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능 ‘돈오 법문’으로 五家 열다

중국 광동성 소관 남화사 육조전에 있는 혜능 선사의 진신상. 본래는 영조탑에 봉안돼 있었으나 도난이 염려돼 육조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선(禪)과 관련된 주제를 원고 작성할 때면 늘 떠나지 않는 이야기가 머릿 속을 맴돈다. 구한말 금강산 마하연 아래 목욕탕이 있었다. 이 목욕탕의 주인은 불심이 돈독한 불자로서 스님들이 오면, 목욕비를 받지 않았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이 목욕탕에서 목욕하고 나오는데, 주인장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몇 마디 덧붙였다.
“주인장! 고맙소이다. 육신을 깨끗하게 목욕하니, 기분이 좋습니다.”

주인이 그 말을 듣고, 스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님, 육신은 깨끗하게 목욕했는데, 마음은 어떻게 씻으시겠습니까?”

스님은 아무런 대답도 못한 채 돌아가면서 크게 반성하고, 열심히 정진했다고 한다. 하루에 아침저녁으로 몇 차례 세수하면서도 이 주인장의 말을 생각한다. 마음의 번뇌를 어떻게 씻길 것인가? 혜능의 가르침으로 보면, 본래성불된 존재이니, 털어버릴 것조차 없음이요, 어떤 언어로도 이름붙일 수 없는 일물이다.      

대범사서 설한 법이 ‘육조단경’
713년 中광동성 국은사서 입적
혜능 아래로 5개 종파 형성돼
자성청정 기반한 돈오를 강조
사상 핵심은 ‘무념·무상·무주’


혜능이 광동성(廣東省) 소관(韶關) 남화사(南華寺)에 머물며 제자들을 제접하였다. 어느 해, 소주(韶州) 자사(刺史) 위거(韋蘊)라는 사람이 그 관료들과 함께 찾아와 대범사(大梵寺)에서 법을 설해 줄 것을 청했다.

당시 혜능이 대범사 강당에서 법을 설할 때 자사 및 관료 30여 명, 유학자 30여 명, 스님들과 일반 재가인 모두 합쳐 1천여 명이 모였다. 이때 법을 설한 내용이 바로 〈육조단경(六祖壇經)〉이다. 〈단경〉을 설한 장소인 대범사는 현재 대감사(大鑑寺)라고 한다. 현 대감사라고 사찰 이름이 바뀐 것은 혜능의 시호인 대감(大鑑)에서 딴 것이다.

소관 기차역에서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매우 작은 사찰이다. 필자는 이곳을 방문하고, 조금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혜능이 홍인으로부터 법을 받은 때가 677년으로, 그는 조계로 와서 36년간이나 선풍을 전개했고, 제자들을 지도하였다. 713년 7월 8일 혜능이 열반에 들려고 하자, 문인들이 모였다. 대중이 슬피 울면서 좀 더 머물기를 청하자, 혜능이 말했다.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신 것도 열반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옴이 있었으니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의 이 몸도 반드시 가야 한다.” 
“스님께서 지금 가시면 언제 돌아오시는 겁니까?”
“잎사귀가 떨어지면 뿌리로 돌아간다. 다시 올 날을 말할 수 없으리.(落葉歸根 來時無口)”

‘낙엽’이라는 눈에 보이는 현상이 사라진다고 해서 ‘낙엽’이라는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또 ‘꽃잎’이 떨어졌다고 하여 꽃이 진 것이 아니다. ‘꽃잎’은 현상적인 존재로 피었다가 지는 것이지만 그 꽃잎을 떠받치고 있는 참된 실재(꽃)는 영원히 존재한다. 생멸하는 현상 속에 변치 않는 실재, 그 실재를 실상(實相)이라고 한다.

어느 법조인이 불명예 퇴임을 하면서 퇴임사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낙엽은 뿌리로 돌아간다.(落葉歸根) 낙엽은 지지만 낙엽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혜능의 취지를 제대로 알고, 법조인이 말한 걸까? 궁금하다.

혜능이 상주했던 남화사(南華寺)는 광동성 소관(韶關)에 위치한다. 소관시 곡강구(曲江區) 성동(城東)에서 6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조계북안(曹溪北岸), 보림산록(寶林山麓)은 영남 제일의 아름다운 곳이다. 남화사는 중국불교의 저명한 사찰이기도 하지만 중국 선종의 ‘조정(祖庭) 사찰’이다.

이 사찰은 위진남북조 시대(502년)때 창건되었다. 인도 고승 지략삼장(智葯三藏)이 처음으로 이곳에 머물렀는데, 사찰을 창건해 황제가 ‘보림사(寶林寺)’라는 사명을 하사했다.

선사는 원래 713년 광동성 신흥현 국은사에서 입멸했다. 얼마 후 법신을 남화사로 옮겨온 것이다. 제자들이 6조의 법신에 옻칠을 하고 향을 발라 관에 넣어 영구보존했다. 이후 원적 29년 후인 742년에 영조탑을 건립하고 진신상(眞身像)을 봉안했다. 혜능의 진신상을 영조탑(靈照塔)안에 모셔놓았는데, 혹여 훔쳐갈 것을 염려해 ‘육조전’안으로 옮긴 것이다. 진신상 앞에 ‘6조대감(六祖大鑑) 진공보각원명광조(眞空寶覺圓明廣照) 선사’라는 위패가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혜능과 관련해 재미난 이야기가 전한다. 쌍계사 금당(金堂)에 혜능의 정상(頂相), 즉 두골이 모셔져 있다는 것이다. 722년 두 승려가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 걸망 속에 혜능의 정상을 모시고와서 쌍계사 금당 육조정상탑에 봉안했다고 한다. 이 내용은 〈쌍계사지(雙溪寺志)〉 ‘선종육조혜능대사정상동래연기’로 전한다. 

 

혜능의 선풍 및 선종사적 위치 
혜능의 선종사적 위치는 이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혜능에 의해 열린 돈오(頓悟) 법문으로부터 위앙종·임제종·조동종·법안종·운문종 등 5가가 형성되었다. 이를 일컬어 ‘일화오엽(一花五葉)’이라 한다. 즉 ‘한 꽃에서 다섯 봉우리가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혜능의 사상에서 발단되어 5가가 발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선사상 및 선문헌이 크게 발전되었다.

둘째,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강조하였다. 혜능이 법을 펼쳤던 남화사에 가면, 혜능 사리탑(靈照塔)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보리자성은 본래 청정함이니, 단지 그 마음을 쓰기만 하면 곧 바로 성불이니라.(提自性本來淸淨 但用此心直了成佛)” 이 글은 〈육조단경〉에 있는 내용이다. 필자가 10여 년 전 사리탑에 새겨진 이 문구를 보고 전율을 느꼈다. 지금도 그 순간이 잊히지 않는다. 하나만 더 보기로 하자. “부처는 자성 가운데서 이루는 것이니 몸 밖을 향하여 구하지 말라. 자성을 모르면 곧 중생이요, 자성을 알면 곧 부처이다.” 혜능은 본 성품이 부처이므로 이 성품을 떠나 부처는 있을 수 없다(本性是佛 離性無別佛)고 하였다. 곧 청정한 자성일 때, 곧 그 자리가 부처이다. 본각(本覺)·본래성불(本來成佛)에 입각한 사상이다.

셋째, 무념(無念)·무상(無相)·무주(無住) 사상을 강조하였다. 혜능의 선사상이 담긴 〈육조단경〉은 북종 신수계를 의식하고, 남종선 자체의 입장을 확립하는 과정을 반영한다. 남종선의 독립 선언이란 바로 돈오견성(頓悟見性)과 〈금강경〉에 기초하여 반야삼매(般若三昧)를 설하며, 일체법이 무념(無念)·무상(無相)·무주(無住)임을 밝히고 있다.

〈단경〉에서 “나의 이 법문은 고래로부터 모두 무념(無念)을 세워서 핵심(宗)으로 삼고, 무상(無相)을 체(體)로 하며, 무주(無住)를 근본으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무상은 모양에 있어서 모양을 떠난 것이요, 무념이란 생각에 있어서 생각을 여읜 것이며, 무주란 사람의 본성이 저 세간에 있어서 선과 악, 미추(美醜) 등 어느 한쪽에 치우치거나 걸림이 없으며, 원수거나 친하거나 간에 서로 말로 다투거나 공격하며 속이는 등 다툼이 있을 때 공(空)으로 삼아서 앙갚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넷째, 앞의 세 번째와 관련이 깊은데, 혜능선은 반야사상을 기반으로 한다. “자성이 능히 모든 법을 포함하며, 만법이 모든 사람의 성품 속에 있기 때문에 일체가 곧 하나요, 하나가 곧 일체이니 가고 옴에 자유로워 마음자리에 막힘이 없는 것이 반야(般若)”라고 하였다. 또한 “반야는 지혜인데 일체 처소와 일체 시중에 생각 생각이 어리석지 않고, 항상 지혜로 행하는 것을 곧 반야행”이라고 한다. 선사는 반야는 부처를 여의지 않는 자성으로부터 나오며 자성이 청정한 본성만이 반야의 지혜를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다섯째, 유심정토(唯心淨土) 사상이다. 〈단경〉에서 보면 “범부들이 자성을 모르기 때문에 제 몸 속의 정토를 알지 못하고 동방이니 서방이니 하면서 찾고 있다. 깨달은 사람은 어디에 있더라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진심으로 수행코자 하는 사람은 집에 있어도 동방이 바로 청정한 곳이 되고, 청정도량인 사찰에 있으면서도 닦지 않으면 서방일지라도 혼탁한 지옥이 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혜능의 사상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이러하다. △자성청정을 기반으로 한 돈오가 강조되어 있다. △〈금강경〉에 기초해 반야바라밀을 설하고 있는데, 반야삼매(般若三昧)는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 칭하고 있으며 이들 사상의 핵심은 무념·무상·무주를 드러내고 있다. △선정과 반야의 일체를 강조한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