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하면서 자유로운 미얀마 출가

마하시선원에서 수행하면서 수계의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 수계를 받는 사람은 한국에서 온 재가 수행자들이었다. 사진은 미얀마 출가 수계의식의 진행 모습.

마하시 선원에 입방한지 일곱 번째 날(2011년 12월 20일)과 열여덟 번째 날(12월 31일)의 〈수행일지〉는 출가와 수계의식에 관한 기록이다.

싱가포르 출신 스님은 항상 즐거운 표정이며 역동적이다. 다른 사람의 사소한 일이라도 이것저것 관여하며 도와주기를 좋아한다. 75세인 말레이시아 출신 스님과도 친하다. 같은 중국계로서 싱가포르 스님이 말레이시아 스님을 늘 곁에서 돌봐준다. 말레이시아 스님은 자신의 구족계 수계증을 보여주며 자랑스러워한다.

8호실의 젊은 한국 스님이 엊그제 연달아 입방한 한국인 두 명이 출가하기로 했다고 한다. 스님이 두 신입 요기(선방 수행자)에게 출가를 권유하여 모두 출가를 결심했다. 스님이 더 고무되어 있는 모습이다. 수계 의식 일정을 알려 주며 나에게도 도움을 미리 부탁한다. 스님은 점심 공양 후 두 출가 지원자에게 삭발을 해주고 왔다고 기뻐하며 싱가포르 스님에게 설명했다.

함께 수행한 韓人 2명 출가
정해진 의식에 맞춰 구족계
病 유무·도피성 여부 묻지만
결혼 사실에 대해선 안 물어

미얀마 불교, 단기출가 가능
단기가 장기출가 이어지기도

수계의식은 11일 이후로 잡혀졌다. 수계의식이 있는 날 선원에 있는 다른 한국 요기들도 모두 참관하고 싶어 했다. 11시 30분 계단(戒壇, Sima)에서 하는 출가 의식은 모두에게 알려져 있어 다들 들떠있다. 여기서는 출가의식을 하면 친지들이 모여 축하해 준다. 가족이 모두 절에 와서 삭발하는 모습과 수계의식을 참관한 후 스님들께 보시하고 사찰을 떠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출가의식을 집행한 삼사칠증(三師七證) 스님들에게 가족들이 준비해 온 여러 종류의 보시물을 정성껏 올린다. 하지만 한국인 두 명은 여기에 가족이 없으므로 나와 다른 한국인들이 대신 하기로 했다.

점심 공양을 마친 후 여러 사람들이 새로운 스님 탄생의 장면을 볼 것으로 기대하며 무리지어 갔다. 1차적인 장소는 수행점검을 하는 원장 스님의 사무실이다. 화요일과 목요일에 남녀 외국인 요기들이 모두 모이는 정기 수행점검(Interview)과 일요일의 정기법회(Dhamma Talk)도 이 공간에서 이루어 진다.

먼저 사미계 수계의식부터 거행되었다. 사미 지원자가 세 벌의 가사와 발우를 미리 준비해 와야 한다. 이외에도 면도기, 바늘, 벌레 여과기, 혁대가 필요하다. 이를 출가를 위한 또는 수계의식을 위한 여덟 가지 필수품이라 한다. 여기서는 원장 스님의 정인이 가사 등을 구해 와서 건네 주었다.

한국 스님은 나더러 의사소통을 위해 중간에서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먼저 수계를 받을 두 지원자는 불전에 삼배를 올리고 다시 선원장이자 계사인 원장 스님에게 삼배를 올렸다. 가사를 전해 받은 두 지원자는 현장에서 바로 승복으로 갈아입고 계사 스님에게 합장 삼배를 올리고 두 손으로 또 다른 여벌의 가사를 받들어 올렸다. 이에 계사 스님이 선창하는 경문을 따라 다음과 같이 세 번 복창하도록 했다.

“큰 스님이시여, 청하옵건데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제 손에 있는 가사로 저를 사미로 만들어서, 삼계 윤회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소서.”

두 사미 지원자는 가사를 발우 위에 올려놓고 다시 계사 스님에게 삼배를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큰 스님이시여, 청하옵건데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큰 스님의) 손에 있는 가사로 저를 사미로 만들어서, 삼계 윤회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소서”를 세 번 복창 한 후 다시 삼배를 올린다.

다시 두 사미 지원자는 계사 스님 앞에 무릎을 꿇고 사미계를 줄 것을 청한다. “큰 스님이시여, 청하옵건데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사미계를 주옵소서. 또한 삼계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리고 계사 스님의 선창에 따라 삼귀의와 사미계를 목숨을 마칠 때까지 지키겠다는 맹세를 한다. 다시 사미계 수계와 삼귀의 사미십계를 따라 하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계정혜 삼학을 닦을 것을 설하면 수계자는 “예, 대덕이시여(ma Bhante)”라고 대답한 후 계사 스님께 삼배를 드린다. 이것으로 사미계 수계의식은 끝났다.

다음으로 구족계인 비구계 수계를 위해 선원장 스님을 따라 독립 건물로 지어진 계단으로 이동하였다. 아직도 계단을 ‘시마(Sma)’라고 하여 빠알리로 지칭하고 있다. 완전한 수계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미리 삼사칠증(三師七證)의 스님들이 불전 앞에 빙 둘러 앉아 기다리고 있다. 삼사칠증은 구족계를 받을 때 세 명의 스승과 일곱 스님 증인으로, 삼사는 계사·갈마사·교수사를 말하여, 칠증은 덕이 높은 일곱 스님을 가리킨다. 그 자리의 앞에 두 사미승은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리고 두 사미승 옆에 앉아 삼사칠증 스님이 계문을 합송하면 다시 우리말 계문으로 바꾸어 따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먼저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핫또 삼마 삼붓닷사”를 세 번 낭송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의미는 “세존이시여, 아라한이시여,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신 분께 절하옵니다”이다. 초기경전에서부터 현재 인도나 동남아 불교도들이 함께하는 자리라면 항상 이 예경 문구로부터 시작한다.

먼저 교수사 스님이 나서 두 사미에게 구족계를 청하는 “대덕이시여, 부디 저의 계사가 되어 주십시오”라고 따라하게 한다. 선원장 스님이 계사로 정해지고 이어 교수사 스님이 발우와 가사에 대해 사미의 소유 문제를 점검한다. 다시 두 사미승을 약 5m정도 일어서 물러나게 한다.

이러한 후에 교수사는 두 사미승이 구족계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는지를 구두로 심사한다. 문둥병이나 간질 그리고 심한 피부병 등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 등이다. 그리고 부모가 출가를 허락했는지 여부와 함께 빚을 지거나 어떤 책무로부터 도피한 출가가 아닌지를 묻는다. 마찬가지로 20살이라는 나이도 정확하게 따진다. 만나이로 19살에 3달 또는 5달이 지난 나이를 20살로 보는데, 이는 원래 율장에서 규정되었는지 아니면 미얀마 방식의 나이 계산법인지는 아직 확인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의 두 출가 지원자는 모두 50대 후반 아니면 60대 초반이며, 또한 한국에 가족이 있는 기혼이다. 그렇지만 결혼 여부를 확인하지는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결혼한 사람이 구족계를 받으려면 이혼 여부가 증명되어야 한다. 계속해서 이런 저런 질의응답을 마친 후에 다시금 계사 스님의 법명을 확인하도록 한 후 비구 구족계 230계의 수계의식을 마쳤다. 원래 상좌부 율은 227계인데 3개 조항이 추가된 것이다. 같은 초기불교의 율장이지만 한국 〈사분율〉의 비구계는 250계이다.

구족계 수계의식을 정해진 법식대로 모두 마치고 마지막으로 보시금을 올렸다. 출가를 허락하여 가족에 큰 복을 입게 하여 가족이 계사 스님들께 보시를 올린다는 것이다. 미리 수계자가 준비한 것을 내가 대신하여 무릎을 꿇고서 삼사칠증의 스님들에게 차례차례 올리는 것으로 마쳤다. 어떤 스님은 보시금을 가사를 살짝 펼쳐 받고, 선원장 스님의 경우는 부채로 받았다. 어떤 스님이든지 손으로는 직접 받지 않았다. 계단 밖으로 나와 한국 스님 그리고 미얀마 몇 스님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것으로 오늘 한국출신의 상좌불교 출가자가 탄생한 것이다. 두 스님은 각각 소마와 레바타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후 우리는 두 요기를 법명으로 불렀다. 선방에서도 앞자리에 앉아 좌선하였고 또한 공양을 위한 줄을 서는데도 법랍에 따라 스님들의 마지막에 서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공양청에서도 재가자와 달리 스님들 탁자에서 공양을 들게 되었다. 두 스님 모두 승복을 입은 데에 대단히 자부심 어린 모습이다. 이제까지 수계의식을 참관한 적도 없었다. 다만 율장에서 수계의식을 보기만 했던 것을 이곳에서 직접 참여해 볼 수 있었다. 아주 귀중한 체험으로 지금도 생생하다. 

다음 날 출가한 스님들에 소감이 어떠하냐고 물었다. 그 중 한 스님은 “승복이 매우 부담스럽다”라고 겸연쩍게 한마디만 하고 더 이야기를 못했다. 곁에는 한국의 노스님이 흐뭇한 표정으로 새로운 두 스님을 챙겨준다. 노스님은 어제 출가했지만 오늘은 새해이므로 이미 1년하고도 하루의 법랍이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다른 한 스님은 한국에서 컴퓨터 업계에 종사한다고 했다. 3개월 쉴 수 있는 기회가 있어 미얀마에 와서 출가 수행한다고 하는데 찬찬히 보니 이전에도 미얀마를 자주 내왕하며 출가하지 않았는가 짐작된다. 가사장삼을 수하는데도 익숙하고 법복을 입으니 이전부터 스님 같은 티가 물씬 난다. 행동거지나 표정에 있어서도 오래 전부터 출가생활 해 온 스님처럼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아침, 저녁으로 가장 열심히 수행한다. 선방에 들어서면 반드시 예배 또한 잊지 않는다. 좌선과 경행에 대단히 진지하다. 정해진 시간 이외에도 선방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주어진 시간을 아껴서 무언가 이루려하는 간절함이 보인다.

교직에 있다가 방학을 이용해 와서 출가한 레바따 스님 또한 진지하다. 이 스님은 쉬는 시간에도 경행처에서 홀로 열심히 좌선하기도 한다. 하지만 좌선보다는 경행이 공부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마하시 방식의 걷기 동작에 공력을 들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또한 이 스님은 교사 출신답게 선방과 경행처에서의 공부뿐만이 아니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예사롭지 않게 관심을 표명한다. 그리고 관여하려 한다. 서울에서 교직생활을 한다는데 불교신앙 또한 말뚝신심처럼 보인다.

미얀마에서는 원하는 대로 여러 번에 걸쳐 출가와 환속이 가능하다. 또한 단기출가가 완전한 출가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사미로 짧게는 3일에서 일주일 또는 3개월 안거가 끝나는 사미의 단기출가가 20세의 구족계 출가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처럼 출가자 급감을 걱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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