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왕실의 원찰, 승가사

승가사는 세종 등극의 숨은 비애가 서린 사찰이다. 궁중의 원찰로 많은 지원도 받았지만 그만큼 부침도 많았다.

세종의 승가사 약사기도
조선 제4대 임금 세종.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존경하여 여론 조사에서 늘 상위권에 오르는 인물이다. 그가 보여준 치세를 보면 태평성대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현대에도 만 원의 지폐에 그려진 인물이어서 사람들의 애정이 식을 줄 모른다.

그런 세종은 처음부터 임금이 될 위치가 아니었다. 셋째인 까닭에 멀어도 한참 먼 위치였다. 그런데 첫째 양녕의 일탈이 문제가 되어 세자에서 물러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둘째 효령이 있었다. 태종은 둘째와 셋째를 놓고 고민하다 셋째를 세자로 택했다. 술 한 잔 못하는 효령보다 사신이 왔을 때 술 한 잔 할 수 있는 셋째가 적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왕위에 오르게 되자 부인 심씨도 중전이 되었다. 아버지 심온 대감 역시 기뻤다. 일찍이 여러 판서를 맡아 업무의 탁월함을 인정받고 있었다.

결국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인 영의정에 올랐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왕실과의 혼인으로 명문가 반열에 올랐던 심씨 가문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1418년(태종 18년) 세종은 22세에 등극하였다. 태종은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줬지만 군사와 정사의 중요한 사안은 세종을 거쳐 자신에게 품신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병조에서 순찰경비 업무만을 품신하고 그 밖의 사안에 대하여는 품신하지 않았다. 태종은 진노하여 의금부로 하여금 주동자를 가려내도록 명령하였다. 9월 병조판서를 비롯하여 참판, 참의, 정랑, 그리고 좌랑 등 병조의 관리를 모두 체포하여 취조하였다. 하지만 단순한 사무착오로 판명되어 석방되었다.

그러나 11월 우의정 박은의 간계로 옥사가 재연되었다. 병조참판 강상인과 심온의 동생 심정이 주모자로 몰려 처형되었다. 이미 9월에 명나라 사신으로 갔던 심온은 수모자(首謀者)로 지목되어 귀국 후 수원 땅에서 사약을 받았다.

가족들의 피해도 컸다. 소헌왕후의 어머니 순흥 안씨는 직첩을 삭탈당하고 천안의 관비로 배속되었다. 그 후 의정부의 식모로 옮겨지는 등 수모가 컸다. 집안사람들 역시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박은 일당은 소헌왕후의 폐출을 주청(主請)하였다. 태종은 평민의 경우도 출가하면 법에 연좌되지 않는데 하물며 국모인 중전을 어찌 폐출할 수 있느냐 하며 주청을 엄하게 물리쳤다. 세종의 간곡한 만류도 있었고, 중전이 이미 세 왕자를 낳아 기르고 있었던 것도 작용하였다.

참변을 겪은 탓인지 왕후는 화병이 생겼다. 내전 어의를 보내 좋은 약을 써가며 치료하였지만 차도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부처님께 기도하고자 했다. 그런데 배불을 한 자신이 사찰을 가기가 민망하였다. 군주가 사찰을 찾았을 경우 유생들의 반대가 빗발칠 것도 고민이었다. 세종은 신임하는 신하를 보내 기도를 올렸다.

세종 4년(1422) 5월 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 연사종(延嗣宗)을 승가사에 보내어 약사기도를 올렸다. 이때 우의정 정탁(鄭擢)을 흥천사에 보내 그곳에서도 약사기도를 하도록 하였고, 이화영(李和英)을 개경사에 보내어 관음기도를 하였다.

다급한 세종의 상황을 보는 듯하다. 이런 기도는 8월에도 이어졌다. 찬성사(贊成事) 맹사성(孟思誠)을 승가사로 보내 부처님에게 기도하였다. 이런 기도로 왕후의 화병이 조금씩 회복되면서 세종을 기쁘게 하였다. 12년(1430) 중전이 완쾌되자 다시 연사종을 승가사로 보내 수륙재를 거행하였다.

중전의 완쾌에 기뻐한 세종은 승가사를 배려하였다. 7종의 불교종파를 선교양종으로 통합할 때 승가사는 양주 지역에서 개경사, 회암사, 그리고 진관사와 함께 선종 18개 사찰에 속하게 하였다.

이것은 서울과 지방에 수행자들이 지낼 만한 절 36개소를 가려서 양종에 분속시킬 때였으므로 남다른 배려라고 할 수 있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인연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재정적 지원도 이루어졌다. 승가사 사원전이 60결이었는데 90결을 더해 150결로 늘렸다. 거주 할 수 있는 수행자의 수를 70명으로 하였다. 그 후에도 세종은 18년(1436) 승가사에 독서당을 설치하여 집현전 학사들이 독서하는 곳으로 삼아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의 승가사 기우제
세종은 즉위하던 1418년 11월 사원 노비를 혁거하여 관청의 노비로 삼았다. 의정부, 대간, 육조에서 일제히 사사노비는 물론 승려들이 상전하는 법손노비(法孫奴婢)까지 혁거하여 속공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사사노비의 혁거만을 받아들여 모든 사사노비와 개경사, 연경사, 대자암 같은 왕실 원찰의 노비를 혁거하였다.

이런 조치로 사원의 노동력이 상실되어 사원전을 경작하지 못하면서 수행자들이 절을 버리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7종의 종단을 선교 양종으로 폐합하였는데 조계종, 천태종, 총지종을 합쳐 선종으로 하고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시흥종을 합쳐 교종으로 하였다. 이때 선종에 18개 사찰과 4,250결의 토지, 1,970명의 수행자 그리고 중심사찰을 흥천사로 하였다. 교종은 18개 사찰과 3,700결의 토지, 1,800명의 수행자 그리고 중심사찰을 흥덕사로 하였다.

이런 조치는 각 종파의 성격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행해졌으며, 사원이 대폭 정리되고 수많은 승려가 환속하고 막대한 사원의 토지가 강제 속공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세종은 왕실의 불교신앙을 지탱해 온 내불당을 폐지하였다. 세종 15년 정월 내불당이 혁파하고 불상을 흥천사로 이운하였다. 그밖에도 세종은 연소자의 출가를 금지하여 수행 인력의 부족을 가져왔고, 철폐된 사원의 불상과 종을 녹여서 병기로 만들었다. 국행불사의 설행을 줄여서 비용을 절약한 것 등 사소한 것을 합하면 조선의 여느 왕보다 불교를 강력하게 억압한 군주였다.

그런 세종도 불가항력이 있었다. 자연재해였다. 세종 25년(1443) 7월 큰 가뭄이 들었다. 하늘을 바라보고 비오기를 바라는 방법 밖에 없었다. 임금은 승가사를 비롯한 재경 사찰에 승려를 시켜 비가 내릴 때까지 기도하게 하였다.

기우제를 지내 본 세종은 31년 이후 승도가 기우하여 만약 비가 내리면 기우제 설행에 대한 보답을 정례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왕은 기우법회에 파견된 조정의 감찰까지도 승도와 함께 불전에 배례하는 것을 정례로 삼았다.

정조는 위기 모면, 승가사는 재건 기회
조선의 배불정책은 왕조 내내 계속되었다. 가끔 숭불의 군주가 나타나긴 했지만 잠시였다. 그러나 질병과 가뭄 등 국가적인 어려움에 유교는 의지처가 되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개인적으로 불교에 친근감을 갖는 군주가 있었다. 그러나 대신과 사대부들의 반대에 드러내기 어려웠다. 정조 대왕이 그러했다.

정조 4년(1780) 9월 청나라에 간 사신에게 황제가 불상을 보내며 장수를 기원하였다. 청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정책적으로 불교를 존숭하였기 때문에 불상을 선물로 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문제는 조선의 배불의 분위기였다. 사신들도 그런 사정을 아는지라 받으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사양하였다. 그렇지만 이 일로 인해 청나라와의 외교관계에 좋지 않은 영향이 있을까를 염려하여 할 수 없이 받아왔다.

불상을 갖고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불교를 배척하던 조선 조정에 의견이 분분하였다. 논의가 2개월이나 계속되었다. 급기야 11월 유생들의 상소는 청나라에서 들어온 불상은 사특하고 더러운 물건이므로 배척할 것을 요구할 정도였다. 결국 불상은 대궐로 오지 못하고 묘향산 절에 두는 것으로서 일단락되었다.

그런 불상이 정조 8년 12월 대신들이 정사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다시 거론되었다. 불상은 청 황제가 동궁에게 하사한 것이고 이미 받은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둘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궐 내에는 봉안할 장소가 없으니 가까운 사찰에다 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렇게 하는 것은 결코 숭불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정조는 불상의 새로운 봉안처로 승가사를 언급하였다. 당시 승가사는 황폐해져서 겨우 승려 5-6인 만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정조는 승가사를 고쳐 봉안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였다. 신하들도 그렇게 하면 불교를 숭상하는 모습은 아니라고 동조하였다.

이런 전후 사정으로 짐작하건대 처음 묘향산에 두었다가 청나라가 왕실에 준 것임을 지적하자 다시 대궐로 옮기는 것을 고려한 것 같다. 그런데 대신들과 유생들의 반대가 문제였다. 숭불의 군주로 비춰지기 싫은 정조는 궁궐과 멀지 않은 곳에 봉안하면서 외교적 결례도 무마하고 대신들과 유생들의 반대도 무마할 곳을 찾았다. 그곳이 승가사였다. 그런 인연으로 불상이 봉안된 승가사는 승려들의 노동을 면제 받았다.

정조가 승가사를 거론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였다. 조선 전기 승가사는 불암사, 진관사, 삼막사와 함께 왕실의 4대 기도도량으로 지정되었다.

왕들이 행차하여 기도하면서 왕실과는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거의 폐사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승가사가 회복된 것은 정조 4년(1780)에 성월(城月)의 중수부터였다. 그 후 몇 차례 중건을 거치면서 승려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정조 8년 청나라에서 보낸 불상을 봉안하고 승려들의 노역을 면제하는 혜택도 재건에 큰 계기가 되었다.

정조 이후에도 승가사는 고종 때 명성왕후와 임상궁의 후원으로 중건되었다고 하니 승가사는 여러모로 조선 왕실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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