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상 시인(상)

내 평생에서 가슴에 가장 짙게 남아있는 이를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꼽을 사람이 있다. 시인 구상(1919~2004) 선생이다. 나는 아직도 구 선생과의 인연을 최고의 자랑거리로 여긴다. 그토록 소중한 인연을 사형수가 맺어줬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구상 선생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노벨문학상 본심 후보에 2번 오른 시인이다. 그의 작품은 세계 여러 언어로 번역됐다. 또한 프랑스 문인협회에서 선정한 세계 200대 시인으로, 우리 시단 최고의 명사다.

사형수가 시인 소개해
가장 기억에 남는 인연
종교는 서로가 달라도
교화활동 함께한 친구


나는 그를
성자(聖者)’라고 부르고 싶다. 그 어떤 수식도 그에게는 모자랄 것이다. 구 선생은 
떠났지만 그의 작품들은 남았다.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그와의 이야기를 고인의 작품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이 시대 다시없을 성자, 구상에 대한 그리움은 깊어만 간다.


이윽고 저 장밋빛 황혼처럼
나의 이승의 노을에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마저도
, 이 저녁엔
소년 적 해질 무렵이면 찾으시던
어머니의 그 부름
, 그 모습처럼
두렵기는커녕 도리어 기다려진다

          - '어느 비 개인 석양중에서

 

어느 눈 오는 날, 나는 경기도 안성에 있는 천주교 공원묘지를 찾았다. 구상 선생이 묻힌 곳이다. 열댓 번도 더 간 묘소지만 백설이 덮여있으니 찾기가 어려웠다. 선생의 묘소에 섰다. 꽂혀있던 꽃은 많이 시들어있었다. 새로운 꽃으로 바꾸고 포도주를 한 잔 올렸다. 스님인지라 세속의 사람에게 절을 하지 않아야 하지만 고인에게는 스스럼없이 참배했다. 합장(合葬)한 선생의 부인에게도 한 잔 올렸다.

그때 떠오른 시 한 편이어느 비 개인 석양이다. 투병 중인 지금의 나처럼 구 선생이 건강이 많이 나쁠 때 쓴 작품이다. 구 선생은 죽음이 기다려진다고 했었다. 두 시간 가까이 묘소 앞에서 생각에 잠겼던 것 같다. 고인을 향해 넋두리를 하면서.

선생님은 참 편안하게 누워있네요. 나도 이젠 그만 쉬어야 되겠소. 이 몸뚱이와 별리할 때가 된 것 같군요.”

언젠가 3.1절 기념행사에 구상 선생과 함께 참석한 적이 있었다. 계단으로 2층에 올라가려는데 다리가 불편한 구 선생이 힘들어했다. 부축을 받아도 힘겨워하는 모습을 본 나는선생님, 건강하셔야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구 선생은 스님, 저는 지금 죽어도 억울할 것이 없습니다고 했다.

나는 그 소리가 참 좋았다. 당시 나는 스님이면서도 당장 죽는다면 억울할 게 있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구 선생은 나보다 20살쯤 많았고 건강도 안 좋았다. 나는 한창 젊을 때였다.

아직도 그때 그 말을 서예로 쓴 액자가 내 방 한 가운데에 놓여있다.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새기며 사는 말이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건 당신이 산 삶이 후회 없이 잘 살아왔다는 뜻이었다. 구 선생은 끝까지 그런 삶을 살다 갔다.

구상 선생과의 인연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형수 이원식 씨 구명운동을 할 때였다. 이 씨는 나의 구명운동으로 감형되어 출소했다. 그는 출소 후 자신의 절친인 구 선생에게 나를 스승이라고 소개했다. 그때 나는 구 선생과 처음 만났고, 많은 나이 차이에도 서로 친구처럼 지냈다.

내가 재소자들을 위한 자선 전시회를 열면 구 선생은 빠지는 일 없이 모두 와줬다. 선생은 소품을 내기도 했고 작품을 사주기도 했다. 동시에 재소자 교화를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며 나를 도왔다.

사형수를 계기로 만난 인연은 또 다른 사형수로 인해 더욱 깊어졌다. 나는 한창 억울한 사형수들의 구명운동을 위해 진정서를 받으러 다녔다. 죄가 없어 반드시 집에 돌아갈 것이란 의미의필귀가(必歸家)’를 염주에 새긴 사형수가 있었다. 사형수 최재만 씨였다. 나는 최 씨 탄원서에 서명을 받기 위해 지인들을 찾아다녔다. 구 선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보통은 일반 재소자가 아닌 사형수 탄원은 서명을 꺼리는데, 선생은 흔쾌히 마음을 냈다. 망설임 없이 서명한 구 선생이 고마웠다.

나는 구 선생이 당사자인 최 씨를 직접 만나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구 선생은 서울구치소에서 최 씨와 처음 만났다. 정중히 모자를 벗고 최 씨를 향해 합장했다. 이 뿐만 아니라 사형수인 최 씨를 부처님같이 대했다. 그 모습을 본 내 입에서 전혀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이 사람 양자 삼으시면 어떻습니까. 아드님 두 분도 앞서 갔는데

구 선생은 선천적으로 폐결핵을 앓았다. 당시 폐결핵은 불치병이어서 폐결핵 환자는 시한부 인생이나 다름없었다. 폐병은 전염성이 있어서 구 선생은 결혼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선생은 결혼해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다. 시집간 딸은 무탈했지만 같이 산 아들들은 아니었다. 선생은 자신의 병을 옮겨 아들 둘을 먼저 보냈다.

구상 선생은 사형수와 부자지간이 되라는 내 말을 가볍게 듣지 않았다.

양아들로 삼으면 친자식같이 사랑해야 하는데 앞으로 조금 더 신경을 써야 되겠네요.”

구 선생은 그렇게 사형수의 양아버지가 됐다. 부자의 연을 맺은 뒤로, 구 선생은 나와 함께 최 씨의 구명을 위해 그야말로 물심양면으로 애를 썼다. 내가 더욱 선생을 존경할 수밖에 없도록 말이다. <계속>
 

구상 시인이 잠든 천주교 공원묘지를 찾은 삼중 스님이 꽃을 꽂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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