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설법(對機說法)과 임기응변(臨機應變)

 

잘 가르치는 일만큼 어려운 게 있을까?

새해가 밝아 해맞이를 나간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삼월도 중순에 접어들었다. 세월이 유독 나에게만 빨리 흐를 리 없지만, 그래도 삼월이 오는 일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따뜻하고 화사한 봄이 미소를 지으며 매화며 벚꽃, 목련이 지천으로 넘치는 철이 왔는데 뭐가 탐탁치 않냐고 물을 것이다. 왜 그런 화신(花信)이 반갑지 않겠는가? 다만 대학에서 강의가 시작되어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니, 그게 나로서는 큰 고역이다.

침묵의 지혜 보인 부처님
대기설법의 필요성 나와
우리네 교육의 지향점

살펴보면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교육이 부담인 사람과 교육이 체질인 사람이 그것이다. 강의 준비를 착실히 하는 것이야 양자가 다를 리 없다. 다만 그것을 강의실에서 전할 때 느끼는 반응이 다르다.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을 학생들과 공유하는 데 이것저것 신경을 쓰다보면 내가 강의를 하는 게 아니라 강의가 나를 끌고나간다는 기분을 버릴 길이 없다. 그러니 부담인데, 다 그런가 하면 강의가 즐거운 소풍인 사람도 있다. 편안하게 머릿속 지식이 입에서 술술 풀리고, 강의를 마치고도 조금도 피로를 느끼지 못하는 이들을 보면 정말 부럽다. “절망 없는 강의는 없다”고 누군가 말했는데, 내가 그런 자괴감의 소유자니 삼월은 내게 큰 괴로움의 달이 되어 버렸다.

지난 월요일 저녁에 나는 오랜만에 강사가 아닌 학생이 되었다. 남해에 내려와 알게 된 대학 후배 김봉윤 군의 인문학 강의를 듣게 된 것이다. 남해 토박이로 누구보다 남해의 역사에 큰 관심을 두고 있을뿐더러 고향의 발전에 열성인 친구다. 고려 팔만대장경 전체가 남해에서 판각되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그는, 여러 근거를 가지고 네 차례의 강의를 통해 설파했다. 그런 신념에 어울리게 그는 ‘고려대장경 판각성지보존회’ 부회장직도 맡고 있다. 나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참가하지 못하다가 마지막 강의인지라 놓칠 수 없어 읍내에 있는 아담한 강의 장소를 찾았다.

김봉윤 군이 강의하는 방식은 나와는 딴판이었다. 그의 강의는 듣기에 편안했고 유머와 해학을 적절하게 반죽해 넣어, 마치 입에서 살살 녹는 잘 빚은 인절미 같았다. 공부가 깊은 탓이겠지만, 들어보니 그는 타고난 강사였다. 강의를 지배했지 지배당하지 않았다. 오랜만의 강의를 기분 좋게 듣고 난 뒤 몇몇 지인들과 자리를 옮겨 늦은 밤까지 유쾌한 술자리를 가졌다.

감히 우리 같은 속인들에 견줄 수는 없겠지만, 부처님과 공자도 훌륭한 교사이자 강사였다. 그처럼 많은 제자를 두었고, 그 가르침이 지금까지도 세계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이유 중 하나가 두 분 모두 틀에 박힌 교육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백과사전이나 국어사전을 들려주는 식의 교육을 했다면 두 분 모두 가르침의 빗물이 지구 전체를 촉촉이 적시지는 못했을 것이다.

두 분이 가르치는 방식은 어떻게 진부한 틀을 깬 것일까? 여기서 그 가르침의 큰 그릇에 담긴 내용을 형용하기는 불가능하니, 가르쳤던 방식을 통해 실체를 더듬어보고자 한다.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 꿸 수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중생을 가르쳐 진리를 깨치게 만드는 설법을 일컫는 말로 대표적인 것이 차제설법(次第說法)과 대기설법이다. 차제설법은 쉬운 것부터 차근차근 이해시켜 상대의 의욕과 관심도를 높인 뒤 어려운 진리를 일깨우는 설법을 말한다. 대기설법은 상대의 근기(根機, 지적 수준이나 심리적 자세의 정도)에 맞춰 같은 진리라고 해도 다른 방식으로 들려주어 결국에는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게 만드는 설법이다. 우리 속담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는데, 부처님은 서울(진리)에 닿기 위해 ‘모’만 아니라 하늘과 바다, 언덕과 강물을 넘어 우주와 땅속까지도 휘젓고 파헤치는 기기묘묘한 방식을 다 차용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꾸밀 때 ‘장광설(長廣舌)’이라 휘갑한 것이 아닐까?

처음 부처님이 대각(大覺)을 이루셨을 때 그 진리를 대중에게 알리기를 주저하셨다고 한다. 이 어려운 진리를 과연 제대로 전할 수 있을지 또 대중이 이해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악귀의 무리들이 방해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범천왕(梵天王)의 권청(勸請)을 받은 뒤 마음을 바꿔 설법을 시작하시게 되었다.

고해를 사는 중생들에게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는 도구로 제시한 궁극적인 가르침이 사성제(四聖諦)인데, 오랜 시간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에게 처음부터 기름진 음식을 주면 오히려 건강을 해치듯이 무턱대고 그들에게 이 진리를 말할 수는 없었다. 약을 준다는 게 병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단계를 밟아, 즉 차체설법을 통해 진리 세계의 문을 여셨다. 부처님은 먼저 가난한 사람들에게 옷과 음식을 베풀어 구제하라는 시론(施論)부터 말씀하셨다. 즉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주는 보시의 정신을 권한 것이다. 사람이면 당연히 해야 할 덕행이니 수긍하지 못할 까닭이 없다. 이어 생물을 죽이지 말고, 간음을 범하지 말며, 거짓말을 입에 올리지 말고,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며, 정신을 놓게 만드는 술을 마시지 말라는 오계(五戒)를 가르쳐 계론(戒論)을 펼치셨다.

다음으로 생천론(生天論)을 갈파해 선업을 쌓으면 죽어 극락에 가고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논리를 가르쳤다. 이렇게 길고긴 방편의 골목길을 다 지나게 한 뒤에야 비로소 사성제의 깊은 이치를 전하셨다. 이런 설법이라면 최하근기의 사람이라고 해도 진리의 깨침에 도달하지 못할 이가 없을 것이다. 더러운 물을 정수하려면 먼저 불순물부터 없애야 하듯이 마음속에 똬리를 튼 선입견이나 오해, 악심(惡心)부터 걸러내는 길을 부처님은 택하셨다.

대기설법이란 진리를 들으려는 사람의 자질이나 소양이 어느 정도인지 먼저 살펴보고, 그 수준에 알맞은 설명 방식을 찾아 말씀하시는 것을 일컫는다. 또는 그 사람이 무슨 마음의 병이 있는지 어떤 근심에 빠져있는지 파악하고, 거기에 대응해 진리의 문으로 이끄는 방식이기도 하다. 남편이 죽어 슬픔에 잠긴 여인에게 아기의 탄생을 축원하는 덕담을 하면 설득은 고사하고 분노만 자아낼 뿐이다.

경전을 읽노라면 때로 부처님이 어떤 문제에 대해 아예 침묵하거나 동떨어져 보이는 대답을 하셨던 경우가 종종 눈에 띈다. 왜 대답이 없는지 엉뚱한 대답을 늘어놓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부처님이 나를 속인다고 의심할 때도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지혜가 옅어서도 아니고 대답할 답안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목이 말라 죽겠다면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는 시내나 우물로 가는 길을 알려야 한다. 갈증을 풀고 난 뒤 배를 불리고 마음을 살찌울 양식을 전해야 진리의 고갱이를 몸과 마음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한량없는 지혜와 끝없는 중생 사랑은 이런 차분하면서도 세심하며 배려 깊은 마음바탕에서 나왔다. 그래서 오랜 가뭄으로 메마른 농토가 장맛비를 한달음에 빨아들이듯 많은 제자들은 깨달음을 얻었고, 스승의 설법을 이은 제자들은 또 다른 제자와 신도에게 깨달음을 전했던 것이다.

티끌 지우게 하려면 거울 주어라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방식도 부처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자에게도 제자가 무수히 많았는데, 다 잘난 놈만 입학하는 것은 아니었다. 배우려는 열의는 같을지라도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능력은 제각각이었다. 이런 제자들에게 너무 수준이 높아 상징적이거나 판에 박힌 대답만 뇌까린다면 알아듣는 사람은 소수에 그칠 게 뻔하다. 이러면 교육의 취지에서 한참 멀어진다. 나는 공자가 실천한 교육 방식을 ‘임기응변’의 교육이라고 부른다.

공자가 가장 목청을 세워 함양하라고 내세운 덕성은 ‘인(仁)’이었다. 인은 우리말로 ‘어질다’는 뜻인데, 이게 말이 쉽지 무엇이 어진 것인지 설명하거나 실천하기가 만만치 않다. 어질다는 것이 바람직한 덕행이기는 하지만, 부지런하다거나 똑똑하다거나 효자다 라는 말과는 달리 실체가 확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논어〉를 보면 제자들은 이 ‘인’에 대해 가장 많이 묻고 있다. 수십 차례도 더 될 것이다.

그 질문에 공자가 천편일률적인 대답을 했다면 구태여 〈논어〉에 그 많은 질문이 다 수록될 까닭이 없다. 수십 차례가 넘는다는 말은 그 답변이 다 달랐기 때문이다. 공자는 제자가 이해할 수 있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을 찾아 대답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안연(顔淵)이 어짊에 대해 묻자 공자는 “자신의 욕망을 이겨내고 예〈공공의 이익〉를 되살리는 것을 어짊이라 한다.(克己復禮 爲仁)……”고 대답했다. 중궁(仲弓)이 묻자 공자는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도 베풀지 말아야 하느니라.(己所不欲 勿施於人)……”고 대답했다. 번지(樊遲)가 묻자 공자는 정말 간단하게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다.(愛人)”고 대답했다. 같은 질문에 한 대답이 이렇게 다르다. 왜 그럴까? 진리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은 딱히 강단이 아니더라도 남을 가르치면서 산다. 부모는 자식을 가르쳐야 하고, 상사는 부하를 가르쳐야 하며, 선배는 후배를 가르쳐야 한다.(물론 그 반대도 성립한다.) 그럴 때 나는 어떤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까? 내 말이 옳으니 무조건 따르라며 윽박지르고 있는가? 아니면 부처님과 공자처럼 들을 사람의 마음자세와 처지, 능력을 헤아려 정말 귀에 와서 꽂히는, 마음을 울리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가? 새로운 학기 강의를 시작하면서 두 분의 교육이 더욱 가슴속을 켜켜이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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