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믿음 편 11

얼마 전 어느 지인의 부고 소식을 듣고 스님 한 분과 조문을 간 적이 있다. 그런데 스님은 장례식장으로 바로 가지 않고 고인이 입원한 병실로 들어갔다. 병실에는 휴대폰에서 나오는 ‘나무아미타불’ 독송을 들으면서 고인이 누워있었다. 흔히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가는 데도 얼마 동안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 시간 동안 고인에게 염불을 들려주고 싶은 유족의 마음을 병원 측에서 이해하고 영안실로 모시는 시간을 늦춘 것이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고인의 얼굴이 무척 편안해보였다.

다소 낯선 경험이었지만, 불자들이라면 이런 방식을 매우 선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는 유족들의 마음에 커다란 위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명 고인이 아미타불이 계시는 정토에 왕생할 것이라고 믿을 것이다. 아미타 정토의 실재 여부를 떠나 그 믿음으로 남은 이들의 아픈 상처는 치유된다. 종교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 아미타신앙에 의하면 누구든 ‘아미타불’ 명호를 열 번만 불러도 극락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에 전형적인 타력신앙이다. 그렇다면 아미타불은 누구이며, 그분이 사는 정토는 어떤 곳이기에 불자들은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것일까?

<무량수경>에는 아미타불이 본래 한 나라의 임금이었는데, 세자재왕여래(世自在王如來)의 설법을 듣고 출가하여 법장비구(法藏比丘)가 된 사연을 전하고 있다. 법장비구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이 원(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 서원을 48가지로 구체화한 것이 유명한 48대원이다. 법장비구는 5겁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 동안 수행과 보살행을 통해서 이 원을 성취하고, 석가모니 붓다보다 무려 10겁 전에 성불했다고 한다. 그 48가지 서원이 모두 이루어진 정토가 바로 극락세계다.

아미타(阿彌陀)는 아미타유스(amit?yus) 또는 아미타바(amit?bha)를 소리 나는 대로 옳긴 것이다. 아미타유스는 ‘무량수불(無量壽佛)’, 즉 시간적으로 영원한 부처라는 뜻이며 아미타바는‘ 무량광불(無量光佛)’, 즉 공간적으로 영원한 광명을 비추는 부처라는 뜻이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을 무량수전, 혹은 무량광전이라 부른다. 이 아미타불이 사는 극락세계는 서쪽으로 10만억 국토를 지나야 있다고 해서 서방정토, 혹은 서방극락세계라고 한다.

아미타불이 계시는 극락정토는 땅이 금과 은 그리고 옥으로 이루어져 있고, 여러 가지 훌륭한 것들이 한량없이 많으며, 광명이 찬란해서 아름답고 깨끗하기가 비길 데 없다고 한다. 그야말로 나고 죽는 고통이 소멸된 영원한 생명과 광명, 즐거움이 넘치는 극락의 세계다.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에 아주 적합한 구조로 되어있다. 이런 멋진 곳에 갈 수 있는 조건은 오직 하나 있다. 바로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 즉 간절한 마음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염하면, 아미타불이 극락세계로 데리고 간다고 한다. 장례식장에서 석가모니불보다 아미타불 소리가 많이 들리는 것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서방정토 신앙의 핵심은 모든 것을 내가 아니라 아미타불께 맡기는 데 있다. 기쁜 일, 슬픈 일 모두 아미타불께 맡기고 오직 간절한 마음으로 정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와 달리 아미타불과 서방정토가 저 멀리 서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에 있다는 해석도 있다. 유심정토(唯心淨土), 자성미타(自性彌陀)가 바로 이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면 그대로 정토요, 아미타불은 저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자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자성이 곧 아미타불이라면 ‘나무아미타불’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영원한 생명과 광명의 자리에 돌아가겠다는 자기고백이다. 이는 곧 자력신앙과 다름이 없다. 하나의 신앙이 자력과 타력 둘을 모두 포용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맞는 것을 선택해서 신행의 지침으로 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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