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괘불탱화와 빌 비올라

빌 비올라의 작품. 제공=김원숙 미술학자

몇 년 전, 한·중·일 미학자들의 국제학회가 한국서 열렸다. 그 프로그램 중 일부로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을 함께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곳에서 우리 모두를 압도하는 전시를 보았다. 그것은 바로 ‘문답(問答, dialog)’이라는 제목의 설치 작업이었다.

천정이 높은 전시 공간 내부의 한쪽 벽에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가져 온 전체 1,222×491.8cm, 화면 1,127×456.2cm, 무게 84.5kg에 해당하는 거대한 규모의 보물 제1350호 통도사석가여래괘불탱(通度寺釋迦如來掛佛幀)이 걸려있고, 건너편 벽에는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의 영상작업이 서로 마주 보도록 설치되었는데 그 규모의 장대함에 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였다.

시각 예술의 파격성 돋보여
생사 경지 ‘물’ 모티브 표현
종교의 영감 극적으로 반영

‘괘(掛)’는 ‘건다’는 뜻으로, 괘불탱은 벽에 고정할 수 없는 불화를 실외에서 사용할 때 기둥이나 지주 같은 것에 걸어 놓고 예불 드리는 일종의 걸개 그림을 뜻한다. 통도사 석가여래 괘불탱은 삼베바탕에 채색(麻本彩色) 작품으로, 제작연대는 1767년(조선 영조43)에 두훈(?薰)을 수화원으로 하여 성징(性澄), 윤행(玧幸), 통익(通益), 수성(守性), 정안(?安), 쾌정(快?), 탈윤(脫閏), 청습(淸習), 지환(智還), 지열(志悅), 민초(旻初), 봉정(奉正), 수일(守一) 등 총 14명의 화승이 동참하여 10개월간 제작한 공동작업이다. 괘불탱은 한국의 고유한 불교미술 양식으로 동아시아 국가인 중국, 일본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우나 티벳, 몽골 일부 지역에서 일부 사례가 있다.

미국 태생의 작가 빌 비올라(Bill Viola, 1951~)는 비디오 아트의 지위를 현대 미술의 확고한 한 분야로 자리매김하게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초창기의 비디오 아트 작품은 전위적인 예술 정신과 더불어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시도가 많아 일반 대중에게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비올라는 영상 매체의 기술적 특성을 활용하여 새로운 시간적, 조형적 질서를 창조하면서도 시각 예술의 고전적 전통에 근거한 절제되고 이상화된 화면구성을 추구함으로써 주목 받는 작가다.

‘문답’에 전시된 비올라의 영상 ‘트리스탄의 승천’과 ‘불의 여인’은 ‘트리스탄 프로젝트(Tristan Project)’라는 작품군 중 하나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는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관한 비극으로서 원래 켈트족 전설로 구전되다가 12세기 이후 유럽에서 문학 작품으로 정착되었다. 그 이후 이 이야기는 지역마다 시대마다 약간씩 변형되어 다양한 형태로 번안되었다. 13세기 초 쓰여진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Gottfried von Straßburg)의 판본이 가장 유명한데 그 작품성을 널리 인정받고 있다.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이 판본을 기초로 제작되었다. 비올라는 무대 감독 피터 셀라스의 의뢰를 받아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배경 영상을 만들었다. 이후 그는 거기에 사용된 네 시간 분량의 영상을 편집하여 여러 개의 개별적인 비디오 아트 작품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트리스탄 프로젝트이다.

비디오 작품 ‘트리스탄의 승천’은 어둠 속에 한 주검이 놓인 장면으로 시작된다. 석관 위에 놓인 시신은 깊은 물 속과 같이 알 수 없는 정적에 휩싸여 있다. 작은 물줄기가 시신에서 피어 오르는가 싶더니 점차 그 물줄기는 커지고 거꾸로 치솟아 오르며 폭포수가 되어 검고 어두운 화면을 가득히 채운다. 솟구치는 물줄기 속에서 시신은 천천히 위로 떠오른다. 활처럼 휘어진 허리와 축 늘어진 사지는 닿을 수 없는 희망, 얻을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안타까운 절규처럼 다가온다. 이윽고 트리스탄의 시신은 어두운 하늘 저 위로 까마득히 사라지고, 다시 어두운 적막으로 쌓인 심연과 같은 공간이다.

이어지는 ‘불의 여인’에서는 한 여인의 뒷모습이 거대한 화염 앞에 서 있다. 오래도록 불길을 응시하던 여인은 마침내 결심한 듯 혹은 탄식하듯 두 팔을 한껏 벌리고 뒤로 쓰러진다. 여인은 땅을 딛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물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쓰러진 여인은 수면 아래로 빠져 들어가고 검은 물결이 출렁댄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이글거리던 화염은 점차 불어나는 물에 이지러지고 일렁이는 파란 물결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비올라의 작품에는 기독교 신비주의, 이슬람교의 수피즘 그리고 동양의 선불교 등 동서양의 영적 전통이 반영되어 있다. “자아는 해안이 없는 바다와 같다. 그것을 응시하노라면 이 세상과 후생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12세기 안달루시아의 수피 이븐 아라비(Ibn Arabi, 1165~1240)의 말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다고 그는 말했다.

비올라의 비디오는 지극히 느린 속도로 재생되기 때문에 얼핏 보면 스틸 사진처럼 보이는데 잠시 지켜보면 이것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동영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통상적인 촬영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촬영하여 정상적인 속도로 재생할 때 이러한 효과가 일어난다. 극히 느리게 움직이는 영상은 비올라 작품의 특징이다.

전위적인 표현기법을 추구하였던 초기 비디오 예술가들과 달리 비올라는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성격을 지닌 예술 작품에서 자신의 길을 찾았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의 종교화, 매너리스트 회화 등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비디오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하여 그것을 재해석했다. 그는 르네상스의 종교화에서 얻은 영감을 토대로 등장인물이 극단적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러한 표현 방법을 통해서 그는 현대 미술의 주요한 흐름 중 하나인 감정이 절제된 추상적, 개념적 성향을 버리고 인간의 내면적 감정과 초월적 영성을 담으려 한다. 한 인터뷰에서 비올라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 감정의 아주 작은 부분조차도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무한에 가까운 해상도가 필요합니다. 확대하면 할수록 우리는 거기에서 더 많은 것을 발견합니다. 감정은 매우 강하게 우리를 서로 결속시키는 요소입니다. 상당수의 명상 수행에서 점차적으로 호흡을 느리게 할 때 ‘마음 챙김(Mindfulness)’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비올라의 작업에서 슬로우 모션이라는 조형언어는 느린 호흡을 통해서 내면의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명상과 같다.

상당수의 비올라 작품에는 물의 이미지가 주된 소재로 사용된다. 여섯 살 되던 해에 그는 호수에 빠져 거의 죽을 뻔하다가 삼촌에게 구조된 경험이 있었다. 그 때, 수면 아래에서 본 광경들에서 특이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 또는 액체의 이미지는 비올라의 초기 작품들에서 종종 등장하다가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후에 제작된 작품들에서 물의 이미지는 보다 초월적이고 상징적인 색채로 드러난다. 그의 작품에서 물은 단순한 풍경의 요소가 아니라 경건한 영적 힘으로 제시된다. 비올라에게 물은 삶과 죽음 두 세계 간의 경계이며 동시에 탄생과 거듭남의 의미를 가진 모티프이다. 비올라에게 어린 시절의 익사체험은 일종의 ‘침례’의식과 유사한 것처럼 여겨진다. 기독교적 의미의 침례가 물 속에 몸을 담금으로써 죄를 씻고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 정화의식이라면, 비올라에게 침례는 일상적 체험의 경계를 넘어 초월적 세계에 대한 신비적 체험에로 이끄는 경계였다.

부인이자 예술적 동반자인 키라 페로브(Kira Perov)는 비올라의 작품에 대해서 “그의 여정은 삶, 죽음, 탄생, 부활 등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주제를 향해 있다”고 말했다. 삶의 상처와 번민이 끝나는 곳이 죽음이 있다면, 죽음은 새로운 탄생 즉 부활을 위한 여정이 된다. ‘트리스탄의 승천’에서 도피안(到彼岸)의 이미지를 본다. 현실의 삶에서 폭포수는 높은 곳에서 아래로 쏟아지고, 던져진 시신은 땅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작품에 등장하는 엄청한 물줄기는 모두 위로 날아오르고 석관 위에 놓여 있던 트리스탄의 시신은 물줄기와 함께 점차 하늘로 이끌려 올라간다. ‘불의 여인’에서는 이글거리는 정념과 어두운 번뇌가 공존한다. 한 여인이 심연과 같은 어둠 속으로 쓰러져 사라지는 모습이 앞부분에 나오지만 영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이글거리는 화염과 일렁이는 물결이다. 검은 물결은 점차 불꽃을 집어 삼키고 모든 것이 적멸(寂滅)로 돌아간다.

통도사 석기여래 괘불탱 뒷면 후배지 왼쪽 하단에는 모두 7수의 게송이 적혀있다. 그 중 <점안의식(點眼儀式)> ‘향화청(香華請) 가영(歌詠)’을 적은 게송이다.

법신성해초삼계(法身性海超三界)

법신의 성품 바다 삼계를 초월하니

묘용하방구오근(妙用何妨具五根)

미묘한 작용 5근을 갖춤에 무슨 방해 있으랴

담적응연상각료(湛寂凝然常覺了)

담적하고 응연하여 항상 또렷이 깨어있어

천상인간총점은(天上人間總霑恩)

천상이나 인간 모두에게 은혜 입히네

‘트리스탄의 승천’과 ‘불의 여인’의 영상이 차례로 비춰지는 건너편에서 장엄한 부처가 연꽃 한 가지를 손에 들고 조용히 바라보고 계시다. 석가모니 부처가 영취산에서 설법을 하실 때 하늘에서 꽃 비가 쏟아졌다 한다. 이에 부처께서는 아무 말씀 없이 꽃 가지 하나를 드셨다. 그 때에 거기 모인 대중은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였으나 가섭존자 만이 홀로 미소지었다. 18세기 불화와 21세기 영상작업이 함께 전시된 이 압도적 광경을 앞에 두고 관람객은 각자의 마음 속에서 갖가지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게 된다. 이 특별한 공간에서 초월자의 고요한 미소와 인간존재의 비극성 사이 어디쯤에서, 지극한 고통 속에서 비로소 얻어지는 또렷한 깨달음마냥 불꽃 가운데 피어나는 연꽃의 향기에 얼핏 스친 듯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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