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봉 스님(66·대각사 주지)

아프리카에 전법 원력
“아프리카에 한국불교 없어”
킬리만자로에 ‘보리가람스쿨’ 불사
아프리카 최초의 한국 도량
불상 모시고 〈한글반야심경〉 알려
현지서 아프리칸 이름 ‘기포’ 받아
종립학교 부지 3만 평 마련 기증
탄자니아 전국 돌며 말라리아 구호

동봉 스님은… 1975년 불문에 귀의했다. 해인사승가대학, 중앙승가대학, 동국대 불교대학원에서 공부했다. 법명은 정휴(正休)이며 자호는 일원, 법호는 동봉이다. 1993년부터 1997년까지 BBS불교방송에서 ‘살며 생각하며’, ‘자비의 전화’ 생방송을 진행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전법과 말라이라 구제활동을 펼쳤다. 한국 출가자 최초로 아프리카에 ‘학교법인 보리가람스쿨’을 설립했다. 2016년 개교한 보리가람기술농업대학의 부지를 마련해 조계종에 기증했다. 곤지암 우리절 창건주이자 회주로서 책, 법문,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佛法을 전하고 있다. 2015년부터는 ‘기포의 새벽편지’로 불법을 전하고 있다. 2017년부터 서울 대각사 주지로 수행자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 가르침을 가지고 수로나로 가겠습니다.” ‘설법제일’로 불리는 부루나 존자는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을 들은 후 수로나로 향한다. 부처님은 걱정이 앞선다. 수로나는 아직 법이 전해지지 않았고, 사람들은 사나웠기 때문이다. 결국 부루나는 수로나에서 열반에 든다. 순교였다. ‘신통제일’이었던 목건련도 전법의 길에서 순교로 열반에 들었다. 이처럼 법의 불모지에 법을 전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시절마다 전법의 원을 품고 낯선 곳을 찾아 나선 불제자들이 있었기에 이 땅에도 불법이 꽃을 피울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이 땅에도 낯선 곳을 바라본 불제자가 있다. 그가 바라본 낯선 곳은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 그 원력의 주인은 동봉 스님이다.

佛法 불모지, 아프리카
부루나 존자가 ‘설법제일’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누구보다 큰 전법원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원력이 곧 불사였다. 전무후무한 아소카왕의 전법을 비롯해 전법은 쉼 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전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곳에서 부처님의 말씀이 꽃피지는 못했다. 아직도 부처님의 말씀이 닿지 않은 곳은 많다. 그 많은 처처가 시절인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만년설의 봉우리를 지닌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 마침내 불연이 시작된다. 2004년 11월. 동봉 스님은 킬리만자로를 보기 위해 탄자니아를 찾았다. 단순한 ‘여행’이었다. 그것이 ‘佛씨’였다.
“그야말로 단순한 여행이었어요. 그런데 그 땅에는 한국불교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아니 불교 자체가 없었어요.”
아프리카 54개국에 한국불교는 없었다. 일부 극소수의 나라에 불교가 있었지만 그 저변은 매우 빈약했으며, 그 빈약함 속에서 조차 한국불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프리카에 불교는 없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한국의 타종교는 이미 자리를 넓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겨우 100년의 역사를 가진 타종교도 생각해낸 것을 1천7백년, 아니 2천년의 역사를 지닌 한국불교는 왜 생각하지 못했는지, 저 자신부터 부끄럽고, 안타까웠죠.”
부처님 말씀이 닿지 않은 곳, 아프리카. 킬리만자로의 길을 걷는 이방인의 낯선 한 걸음 한 걸음은 뜻을 품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에 불교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이미 마음속에선 전법의 원력이 자리 잡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거창한 원력이라기보다는 부처님 말씀이 없는 곳에 ‘불법(佛法)’이라는 씨앗 하나 심고 싶었어요.”

낯선 땅, 다시 킬리만자로
떠나는 발걸음은 ‘떠남’이 아니었다. 킬리만자로를 떠나는 동봉 스님의 발걸음은 다시 돌아오기 위한 채비였다. 한국에 돌아온 스님은 킬리만자로로 돌아가기 위해 미련 없이 한국에서의 삶을 정리한다. 경기도 광주시 우리절의 주지였던 스님은 그동안의 불사와 많은 인연을 뒤로 한 채 2005년 3월 다시 킬리만자로로 향한다. 또 다른 출가였다. 삶에서 삶을 정리하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닌 출가가 아닐까. 오래 전, 삶에서 삶을 정리했듯 스님은 또 한 번 ‘길’을 간다.

다시 킬리만자로 땅을 밟은 동봉 스님은 홈스테이로 킬리만자로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현지의 언어, 현지의 문화부터 익히고 알아야했다. 그리고 전법에 대한 구상을 해야 했다. 탄자니아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인구가 가장 많았다. 그리고 기독교를 비롯한 한국의 타종교는 열심히 길을 닦고 있었다. 불법(佛法)이라는 씨앗 하나가 전부인 동봉 스님에게 킬리만자로는 부루나의 ‘수로나’였다. 처음부터 부처님의 ‘佛’자를 꺼내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현명한 일도 아니었다.

스님은 현지인들과 친해지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전법의 전부일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매주 교회나 성당에 나가 현지인들과 교감했다. 스님의 손엔 경전도 종교도 없었다. 누가 보아도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의 이방인. 탄자니아에는 왜 왔을까. “탄자니아에는 왜 왔나요?”라는 현지인의 물음에 스님은 “와보니 살고 싶어져서 다시 왔다”고 했다. 그렇게 스님은 탄자니아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킬리만자로에 울리는 한글반야심경
2006년 2월. 동봉 스님은 홈스테이를 정리하고, 킬리만자로 산자락 해발 약 2천m에 약 3천 평의 땅을 마련한다. 아프리카에서의 길을 시작해야 했다. 그 옛날의 순도, 마라난타를 기억하며 동봉 스님은 낯선 땅에서 ‘길’을 시작한다.

스님은 마련한 땅에 작은 움막집을 하나 짓는다. 이름은 ‘보리가람스쿨’. 이름은 학교였지만 그것은 한국불교 최초의 아프리카 도량불사였다. 출가자의 거처이고 그 출가자에겐 진한 원력이 있으며, 후에 부처님도 모셨으니 그것은 분명 법당이었다. 법당의 불상은 탄자니아 사람이 탄자니아의 특산품인 흑단으로 조성했다. 일명 ‘마사이불’이다. 마사이족의 얼굴을 닮았다. 탄자니아 사람이 생각하는 부처님의 얼굴이다. 마침내 탄자니아 출신의 불모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으며, 탄자니아 땅에 부처님의 실존이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낮엔 아이들이 몰려와 공을 차고 목탁을 두드리며 놀았다.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이 돌아가고 고요가 찾아오면 도량엔 스님의 독경소리가 흘렀다. 아프리카 땅에 세워진 최초의 한국 법당이다.

“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 보살행자 깊은반야 실천하여 저언덕에 도달하는 바라밀다 하올때에 오온모두 공한것을 분명하게 비춰보고 이세상의 일체고액 모두벗어 나느니라…”

어느 날,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산기슭에서 반야심경이 들려온다. 동봉 스님의 4언 절구 〈한글반야심경〉이다.

스와힐리어 발음기호로 적어준 〈한글반야심경〉을 탄자니아 사람들이 독송하고 있다. 물론 스님은 그들에게 〈반야심경〉이 무엇인지, 그 글자들이 가진 뜻은 무엇이지도 알려주었다.

스님이 도량을 마련하고 그들에게 처음 던진 것은 ‘참선(좌선)’이었다. 나무 그늘에 앉아 명상에 잠긴 스님의 모습은 탄자니아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였다. “참선이 무엇이냐?”는 탄자니아 사람들의 질문에 스님은 “나를 찾는 일이다”고 대답했다. “나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물음이 돌아왔고, 스님은 “먼저 〈반야심경〉을 독송해야 한다”고 했다.

탄자니아 사람들은 빠르게 참선에 빠져들었다. 스님이 나무 밑에서 가부좌를 틀면 어느새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물이 흐르듯 바람이 불 듯 만들어진 일상은 ‘법회’가 됐다. 많을 땐 300명이 넘게 마당을 메웠다.

동봉 스님은 매주 참선법회를 열었다. 열었다기보다는 열렸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정해진 날도 없었고 알림도 없었다. 구름이 차면 비가 내리듯 사람들은 스님 곁으로 모여들었다. 스님은 죽비를 들고 한국의 선방에서처럼 참선을 지도했다. 그리고 탄자니아 킬리만자로에서 부처님 이야기가 오고 가기 시작했다.

한국불교 최초 아프리카 교육도량불사
한국에서 아프리카로 날아온 ‘동봉’이라는 밀알은 한국불교 최초 아프리카 종립학교불사라는 대작불사를 틔워낸다. 2016년 9월 5일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에 ‘보리가람농업기술대학교’가 문을 연다. 아프리카에 한국불교와 한국 전통문화를 알리기 위해 설립된 학교는 조계종과 (재)아름다운동행이 3년에 걸쳐 회향한 아프리카 최초의 종립학교다. 역사적인 불사는 동봉 스님으로부터 시작됐다.

동봉 스님이 킬리만자로에 법당을 세우고 참선을 시작했을 무렵, 동봉 스님은 또 하나의 큰 불연을 만난다. 故 이태석 신부다. 이 신부는 아프리카 수단 남부에서 나병환자를 돌보고 있었다. 지금도 이 신부는 ‘수단의 슈바이처’로 불린다.

2006년 4월 30일. 동봉 스님의 소식이 TV 전파를 탔고, 이 신부는 방송을 통해 스님의 소식을 듣게 된다. 많은 책을 출간했던 동봉 스님이었다. 이 신부는 오래 전부터 동봉 스님의 책을 통해 스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반가웠다. 두 사람은 케냐에서 만난다.

“스님, 탄자니아에서 무엇을 하려고 오신 겁니까?” 이 신부가 물었다. 스님의 대답은 의외였다. “학교 하나 세우고 싶습니다.” 절이나 명상센터가 아니었다. 부지불식중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스님은 지금도 왜 그런 대답이 튀어나왔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말은 그 자리에서 원력이 된다.

동봉 스님은 다시 킬리만자로를 떠나야했다. 원력이 된 학교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스님은 2007년 11월 30일부터 다음 해 3월 10일까지 탄자니아 불교문화아카데미 건립과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서원을 세우고 ‘101’일 국토대장정을 회향한다. 우리절을 출발해 매일 20~30km를 걸어 전국을 순례했다.

국토대장정을 마친 동봉 스님은 다시 킬리만자로로 돌아간다. 그리고 인연이 찾아든다.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이었다. 2008년 8월, 동봉 스님은 박 회장이 후원한 2억 원으로 다르에스살람에 약 3만5천 평의 학교 부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봉 스님의 원력은 조계종이 2013년 발표한 아프리카 학교건립 추진 사업과 만나게 된다. 스님은 학교 부지를 (재)아름다운동행에 기증하고 3년 후 이 신부와 약속한 원력을 회향하게 된다.

스님은 킬리만자로 보리가람스쿨에서 참선을 시작하면서 말라리아 환자를 돕는 일도 시작했는데, 탄자니아 전역을 돌며 말라리아 환자의 의료비(약값)를 지원했다. 스님은 봉사와 학교건립 불사를 함께 진행하는 것이 다소 무리라고 생각했다. 스님은 종단 차원에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무척 기뻤지요. 절 하나 지은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불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농업기술을 전함으로써 그들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실천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이고, 그들의 삶에 한국불교의 손길이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또한 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출가와 수행 그리고 전법
출가 전 〈법화경〉 등 경전 탐독
22세 때 치악산 구룡사서 출가
해인사서 고암 스님 법 이어
용성선사 어록집 등 저술 62권
소셜미디어 전법 ‘기포의 새벽편지’
1500회 돌파 매일 3천여 명 설법

 

불연으로 가는 길
동봉 스님의 불연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스님은 1975년 치악산 구룡사에서 출가했다. 강원도 횡성 산골에서 태어난 청년은 배움에 대한 생각이 많았다. 〈천자문〉, 〈동몽선습〉 등을 초등학교 입학 전에 서당서 뗐다. 한글보다 한문을 먼저 뗀 셈이다. 열다섯 살부터는 〈명심보감〉을 비롯해 〈논어〉 〈맹자〉 〈소학〉 등을 완독했다. 하지만 스님이 안고 있는 형편은 배움에 대한 욕구를 해결하기에 부족했다. 사법고시를 준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스님의 배움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불연으로 이어졌다.

스님의 이모가 치악산 구룡사의 신심 큰 신도였다. 동봉 스님의 불연은 이모 집에서 시작된다. 어느 날 동봉 스님은 이모 집을 찾았다가 새로운 세상의 책들을 만난다. 이모 집에는 〈법화경〉 〈유마경〉 등 경전들이 많았다. 한문에 밝았던 스님은 그 책들을 모조리 읽어버린다. 새로운 세계였다. 스님은 다른 책에서는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진리를 경험한다. ‘불교’였다.

1975년 음력 2월 15일 열반재일에 스물두 살의 청년은 이모님이 계신 치악산 구룡사로 향한다. 난생 처음 하는 걸음이다. 주지 스님의 법문을 듣는다.
“주검이 곧 열반이다.”
동봉 스님은 법회가 끝나고 주지 스님을 찾아가 법문의 뜻을 여쭈었다. 주지 스님의 답은 너무나 허무했다. “주검이 곧 열반이라고 했는데, 무엇을 더 묻느냐? 주검이 곧 열반이니라.”
스물두 살의 청년은 이틀 후 다시 구룡사를 찾았고 머리를 깎는다.

상구보리하화중생
동봉 스님의 배움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불연으로 가는 길이었다. 출가한 그해 가을 동봉 스님은 고암 스님과 인연을 맺고 법을 받는다.

학구에서 비롯된 출가는 배움의 길을 여는 법보시로 이어진다. 스님은 지금까지 62권의 책을 출간했다. 초기 경전과 대승경전의 번역서, 해설서를 비롯해 용성선사의 어록집, 산문집 등 부처님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다시 동봉의 글자로 회향했다.
“출가자로서 하루하루 수행에 매진하는 것이 곧 전법인 것 같아요.”
스님은 아프리카라는 낯선 땅에 원력을 심은 것을 비롯해 아픈 사람을 돕고 법보시를 하는 등 자신이 지금까지 해온 불사들을 모두 ‘수행’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수행이 대중에게는 전법이 된 것이라고 했다.

2009년 2월 탄자니아에서의 전법을 마치고 귀국한 동봉 스님은 쉼 없는 저술을 이어갔고, 2015년 1월 1일부터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부처님의 법을 전하기 시작한다. ‘기포의 새벽편지’다. 매일 3천여 명의 대중에게 전해지는 동봉 스님의 설법으로, 1500회를 돌파했다. ‘기포(kipoo, 起泡)’는 동봉 스님의 아프리칸 이름이다. 탄자니아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으로, 킬리만자로의 최고봉 ‘키보’에서 왔다. ‘빛나는 산’이라는 뜻의 킬리만자로, 그곳에 불상을 새기고 반야심경을 알리고 온 한국 최초의 전법승 기포. 그가 뿌리고 온 佛씨가 어떤 열매를 얼마나 맺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2017년 4월 탄자니아 보리가람농업기술대학교에서 첫 학생 불자가 나왔다. 4명의 탄자니아 학생들은 조계사에서 계를 받았다. 그 옛날 우리가 순도와 마라난타의 이름을 역사에 적었던 것처럼, 훗날 탄자니아의 역사는 ‘기포’라는 이름을 역사에 그렇게 적을 것이다. 기포 스님은 “수행은 멈출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키보에서 빛나고 있는 만년설처럼 기포의 수행은 계속 되고 있다.

동봉 스님은 탄자니아인들에게 한글반야심경을 가르쳤다. 첫날 학생들과 기념사진.
동봉 스님이 킬리만자로 산자락에 지은 보리가람스쿨. 아프리카 최초의 불사다.
말라리아 환자 돕기 활동 중인 동봉 스님.
보리가람스쿨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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