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 시인 (하)

최 씨 구명운동 함께 하며 서신 왕래도
양아들 석방 위해 ‘MBC 수사반장’ 출연

 

“오늘도 어버이날에 맞춰서 / 교도소에 있는 의(義)아들로부터 / 편지가 왔다. // “아버님, 올해도 꽃 한 송이 / 가슴에 달아드리지 못하고 / 이렇게 마음만 전하옵니다 / 라는 사연이었다. // 그 애는 15년째 옥살이를 하는 無期囚, / 아니, 경찰의 모진 고문으로 조작된 / 살인강도죄로 사형선고를 받고서 / 그 집행의 날만을 마음 졸이다가 / 어느 스님의 앞장선 탄원으로 / 겨우 목숨만을 건진 40세의 젊은이 // 그 구출 서명에 동참한 인연으로 / 나와는 父子之緣까지 맺게 되었지만 / 무능하고 부실하기 짝이 없는 이 애비, // 〈후략〉”

위는 구상의 시 ‘어버이날에 온 편지 1’의 일부이다. 시 속의 ‘의(義)아들’은 사형수 최재만 씨이고 ‘스님’은 나다.

1981년 2월 6일 밤, 경기도 시흥군 의왕읍 청계리의 농협분소에서 살인사건이 있었다. 분소장 이모씨(당시 38세)가 가슴과 등을 흉기에 찔려 숨진 사건이었다. 2월 19일 밤, 안양 역전 우체국 금고를 털려다 붙잡힌 최재만 씨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2월 6일 발생한 농협 청계분소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다. 최 씨는 재판과정에서 줄곧 자신의 자백이 경찰의 심한 고문으로 인한 허위자백이며 자신은 살인사건과 무관함을 주장했다. 하지만 최 씨는 다음해 8월 14일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사형수가 된다.

1983년 7월, 나는 교화활동을 위해 서울구치소를 찾았다가 최 씨와 처음 만났다. 처음 만난 최 씨는 손에 염주를 들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 이미 불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최 씨와 남다른 시작으로 인연을 시작하고 싶었다. 나는 그에게 서로의 염주를 바꾸자고 제안했다. 남다른 기억으로 시작하고픈 나의 ‘프로포즈’였다. 나의 마음은 너무나도 분명한 선의였기에 나는 당연히 최 씨가 나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 씨는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황스러웠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당연하게 받아들일 줄 알았던 제안을 그가 거절한 까닭이 궁금해졌다. 일단 그의 염주가 궁금해졌다. 나는 구경이나 한 번 하고 싶어 그에게 청했다. 건네받은 최 씨의 염주알 하나하나에 거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염주알마다 깨알 같은 글씨가 새겨져있었다. 〈금강경〉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염주알 하나에는 ‘나는 억울하다’고 새겨져있었고 그 옆에는 ‘必歸家(반드시 집으로 돌아가겠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사형수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한단 말인가. 나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죄가 없습니까?”
“죄를 짓지 않았으니 반드시 돌아갈 겁니다.”

최 씨는 지나간 일을 이야기했다. 최 씨를 여러 차례 만나면서 나는 그의 억울함이 사실인지 자세히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공범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마산교도소에 복역 중인 이 씨를 찾아갔다. 하지만 이 씨(당시 36세)는 복역 중 병세가 중해 형집행정지로 잠시 석방되어 치료를 받는 중에 사망했다. 이 씨는 심문 도중 고문으로 허리, 척추, 가슴을 다쳐 치료를 받고 있었다. 또 다른 공범 권 씨(당시 19세)는 소년수로 대전교도소에 복역 중이었는데, 그 역시 살인사건과는 무관하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최 씨가 살인사건과 무관함을 확신한 나는 83년 10월, 최 씨의 구명운동을 시작했다. 서울지방변호사회를 찾아가 최 씨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변호사는 인권위원회를 열어 재판기록을 조사한 결과 의문점이 있음을 발견하고 변호사를 선임해 재심을 추진했다. 1983년 12월 13일, 최 씨가 살인사건과는 무관하다는 몇 가지 증거를 찾아 수원지법에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재심청구는 1984년 9월 17일 ‘객관적 우위성이 있는 증거가 아니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최 씨는 9월 22일 재심청구 기각에 대해 항고했다. 최 씨의 사형이 언제 집행될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서울변호사회는 7백 명이 서명한 사형집행 보류 청원서를 법무부장관에게 제출했다. 형이 확정된 사형수의 구명운동에 변호사회가 직접 나선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사형집행은 미뤄지고 있었다.

최 씨와 부자의 연을 맺은 구상 시인은 최 씨와 꾸준히 편지왕래를 해왔다. 최 씨는 어버이날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구상 시인에게 “아버님, 올해도 꽃 한 송이 가슴에 달아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마음만 전합니다.”고 글을 전했고, 구상은 최 씨에게 “죽기 전에 내 아들 가슴에 꽃을 달아주고 싶다”고 답했다. 그렇게 최 씨와 부자의 정을 쌓아가던 구상은 최 씨의 석방을 위해 MBC ‘수사반장’에 출연까지 하게 된다. 부처님오신날 특집이었다. 구상은 선천적으로 상을 내는 사람이 아니다. TV출연은 구상과 거리가 먼, 아니 절대로 안하는 일 중 하나였다. “당신이 출연해야 당신 아들 재만이가 석방될 수 있다”는 말 한 마디에 구상은 방송에 출연해 진정서에 서명하는 장면을 찍게 된다.

강도살인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최 씨는 1988년 2월 26일 무기수로 감형됐고, 2000년 5월 10일 부처님오신날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19년 만의 출소였다. 그 19년의 세월 속엔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구상 시인이다.

나는 구상 시인의 생의 마지막 날을 지켜봤다. 할 말이 있다며 옆에 앉아보라는 그의 말에 그의 곁에 앉았지만 차마 숨을 거두는 모습을 볼 수 없어 그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지 못했다. 괴로워서 볼 수 없었다. 올해가 구상 시인 탄생 100주년이다. 나보다 훨씬 먼저 이 세상에 왔던 구상 시인은 늘 나를 출가자로 바라보았다. 늘 상석을 내어주고 격식을 잊지 않았다. 고단한 교화활동의 길에 함께 걸어준 고마운 이다. 안타까운 삶을 지나치지 못하는 따뜻하고 따뜻한 이다.

고단한 교화활동의 길을 함께 걸어준 구상 시인. 그 왼쪽이 박삼중 스님, 오른쪽 두번째가 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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