이 그대로 한 몸입니다. 그러니 못 믿고 믿고 이런 것도 없습니다. 그대로 믿으시고 거기에 맡겨 놓으십시오. 그런데 여러분은 자기 뿌리를 믿지 못해서, 맡겨 놨다가도 못 믿어서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그러는데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로 믿는 사람은 한 번 맡겼으면 맡긴 그 자체가 아주 뚜렷하게 정립이 됩니다. 그러니까 의심도 없고 근심도 없습니다. 그런 마당에서 좀 시일이 가서 풀릴 수도 있고, 시일이 안 가고 단박 풀릴 수도 있는 것이니까 바로 천차만별의 생활인 것입니다. 그것을 믿지 못하니까, 조급해서 “아이구! 요렇게 맡겨도 안 돼! 안 돼!” 하는데 그렇게 못 믿을 것이면 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태어난 게 불찰이 아닙니까? 네? 뿌리로 인해서 싹이 났는데, 자기 영혼의 뿌리가 자기를 형성시켰는데 그렇게 못 믿어서야 어찌 삶을 보람 있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배워 가지고 믿어야 되겠다.” 이러는 게 아니고 “본래 꿰어져 있으니까 믿어라.” 이겁니다. 이제 꼭 믿고 맡겨 놔야 할 데가 아주 가까운, 바로 내 윗눈썹과 아랫눈썹이 마주치는 것과 같은 거라고 생각이 되시겠죠? 하여튼 아주 타당합니다. 이름을 믿을 겁니까, 형상을 믿을 겁니까? 이 세상에 누굴 믿겠습니까? 아, 이 세상에 누굴 믿어요, 네? 부부한테도 할 말, 못 할 말 가려서 해야 되고 자식한테도 가려서 해야 합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알고, 슬프고 즐겁고 한 거는 자기 뿌리만이 알고 있는 겁니다.

즉 마음 내기 이전의 마음은 죄 알고 있는 겁니다. 마음 내는 건 아무렇게나 막 그냥 나오는 대로 마음을 내겠지만, 마음 내기 이전의 마음은 아주 정확합니다. 더하고 덜함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 낼 때 마음의 선장은 잘못 내걸랑은 다스려서 거기 놓고, 잘 내걸랑은 ‘잘 내게 해서 감사하구나. 나를 가르치고 이끌어 가기 위해서 이렇게 마음을 즐겁게 내 주니 감사하구나.’ 그러고 거기다 되돌려 놓아야 합니다. 인간은 자동적으로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죄를 주고 안 주고가 없습니다.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이지, 누가 ‘해라, 하지 말아라’, ‘지어라, 짓지 말아라’ 이런 게 없습니다.

더군다나 사람이라면 부처님 될 수 있는 능력이 99%가 됩니다. 이건 한 찰나 생각만 잘한다면…, 아까 얘기대로 무식하고 무식 안 하고, 어렵고 가난하고, 못나고 잘나고 간에 반드시 줄에 꿰어져 있는 염주알과 같은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염주알을 꿴 그 줄을 믿어야 하는 거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믿고 다스리고 행하고 거기 놓고, 잘못된 것도 거기서 나오는 줄 아시고, 바로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입력이 돼서 현실에 나오는 줄 아시고 그 자리에다 되놓으신다면, 앞서의 게 없어지고 새 입력이 들어가면서 보람 있는 새 삶이 나온다 이 소립니다.

그런데 왜 못 믿습니까?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죽으나 사나, 죽을병이 들었거나 죽을병이 안 들었거나, 진짜로 믿는다면 정말 죽는다 하더라도 옷을 벗고 바로 승천이 될 거고, 얼른 쉽게 말해서 이 어항 속에서 벗어날 거고, 또 산다 하더라도 그냥 살리는 거고요. 그러니까 이래도 건지는 거, 저래도 건지는 건데 왜 겁을 내느냐 이겁니다. 뭐가 겁이 납니까? 누구나가 한 번 옷 벗기는 마찬가지인데.

부처님께서도 깨달으신 과정과 열반하신 과정이 어땠습니까? 염주알을 시발점에서 돌려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종점까지. 종점까지 오니까 다시 시발점이 되더라. 그렇죠? 다시 시발점이 되죠? 그러니까 종점이 됐다고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종점이 됐다 하면 시발점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그냥 죽는 게 아니라, 죽었다 하면 그냥 한 찰나에 그대로, 마음공부 한 사람들은 그냥 벗어나는 겁니다. 그리고 마음공부를 못 하고 바깥으로만 끄달린 사람은 그 안에서, 그 차안(此岸)에서, 즉 차단된 속에서, 감옥 아닌 감옥 속에 갇혀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세세생생에. 그 의식, 관습, 인과에 그냥 매달려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죠.

예를 들어서 말을 하면, 우리가 개구리가 된다면 개구리로 살던 습이 그냥 누적이 돼 가지고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개구리 세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죠. 그와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되 모든 것은 내 마음의 용광로에 다 놓으십시오. 이 줄은 용광로와 같고 바로 자가발전소와 같고 불바퀴와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그저 모든 것을 거기다가 맡겨 놓기만 하면 모든 거는 제거가 됩니다. 그러니 놓고 맡길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그것이 자기 싹의 자기 뿌리라는 것을 아셨으면 무조건 믿어야죠. 뭘 누가 믿어라, 말아라 할 때까지 있어요?

질문자1(남) 감사합니다. 두 번째 질문 올리겠습니다. 금강경에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란 사구게가 있는데, 머무르는 바 없이 생각하기 이전의 마음이 소소영영한 마음자리인가 합니다. 한생각 하기 이전의 마음이 한마음 주인공이 나투는 자리가 아닌지 궁금합니다. 그 자리에 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큰스님 지금까지 한 말이나 똑같습니다. 마음 내기 이전은 마음의 내 선장으로 섬기고, 마음 내는 것은 바로 중생의 마음이죠. 그러니까 그 마음으로 다스려서 몰락 놓을 수만 있다면, 몰락 놓되 그냥 놓는 게 아니라 감사하게 놓고, 돌려서 놓고, 구정물을 새 물로 만들어서 놓고, 그러니까 “그 구정물을 깨끗하게 만드는 과정이 있다.” 이런 말도 경에 많이 있죠. 그러나 나는 그렇게 가르치면 더디니까 아예, “그 구정물을 맑은 물로 그냥 대치해서 써라!” 이겁니다. 그 과정을 다 새삼스럽게 거치고 거쳐서 이렇게 한다면 언제 우리가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대로 집어먹고, 그대로 맛을 알고, 그대로 행하라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아주 간단한 겁니다. 생각 내기 이전이 자기 뿌리니까요. 그대로 믿고, 양면을 다 거기다 믿고 놓으면 그 가운데서 아주 샘물이 나올 것입니다. 그 샘물이라는 것은 만법의 근본을 다 행할 수 있는 그런 법이며 또 생활인 것입니다.

질문자1(남) 스님, 감사합니다.

질문자2(남) 저는 마음공부 하는 방법에 대해서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큰스님 한 가지씩만 하세요.

질문자2(남) 불법의 유식론(唯識論)에 보면 인간의 인식은 대개 열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다섯 가지는 육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고, 나머지 다섯 가지는 정신적으로 인식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대개 우리 범인들이 느끼고 있는 것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또 우리가 교육을 통해서 아는 의식(意識)입니다. 그러나 여섯 가지는 보통 범인들이 느끼는데 일곱 번째에서 열 번째 되는 거는 우리 범인들이 일반적인 공부를 해서는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나 보면 이러한 칠식(七識), 팔식(八識), 구식(九識), 십식(十識)에 도전하는 많은 불자들이 있어 왔고, 또 일생을 바치는 고승 대덕들도 많은 걸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역사적인 인물 두어 사람에 대해서 조사어록(祖師語錄)에 나오는 것 한 가지를 질문드리겠습니다. 달마어록(達摩語錄)에 보면 달마 조사와 무제의 대화에서 “심심상련(心心相連), 교외별전(敎外別傳), 이심전심(以心傳心)”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대개 제 몇 식(識)에 해당되는 것인지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큰스님 허허허…. 항상 여러분한테 이심전심이라는 것을 얘기해 드리죠. 그건 열 가지든 백 가지든, 만 가지든 천 가지든 그건 하나로만 돌아갈 수 있는 겁니다. 하나로만! 내 진실한 근본에서만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일체 만물이, 새는 새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말과 행이 그대로 이렇게, 뜻과 통해서 돌아갑니다. 그래서 전체가 통하죠. 전체가 통하고 사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이심전심으로 사는 거죠, 그대로. 우리가 사는 생활 속에 부처님이 하신 말씀들이 그대로 다 실현돼 있어요, 아주.

그런데 정신세계에서 이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대로 육감으로도 이렇게 통신이 오죠. 사람을 벌써 보기만 해도 ‘아,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겠구나! 아, 저 사람은 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뭐가 좀 어떻구나, 어떻구나.’ 하는 거를 대략 짐작하죠. 생활 속에서 그렇게 하고 가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이 마음공부 한 사람들에 한해서는 그대로 마음과 마음이 둘이 아닌 까닭에 알고 있는 겁니다. 그게 이심전심이죠. 이 마음과, 즉 말하자면 영과 영이 한데 합쳐지면 그대로 없으면서, 맑은 물이면서도 그것은 둘이 아니게 알고 있다는 겁니다. 전체를 알고 있다. 꽃을 볼 때에도 이심전심이 되죠. “야, 너는 왜 낮이면 피고 밤이면 오그라드느냐?” 하고 물어보세요. 반드시 대답이 있을 겁니다. 또 “왜 밤에는 피고 낮에는 오그라드느냐?” 하고 물어보세요. 반드시 회답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심전심이라는 것은 비밀의 행이면서도 아주 묘하고 광대무변한 법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자기가 깨달아야만이 알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버선목이라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 예를 들어서 내가 만약에 부처님처럼 금방 이 자리에서 요 문 바깥을 나갔다 들어왔다, 또 지구를 한 바퀴 돌아왔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아시겠습니까? 모르시죠? 또 물속의 생물들을 다 만나고 왔다, 한 찰나에 만나고 왔다 하더라도 모르실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게 이심전심입니다. 그러니까 어서 부지런히 공부하셔야 이심전심의 그 묘한 도리를 체득하실 수 있죠. 그러니까 이심전심이라는 도리는 자기가 스스로 체험해서 알지 않으면 모를 겁니다, 아마. 그게 얼른 쉽게 말해서 “이심전심으로 통해서 천백억화신이 나투면서 각계각층의 중생들에게 다 응(應)하시느니라!” 이렇게 했을 때, 이심전심이 거기에 포함되는 것이죠.

질문자2(남) 사례를 하나 들어서 말씀드리면, 칠식은 말나식(末那識), 팔식은 아뢰야식(阿賴耶識), 구식은 아마라식(阿摩羅識), 십식은 백정식(白淨識)인데, 어느 책에서 보니까 “백정식 정도 되면 생사 거래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 이런 구절이….

큰스님 백정식은요, 그 의식까지도 없어야 백정식이 되는 겁니다, 그것도 이름해서. 아뢰야식이니 뭐, 이것이 아주 몰락 다 없어야 백정식이죠. 그래서 백정식이라는 건 “아주 없다”는 뜻입니다. 아주 깨끗한 무(無)가 돼야, 이것이 무 속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름을 불러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말고 그대로, 모르는 대로 그대로, (염주를 들어 보이시며) 이 알은 반드시 줄에다가 다 놔라 이겁니다, 의식까지도. 지금 직행으로 들어가는 코스지, 거쳐서 계단을 밟고 올라가고 이런 게 아닙니다.

질문자2(남) 잘 알겠습니다. 두 번째 질문을 올리겠습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성인 원효 대사의 어록에 보면 “심생즉종종기 심멸즉종종멸, 일체유심 심외무법 만법유심(心生卽種種起 心滅卽種種滅 一切唯心 心外無法 萬法唯心), 우주 일체는 오직 마음에 있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거는 조금 전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어느 식에 해당되는 건지요?

큰스님 식이고 나발이고요, 허허허…, 심생즉종종기는, 이거 보세요. 내가 아까 얘기했잖아요. 이게 정신계와 물질계, 이런 소리나 똑같습니다, 그 소리가. 지금 아주 알기 쉽게 얘기한다면, “염주알과 염주줄이 둘이 아니고 그냥 일심으로써 통하느니라.” 이러는 거와 똑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모두가 둘이 아닌 도리가 바로 네 마음에 있느니라.” 이런 소립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어떻게 내야 되느냐? 어떻게 내느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 내기 이전은 항시 좋고 나쁜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마음을 내되 엉망진창으로,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입력이 돼서 주어진 대로 그 마음을 내지를 말라는 거죠. 지금 중생 의식들이 이 몸 안에 잔뜩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자꾸 나오는 겁니다. 그런 것을 다스려서 이 헤아릴 수 없는 생명체들이 자기 선장에게 한마음으로 따라 줄 때까지 수행을 시켜라 이겁니다.

질문자2(남) 잘 알겠습니다. 세 번째 질문을 올리겠습니다. 그럼 그 마음공부를 하는 데 원리적인 방법과 실천적인 방법은 어떤 게 있습니까?

큰스님 아, 원리적인 방법과 실질적인 방법이 따로 있습니까? 원리가 있음으로써 실천을 할 수 있는 거지, 그 원리가 없는데 어떻게 실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원리가 있음으로써 망하게도 할 수가 있고 좋게 되게끔 실천할 수도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잘 다스려서 행을 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을 가지신다면 될 수 있는 거죠.

질문자2(남) 잘 알겠습니다. 다섯 번째 질문을 올리겠습니다. 본인은 ‘처처불법(處處佛法) 사사불공(事事佛供)’을 신행 신조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활을 해 보니까 여러 가지로 생활이 윤택해지고 참 좋은 점이 많습니다. 그런데 좀 더 효율적으로 하려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한 말씀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뭐, 달리 생각할 것도 없고, 여기 앉아 계신 분들이 다 생명이 있죠? 생명이 있으니까 이렇게 사시죠? 그러니까 처처불(處處佛)이에요, 처처불! 즉 말하자면 사무 사유(四無四有), 이 모든 보이지 않는 세계나 보이는 세계나 그 생명이 다 있고 그렇기 때문에 처처불이죠. 그래서 처처불이며 사사불공이라고 했죠? 그 불공이라고 한 자체가 바로 처처불이기 때문에 생활 자체가 그냥, 움죽거리는 그 자체가 바로 공(空)했다는 겁니다. 찰나찰나 공했다 이겁니다. 즉 말하자면, 고정된 게 하나도 없다 이거죠. 고정된 게 하나도 없어요.

지금 선생님이 나를 보고 있었는데 금방 돌아서면 저기 보고, 금방 돌아서면 저기 생각하고, 금방 돌아서면 딴 거 보고 이러죠? 내가 항상 말을 하죠? 가정에 들어가도 “여보!” 하면 남편이 됐다가, 금방 “아버지!” 하면 아버지가 됐다가, “얘, 아무개야!” 그러면 아들이 됐다가, “여보게!” 하면 사위가 됐다가, “형님!” 하면 형님이 됐다가 이렇게 그냥 찰나찰나 바뀌지 않습니까? 생활도, 일체가 다 고정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또 육체 안에 들어 있는 생명체들도 작용하는 것이 전부 고정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땐 이런 게 들어오고, 어떤 땐 저런 게 들어오고, 어떤 땐 딱딱한 게 들어오고, 어떤 땐 물이 들어오고 이러니까 작용하는 것도 사사건건이 달라요, 이건. 들어오는 대로 사사건건이 다르니까 어떤 건 이렇게 내보내고, 어떤 건 저리로 내보내고, 어떤 건 모자라는 대로 이렇게 메꿔서 내보내고, 그러다가 고장이 나면 메꿀 수가 없게 되는 이치가 되기 때문에 병이 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주 누덕누덕 붙여 가지고 긁어서 외려 부스럼을 만들지 마세요. “생명이 있는 거는 일체가 다, 풀 한 포기도 불(佛)이다. 처처불이다! 또 일체가 다, 마음으로 통하고 뜻으로 통하고 말로 통하는 게 교(敎)다. 그런데 그 일상생활 자체가 그대로 불교요, 삼천대천세계가 공했다!” 했습니다. “불공” 했는데 이걸 “평등불공!” 이렇게 해도 되고요. 아주 간편합니다. 그래서 공했다는 거예요. 공했으니 그 의의만 떼어 놓고서 자기가 깨달으면 그 뜻을 알 수 있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간편하게 배워야죠. 너무 어렵게 배우면 어깨가 무거워서 더 안 돼요. 왜, 집안에서도 이런 게 있죠. 너무 닥치는 게 많아 가지고 내가 그거를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을 때에는 어깨가 무겁고, 그래서 그냥 “어휴! 멋대로 돼라.” 이러고 내팽개쳐지죠. 그렇게 될 수 있으니까 무겁게 만들지 마세요. 무겁게 만들면 오히려 불성이 가려집니다. 발견이 돼야 할 텐데 오히려 척척 붙어서 눈을 가려 놔서 볼 수도 없어요. 그러니까 떼야 될 텐데 외려 붙이면 됩니까?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4년 4월 3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