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서의 걷기’와 봉정암 가는 길

리처드롱(사진오른쪽)과 그의 작품.제공=김원숙 미술학자

곤함을 달래며 일어난 한밤중의 산사는 어둡고 추웠다. 시계는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손톱 같은 달이 검은 하늘에 걸려 있는데, 극락보전 앞을 지나칠 때는 잠도 제대로 깨지 못하고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면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지금부터 새벽까지 그리고 다시 해거름에 이를 때까지 봉정암에 가야 한다. 우연한 기회에 도반의 소개로 계획을 잡긴 했으나 며칠간 여러 바쁜 약속들 때문에 백담사 가는 전날 밤까지도 밀린 일을 처리해야 했다.

반복적인 걷기로 남기는 흔적
자기와의 대화와도 맞닿아
고요의 숨결 느끼는 수행현장

성철 큰스님은 자신을 친견하러 오는 불자들에게 삼천배를 권했다. “나를 만나러 오지 말고 부처님을 만나러 가라”고 말씀했지만 그래도 자신을 만나고 싶다면 부처님에게 삼천배를 하라는 뜻으로 전해진다. 선잠을 깨지 못하고 봉정암으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만나러 가는 짧지 않은 순례길에 나서는 내 마음에는 문득 성철 스님의 그 말씀이 떠올랐다. 이런저런 바쁜 일을 구실로 평소에 가벼운 운동조차 하지 않았던 내게는 이번 일정이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백담사에서 봉정암을 향해서 가는 길은 가벼운 마음으로 나선 이들에게는 예쁘고 아름다운 길이다. 겨울이 찾아온 산의 나무와 숲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지만, 맑은 공기와 유려하고 고요한 산자락과 계곡을 보면서 걷는 길은 마음을 신선하게 한다. 간혹 새소리와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적막을 깨울 뿐이다.

한 번 절하고 세 걸음 내딛으며 가는 삼보일배의 순례길은 단순한 걷기와는 달리 기도와 서원의 길이다. 가장 낮은 자세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일어나 걷는 세 걸음은 우선 자신을 보는 것이고, 그 다음은 천지를 보는 것이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생을 보는 깨달음의 단계라고 한다. 그 새벽, 인적 끊긴 산길에 삼보일배를 하며 가는데, 어쩌면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각자의 길을 함께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걷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도대체 이 자발적 고행의 이유는 무엇일까?

수많은 철학자, 시인 그리고 수행자들은 걸었다. 프랑스 샤를빌에 가면 ‘바람구두를 신은 인간’로 불렸던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걷는 동상을 만날 수 있으며, ‘망치를 든 철학자’로 불리는 프리드리히 니체도 스위스 동부 알프스 산맥의 실스마리아를 하루 열 시간이나 걷고 또 걸으며 짜라투스트라와 영원회귀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헤겔이 걸었던 하이델베르크의 철학자의 길, 칸트가 날마다 산책했다는 쾨니히스베르크의 철학자의 길, 키에르케고르가 걸었던 코펜하겐의 철학자의 길, 그리고 니시다 기타로가 걸었던 교토의 ‘철학의 길’ 까지 세계 곳곳에는 철학자들이 걸었던 길이 아직 남아있다.

현대 미술의 한 장르인 대지 미술(Land Art) 또는 어스 워크(Earth Work)가 있다. 이 미술장르는 1960년대 말부터 영국, 독일, 미국 등지에서 성행했던 미술의 한 경향으로, 반문명적인 문화현상과 더불어 ‘물질’로서의 예술에 저항하며 자연과의 유대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특징으로 한다. 대지미술가들은 푸른 잔디가 덮인 나직한 들판과 구릉지, 바위가 드문드문 놓인 황무지, 사막, 절벽, 숲 등을 화가의 캔버스인 것처럼 활용하여 다양한 예술적 작업을 한다. 대지 미술가들에게 ‘박물관은 인류 문명의 납골당’에 다름 아니다. 대지 예술가들은 사각형의 하얀 공간(White Cube)에 감금된 미술관의 공간을 거부하고 자연과 풍경 그 자체를 붓과 물감으로 삼아 자신들의 예술 정신을 펼치기를 원했다.

대지 미술을 주된 작업으로 하는 작가 중에 리차드 롱(Richard Long, 1945-)이 있다. 그는 ‘걷기’를 하나의 예술적 행위로 하여 작품 세계를 구축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하라 사막과 리오그란데, 프랑스와 스페인의 해안, 볼리비아와 페루, 알프스 산맥과 안데스 산맥까지 그리고 일본의 후지산과 인도의 마하략슈미 봉우리에 이르기까지 그는 세계 구석구석을 누비며 걸었다.

한 인터뷰에서 롱은 이렇게 말했다. “자연은 선사시대 동굴벽화부터 20세기 풍경사진까지 예술가에 의해 항상 기록되어 왔다. 나도 자연을 작품의 소재로 삼고 싶었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고 싶었다. 나는 잔디와 물 같은 자연물을 사용하여 밖에서 작업하였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걷기에 관한 작품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의 의도는 새로운 예술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역시 새로운 걷는 방법이었다. 다시 말해서 예술로서 걷는 것이다.”(벤 터브넬 엮음,<리차드 롱의 진술과 인터뷰>, 런던, 2007년)

‘걸음으로 생긴 선 (A line made by walking)’은 한 시골 마을의 잔디밭 위를 리처드 롱이 수없이 걸어서 생긴 자취를 작품으로 한 것이다. 1967년 6월, 롱은 런던 워털루 역에서 기차를 타고 남동쪽으로 약 20마일 즈음 떨어진 월트셔 들판 근처에 내렸다. 풀이 무성한 이 들판을 가로질러 왔다 갔다 하며 걸었다. 그러자 반복적인 걷기로 인해 들판의 풀들이 한 쪽으로 눕게 되고 일시적인 라인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난 후 롱은 이 라인을 햇빛에 의해 뚜렷이 드러나 보이는 각도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는 이 기록 사진 아래 여백에 직접 붉은색 연필로 ‘A LINE MADE BY WALKING’이라고 적어 넣었다. 현재 이 사진작품은 런던 테이트 갤러리와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롱의 ‘걷기’ 작업에는 시간, 거리, 지리, 측정이라는 컨셉이 포함되어 있으며, 주로 설치하기, 텍스트 제작, 사진 찍기, 드로잉하기로 구성된다. 실제로 그는 걸으면서 땅 위에 지표를 세우거나 꽃을 따거나 돌맹이나 나무조각 등을 재배열한다. 그러나 대규모적인 기념비적 작업을 감행한 로버트 스미드슨이나 마이클 헤이저 등 미국의 대지미술가들에 비하면, 롱의 작업에서 그 풍경 개입의 정도는 지극히 미미하고 일시적이며 소박하다. 그는 풍경에 가능한 최소한의 개입을 하고자 하였다. 인간의 기본행위인 두 발로 걷기를 통해 자연에 잠시 머물러 곧 사라질 흔적만을 남기고, 사진으로 담을 뿐이다.

리차드 롱은 항상 스스로를 조각가로 소개하며, 자신의 ‘걷기’ 작업을 조각이라고 주장한다. 원래 조각은 조형예술의 한 분야로 3차원의 공간 속에 구체적인 물질로 구현된 입체로서, 강하고 견고한 양감의 구성체를 의미한다. 기존조각과는 달리 롱의 걷기 작업은 상품으로서의 작품을 거부하고, 완성된 작품 자체보다 아이디어나 과정을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제작태도와 고정된 물질적인 형태를 갖추지 않은 조형예술을 추구한다는 점, 그리고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자연과 융화된 풍경을 연출한다는 점에서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으로 설명될 수 있다. 롱에게 걷기는 문화적인 다양성의 표현이자, 다른 문화들끼리의 연결성을 가지도록 만드는 행위이다. 이는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보다 깊은 차원의 이해이며 자신의 고유 위치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를 만들어 낸다.

롱의 단순하고 반복적인 걷기는 대지 위에 하나의 선을 남긴다. 롱의 사진작품에는 어떠한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으나, 걷기로 만들어진 선은 육체적 현전과 신체적 행위의 흔적이다. 이 선은 자연의 과정인 자기 재생 및 자기 소멸을 포함한 시적 은유인 ‘길’로서 이해될 수 있다. 걸으면서 생긴 자취가 길인데, 이것이 리처드 롱에게는 바로 예술작품이 되기도 하나, 정작 그의 예술은 남겨진 사진작업보다는 걷는 행위를 통한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 그 자체다. 사실상 리처드 롱의 작품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자연 속에서의 신체의 움직임, 그리고 아주 특별한 차원으로 연결되는 고독으로 특징 지워진다. 그의 작업이 근본적으로 프로세스아트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람은 길을 걸어간다. 길이 없다면 풀숲을 헤쳐서 가고 물을 건너서 간다. 한 사람이 걸어간 흔적은 조그만 오솔길이 되고, 그 흔적은 또 다른 사람의 발길을 인도해서 마침내 큰 길이 되기도 한다. 새는 날개를 저어 허공을 날아가지만 사람은 땅 위를 걸어간다. 날갯 짓이 허공에 자취를 남길 리는 없지만, 사람이 걸어간 곳은 흔적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길이다. 길에는 그 곳을 걸어간 이들의 사연이 있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쩌면 이전에 걸어간 사람들의 한숨과 눈물, 피와 땀을 같이 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들의 기쁨과 반가움을 같이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태양이 하늘 높이 떠서 골짜기 구석구석을 환히 비추는 시간, 봉정암 가는 길에는 행인들이 제법 많아졌다. 사람들이 해탈고개 지나 ‘깔딱 고개’라고 하는 그 숨이 턱에 차오르는 가파른 돌벼랑을 올라설 무렵, 산봉우리들이 온통 석양빛에 스며 곱게 물들 즈음 그 끝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탑이 서 있었다.

봉정암 순례길은 옛 스승이 이르신 ‘입 안의 말이 적고, 마음에 생각이 적고, 배 속에 밥이 적어야하는’ 수행길이다. 한 번 절하고 세 걸음 나아가는 이 힘든 여정은 길 끝에 있을 그 무엇과 상관없이 그 자체가 수행이며 작은 두타행(頭陀行)이다.

리차드 롱은 걷는다는 자신의 예술행위를 ‘땅에서 지나가는 것이며 삶을 통과하는 것’이라 했던가. 가도 가도 절벽이었던 삶. 태연히 죽기도 어렵고 태연히 살기도 어려운, 삶과 죽음 사이에서 태연자약하기가 좀체 쉽지 않은 숙제처럼 다가오는 때가 있다. 살다가 길을 잃어 막막하고 슬플 때, 참회와 기도의 길에서 천천히 자신의 호흡을 마주하고 사색하며 저마다의 침묵 속에서 깨달음을 발견한다.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상관없이, 길을 걸어가는 일은 하나의 수행이고 자기와의 대화이며 명상이다. 긴 치열함이 있는 뒤 맑은 고요의 숨결로 감사히 엎드리는 순간, 깨달음은 바로 지금 이 자리임을! 그 길이 다하는 지점에서 무언가를 만날 것으로 기대했지만, 정작 깨달음이란 푸른 새벽과 낮 그리고 황혼이 내리는 가파른 순례길 내내 한 발 한발 내딛는 매 순간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캄캄한 돌 길 위에도 엎드려 절할 자리는 있었다.

걷는다는 것은 길 위에 있다는 의미이고, 길은 생명의 몸부림이 지나간 흔적이다. 걷는다는 것은 덧없음의 고통을 벗어나 고즈넉한 기적을 만나는 일이고, 세상의 모든 길은 본질적으로 깊은 내면으로 이어진다. 눈물 나는 어느 날, 봉정암으로의 아득한 그 길에 또 다시 서 있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가도 가도 본래 자리요.

이르고 이르러도 출발한 그 자리이다.

행행본처 (行行本處) 지지발처(至至發處)

의상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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