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응천 교수 2009년 닝보博서
통일신라 추정 아미타불상 발견
중국, 남송시대 조성 작품 고수
최근 전시서 ‘통일신라’로 정정
“韓불상이 中건너간 사례 인정”

중국서 발견된 통일신라불상. 남송시대 조성으로 중국은 추정했지만, 최응천 교수의 연구가 이를 바꿨다.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동국대박물관장)는 2009년 3월 중국과 일본학자들과 함께 중국 저강성 지역 공동연구조사를 떠났다.

마지막 일정에 최응천 교수는 닝보(寧波)시 외곽에 자리한 닝보박물관을 찾았다. 그곳에서 최응천 교수는 중국 불상과는 달리 어딘가 모르게 낯익은 아미타불상을 만났다. 화려한 광배, 균형 잡힌 대좌와 잔잔한 미소의 상호는 우리네 불상이었다, 하지만 박물관은 불상의 조성연대를 남송시대로 평가하고 있었다.

해당 불상은 1982년 6월 닝보시 천봉탑의 지궁(地宮)을 발굴하던 중 출토된 것으로 불상을 봉안한 은제 불전에 남송 소흥 14년(1144)에 제작했다는 명문이 발견됐다. 이런 이유로 박물관은 남송 작품으로 추정한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최응천 교수는 ‘장보고 시대 통일신라 금속공예의 양상과 특성’이라는 논고를 2010년 발표했다. 그는 통일신라기 해상교류 지점으로서 중국 닝보를 소개하며 자신이 발견했던 박물관의 통일신라불상에 대해서도 설명해 놓았다.

당시 최응천 교수의 논고에 따르면 해당 불상은 오른손을 가슴 위로 올리고, 왼손은 아래로 내린 통일신라 금동불상의 전형적인 수인을 취하고 있으며 전형적인 통일신라 우드야나(優鎭王)식 불상 양식을 갖췄다. 광배에는 백색 진주를 군데군데 감장(嵌裝)해 장식성을 더욱 높였다.

그는 “균형 잡힌 불신과 볼륨감 넘친 얼굴 표현은 물론이고 광배와 대좌까지 완벽하게 남아있다. 광배에 장식된 화려한 진주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당시로써도 최고의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 제작된 최고의 수작”이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불상은 어떻게 중국으로 갈 수 있었까. 최응천 교수는 이후 기고한 칼럼 등을 통해서도 이 문제들을 천착했다. 그는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불상이 교류 차원에서 보내졌던 것이 천봉탑이 중건되던 시기에 중국 불상과 함께 매납 △천봉탑이 건립될 당시에 넣어졌던 우리의 불상을 중건 당시에 다시 봉안 등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최응천 교수는 “당시 동아시아 해상 교류 거점이었던 닝보의 불교 사원이었던 천봉탑 지궁 안에 넣어진 불전의 주인공으로 봉안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며 “비록 한 점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일방적으로 중국 불상의 영향을 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한반도의 불상도 중국에 전해주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자료”라고 봤다.

이 같은 논고와 칼럼들은 당시 언론들을 통해 소개됐고, 이후 중국 닝보박물관에 해당 불상이 전시관에서 사라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던 중 10년이 지난 지난해 11월 항저우 저장성 박물관서 열린 ‘오대십육국시대의 불교금동조상전’에 다시 출품된 것이 확인됐다. 최응천 교수에 따르면 해당 불상의 조성연대는 기존 남송에서 ‘통일신라시기(668~901)’로 정정됐다.

동북공정 등을 통해 자신들의 역사를 부각했던 중국 학계에서 한국 학자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 같이 조성시기를 정정한 것은 매우 드문 사례로 평가된다.

통일신라 조성을 주장한 최응천 교수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우리 불상의 잘못된 조성 시기를 바로잡았다는 데 학자로서 보람을 느낀다. 매우 뿌듯하고 감회가 새롭다”면서 “중국불상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양식이 특이했고, 중국학계가 바뀐 것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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