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무연자비(無緣慈悲)

‘무연자비(無緣慈悲)’는 아무런 연고나 관련성이 없이 베푸는 자비(보시, 희사, 사랑 등)를 뜻한다.

우리는 대개 어떤 인연 관계나 친분 관계가 있는 사람들, 즉 연고가 있는 특정인들에게 선심(善心)이나 자비를 베푼다. 그러나 무연자비는 그런 관계성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 아무런 연고나 인연 관계가 없이 베푸는 자비, 목적성이나 대가성이 없는 자비로서 불특정 다수 즉 일체중생들에게 베푸는 자비라고 할 수 있다. 그 어떤 조건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자비가 무연자비(無緣慈悲)이다.

불교의 자비, 가톨릭과 기독교의 사랑, 인도 바가바드 기타의 박티(Bhakti -信愛)는 모두 순수한 무연자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인간으로서 이런 자비나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능할까? 한 예로 어머니가 자식에게 쏟는 마음, 정성, 사랑, 보살핌은 무연자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대가성은 없다. 아무런 전제 조건이나 바람이 없다. 무조건적인 사랑, 아가페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어머니들은 모두가 그랬고, 요즘 시대의 엄마들도 대부분 그럴 것이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본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쯤에서 내가 13살 때 어미 새를 생포했던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6월에서 7월이 되면 새가 새끼를 부화한다. 새끼들이 ‘짹짹’거리면서 막 날려고 할 때였다. ‘어미 새, 새끼 새’ 할 것 없이 생포하기 위하여 몇 시간을 쫓아다니기도 하는데, 시골에는 ‘할미새’라고 하얀색 새가 많이 있었다.

나는 새끼보다는 어미 새를 생포하기 위하여 새끼를 이용했다. 작전(作戰)은 새끼 새를 30cm 깊이의 토롱 속에 넣어 두고는 방안에서 문틈으로 지켜보다가 어미가 토롱 속으로 들어가면 생포할 작정이었다. 어미는 ‘짹짹’거리고 울어대는 새끼를 구하기 위하여 수없이 토롱 속으로 들락거렸다. 그 때마다 총알보다도 더 빠르게 나가서 구멍을 막았는데, 1~2초 사이에 놓치곤 했다. 이러기를 수차례, 결국 어미 새는 내 손에 잡혔다. 새도 새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는 생각에 어린 나이었지만 무언가 감동을 느꼈다.

〈열왕기〉를 보면 두 여자가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신이 낳은 아이라고 우기다가 솔로몬을 찾아가 판정을 의뢰하는 이야기가 있다. 솔로몬왕은 두 여자를 불러 놓고 그 앞에서 아이를 둘로 나누어서 각각 주라고 명령한다. ‘아이를 둘로 나누어서 준다.’ 참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명령이다. 병사가 칼로 내려치려는 순간, 그 중 한 여인이 아이 위에 엎드렸다. 솔로몬 왕은 ’이 아이를 이 여자에게 주어라‘고 명령한다. 그 여자가 곧 아이의 엄마였다. 참으로 솔로몬의 명석한 지혜였다.

불교가 종교적 실천 원리로서 강조하는 것이 ‘자비와 사랑’이다. 이것은 종교의 중요한 역할과 가치이기도 하다. 특히 무연자비는 중생에 대한 무한한 무조건적인 사랑이고, 아카페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자애경〉에는 “모든 중생이 안락하기를... 모든 중생이 평안하기를...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이라는 문구에 이어 “살아있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행복하라. 움직이는 것이든 움직이지 않는 것이든, 길거나 짧거나 크거나 작거나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중략) 이미 태어나 있는 것이든 앞으로 태어날 그 모든 것들까지 행복하라. 행복하라”는 간절한 구절이 있다.

이것은 자비의 대상이 인간뿐만이 아니고 모든 생명, 더 나아가서는 나무나 식물에까지 적용시킨 것이다. 오늘날 지구가 온난화, 쓰레기 등으로 심각한 환경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인간의 무지와 욕망이 만들어 낸 최악의 결과물이다.

부처님이 모든 중생에게 차별 없이 베푸는 자비는 절대 평등의 자비, 무연자비이다. 무연자비는 친분 관계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모두 똑같이 베푸는 자비로서, 치열한 경쟁, 무한경쟁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궁극의 진리라고 할 수 있다.

〈화엄경〉 십회향품에는 구도자가 해야 할 과제로서 보살행(자비)을 강조하고 있는데, 중생이 육체를 달라고 하면 육체를 주고, 목숨을 달라고 하면 목숨까지도 주라고 설하고 있다. 목숨까지 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분쟁, 다툼은 정지되고 평화가 찾아오게 되지 않을까? 차별 없는 무한한 자비, 순수한 자비에 대한 상징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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