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2층 복도에서 걷기명상을 한다. 걷기명상의 마무리는 자연의 결정체인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는 일이다. 오늘도 짙은 남색의 바다가 뚜렷하길 바라면서 먼 산등성이 너머를 바라본다. 바다는 보이지 않고 희뿌연 하늘만 그 자리를 덮고 있다. 바다는 보이지 않지만 그 곳에 있다. 그보다 가까운 하늘과 산이 맞닿은 곳, 산등성이에는 나무들의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다. 산과 물, 나무와 함께하는 이 순간은 평화롭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 신문을 펼쳐본다. 지면을 메우고 있는 세상은 온통 탁하고 거칠기만 하다. 조금 전 고요하던 마음은 사라지고 우울해진다. 때로는 분노도 일어난다. 한 순간에 내 마음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와 있다.

우리의 마음은 때때로 기쁨에서 분노로, 분노에서 기쁨으로 왕래한다. 그러한 마음을 보면 즐거움이나 기쁨보다 불안이나 우울 쪽으로 더 가까이 가있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평화와 기쁨을 만나서 즐겁기보다 바깥세상의 즐겁지 않은 대상들로 인해 마음은 우울해진다. 사회는 화합보다 분리되어 서로 다투고, 더 많이 소유하고, 경쟁하며 이기고 승리하려고 애쓴다. 어떻게 좀 부족하고 모자라더라도 적절하게 불편함을 즐기면서 살아갈 수는 없을까? 나는 기해년을 맞이하면서 좌우명으로 소욕지족(少欲知足)’을 택했다. 나를 소중히 여기되 나를 넘어 세상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싶었다.

그런데 소욕지족을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만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이 지속되어 다가올 것에 대한 기대도, 지나간 것에 대한 후회도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순간은 과거도 미래도 없는데, 우리가 순간을 만나지 못하니 그 자리에는 과거나 미래가 들어와 자리를 메운다.

육조단경(六祖壇經)은 이렇게 말한다. “이 순간에는 새롭게 생겨나는 것도 존재하기를 멈추는 것도 없다. 지금 이 순간은 절대적인 평화이다. 여기엔 영원한 기쁨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현재에 있지 못하고 과거와 미래에 가 있으므로 현재의 기쁨을 놓친다. 그 원인은 우리가 현재를 만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을 만나려면 마음에 틈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 마치 마룻바닥의 널빤지 사이에 틈이 있으면 먼지나 모래가 들어가듯이 마음에 틈이 생기면 그 사이로 잡념이 끼어든다. 그 틈으로 힘들었던 과거가 끼어들거나 힘들지 않을 미래가 끼어든다. 어떠한 감정이든 그것은 현재를 방해한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안정되지 못하고 불안하다.

우리의 마음은 평소에도 불안하고 우울하며 긴장상태를 보임으로써 쉽게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낸다. 때로는 슬픔에 빠지거나 죄책감 등의 부정적 감정상태가 된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부정적 감정의 편향성(Negativity Bias)이라고 한다. 불쾌한 경험은 유쾌한 경험에 비해 쉽게 기억되고 오래 저장된다. 또한 우리의 마음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환상을 만들어 낸다.

이는 마음이 어느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끝없이 방황하면서 괴로움을 낳기 때문이다. 부정적 감정을 긍정적으로 바꾸거나 방황하는 마음을 내려놓기 위해서는 명상수행이 대안이 될 수 있다.

다시 창가로 간다. 눈을 들어 머리 위를 바라보니 하늘은 더 맑고 파랗다. 내 마음은 금방 평화롭고 고요하다. 이처럼 평화의 상태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은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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