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처염상정(處染常淨)

‘처염상정(處染常淨)’은 ‘오염된 곳, 더러운 곳에 있지만 항상 깨끗하다’는 뜻이다.

혼탁한 세상이다. 서로 상대방을 헐뜯고 비난하는 세상이다. 이해관계, 견해 차이, 증오, 욕망과 분노 등으로 삭막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말세에는 투쟁을 일삼는 ‘투쟁뇌고시대’, ‘오탁악세(五濁惡世)’가 도래한다고 말씀하셨다. ‘처염상정’이라는 말은 오탁악세를 살아가고 있지만, 거기에 물들지 않고 ‘연꽃처럼 깨끗한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임무를 맡았을 때, 집단의 일원이 되었을 때, 처음에는 누구나 순수하다. 대체로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몇 년 동안 그 집단 속에서 함께 지내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어떤 것이 섞이며 물이 든다. 나중에는 자신이 더러워진 줄도 모른다. 썩은 냄새가 푹푹 나는 탕아(蕩兒)가 되어 버린다.

보조국사(1158~1210)가 지은 〈계초심학인문〉에는 “모름지기 나쁜 사람은 멀리하고 어질고 착한 사람을 가까이 하라(遠離惡友 親近賢友)”고 했는데, 인간은 성선(性善)보다는 성악(性惡)에 가깝기 때문이다. 생선 장사를 하면 몸과 옷에 비린 냄새가 배일 수밖에 없고, 먹물을 가까이하면 먹물이 묻을 수밖에 없다(近墨者黑).

그런데 간혹은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순수함을 잃지 않는 깨끗한 사람이 있다. 악(惡)이나 통속적, 세속적인 것에 물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는 바탕이 고귀한 사람, 마음이 청정한 사람,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약삭빠른 속인들은 이런 사람을 비웃는 경우가 많다.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다. 불교에서 연꽃을 짝사랑하는 까닭은 연꽃은 진흙탕 속에서 피지만 물들지 않고, 뿐만 아니라 꽃과 향기가 모두 아름답기 때문이다. 연꽃이 탁한 곳에 있어도 오염되지 않는 것처럼[處染常淨] 중생들도 진흙탕 같은 사바세계(세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물들지 말라는 뜻이다. 본래 뜻은 진리의 영역인 부처의 세계(불성), 본성, 불성, 진여는 오염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연꽃을 상징하는 경전이 우리 불자들에게 친근한 〈묘법연화경(법화경)〉이다. 산스크리트 명으로는 ‘삿다르마 푼다리카 수트라(Sadharma pundarika sutra)’인데, 푼다리카는 ‘백련(白蓮)’, ‘흰 연꽃’을 뜻한다. 〈법화경〉에서 말하는 최고의 진리인 일승(一乘), 일불승(一佛乘)에 비유한 것이다.

〈화엄경〉 이세간품에는 “(보살이) 세간에 머무르되 허공과 같이 걸림이 없는 것이 마치 연꽃이 물에 젖지 않는 것과 같다(處世間如虛空 如蓮花不着水)” 또 “연꽃에 물이 묻지 않는 것처럼, 마음은 본래 청정하여 번뇌를 초월해 있다(如蓮花不著水, 心헌淨超於彼)”고 하여, 보살은 세속에 있지만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고 찬탄한다.

돈 많은 부자는 겸손하기가 어렵고, 힘센 사람은 주먹 참기가 어렵고, 권력자는 횡포 참기가 어렵고, 미남과 미녀는 바람기 참기가 어렵고, 지식 있는 자는 오만함을 참기가 어렵고, 실력이 있는 자는 과시를 참기가 어렵다.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물들지 않고 겸손한 것은 그가 인격자이기 때문이다.

연꽃의 한 종류라고 할까, 수련(睡蓮, 잠잘 睡)이 있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전만해도 물 수 자 ‘水蓮(수련)’라고 생각했다. 물에서 자라기에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는데 물 ‘수’가 아니고 잠잘 ‘수’의 수련(睡蓮)이다.

수련(睡蓮)은 저녁때가 되면 꽃잎이 봉우리처럼 오므라든다. 마치 수면을 취하는 것처럼 보여서 옛 사람들은 ‘잠을 자는 연꽃(睡蓮)’이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다고 하는데, 아주 매력적인 이름이다. 수련은 한낮이 되면 다시 활짝 피기 시작한다고 한다. 연꽃과 수련의 다른 점은 꽃잎에서도 구분된다고 한다. 보통 연꽃의 꽃잎은 물 위로 쑥 올라와 있는데 수련의 잎은 물 위에 둥둥 떠 있다.

중국 북송시대의 유학자 주무숙(周茂叔:주돈이. 1017~1073)은 연꽃을 매우 사랑하여 ‘애련설(愛蓮說)’을 지었다(고문진보). 그는 “내가 연꽃을 사랑하는 것은 진흙 속에서 나지만 거기에 물들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우리가 태어나 살아가는 이 세상이 진흙이라면, 거기에 물들지 않는 연꽃은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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