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믿음 편 12

현실을 살아내기 힘들 때, 사람들은 미래를 꿈꾼다. “언젠가 행복한 날이 오겠지” 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인간의 소망을 잘 읽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주목받는다. 우리 역사에서는 궁예와 견훤이 그랬다. 그들이 대중에게 희망을 심어주면서 내세운 모델은 다름 아닌 미륵이었다. 왜냐하면 미륵은 미래의 행복을 보장하는 보살이자 부처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미륵은 희망의 아이콘이었던 것이다.

모든 부처들이 성불하면 자신만의 정토를 건설한다는 것이 대승불교의 관념이다. 예컨대 서방의 아미타불이 극락정토를 장엄했다면, 동방의 아촉불(阿?佛)이 건설한 묘희국(妙喜國)도 있다. 묘한 즐거움으로 가득한 정토라는 뜻이다.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 역시 자신만의 청정한 국토를 건설하는데, 이를 용화세계(龍華世界)라고 한다. 저마다의 이름을 갖고 있지만 모두 괴로움이 소멸되고 즐거움이 가득한 정토를 그리고 있다. 그곳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소망이 정토신앙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미륵(彌勒)은 범어인 마이트레야(Maitreya)를 옮긴 말이다. 본래 자비와 우정을 뜻하기 때문에 자씨보살(慈氏菩薩), 혹은 자비보살로 불리기도 한다.

〈미륵하생경〉에는 미륵이 인도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났다가 붓다의 제자가 된 사연을 전하고 있다. 미륵은 붓다의 지도 아래 열심히 정진하다가 스승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미래에 성불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받고 지금은 도솔천에 머물고 있다 한다. 미륵보살이 머물고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곧 상생신앙(上生信仰)이다.

이와 달리 56억 7천만년이 지난 다음 미륵불이 이 땅에 내려와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모든 중생들을 구원하기를 바라는 하생신앙(下生信仰)도 있다. 어찌 보면 미륵신앙은 기독교의 종말론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런데 정토신앙과 종말론은 구원의 대상에서 본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신을 믿는 자만 구원을 얻지만, 미륵신앙은 그와 관계없이 모든 중생을 구원하기 때문이다. 중생구제라는 대승불교의 이념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미륵신앙 역시 아미타신앙에서 보인 것처럼 사실보다는 상징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있다. 미륵정토는 먼 미래의 세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이며, 따라서 내 마음이 곧 정토(唯心淨土)라는 것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정토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우리의 현실이 된다. 미륵사 창건 설화에서 이러한 면을 엿볼 수 있는데, 〈삼국유사〉에는 백제 무왕의 왕비인 선화 공주가 연못에서 미륵 삼존불을 친견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사택왕후(沙宅王后)의 발원으로 미륵사가 세워졌다는 기록이 발견되었지만, 선화공주 설화에 담긴 선인들의 사유마저 놓쳐서는 안 된다.

비록 설화지만 당시에 미륵불이 출현했다는 것은 미륵정토는 먼 미래의 정토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정토라면 이 땅을 청정하게 가꾸려는 노력이 중요할 것이다. 널리 알려진 팔관회(八關會)나 백고좌회(百高座會) 등은 본래 이 땅을 정토로 장엄하려는 취지에서 시작된 불교의례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여원인(與願印)의 수인을 하고 있는 미륵불을 많이 볼 수 있다. 시무외인은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고 위안을 준다는 뜻으로 주로 오른손을 어깨 높이까지 올리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여원인은 중생이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왼손을 내려서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하고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미륵반가사유상은 어떻게 해야 중생들의 고통을 없앨 수 있을까 고민하는 모습이다. 이제 미륵의 고민을 우리 중생들이 조금 덜어주면 어떨까? 각자가 주체가 되어 이 땅을 정토로 가꾸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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