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고려 혜거국사와 망월사

망월사는 조선시대 대중신앙의 중요한 역할을 한 진언집을 펴낸 사찰이었다. 이후 한국불교 결사를 이끌어 낸 터전이 됐다.

망월사 서쪽 편 기슭에 혜거탑(慧炬塔)이 있다. 이 탑의 주인공은 조선시대 양식으로 보아 조선시대 인물로 여겨졌다. 그렇게 생각한 데에는 10세기 경기도 갈양사(葛陽寺)에 있던 혜거국사(惠居國師)의 존재도 한 몫 하였다. 갈양사는 지금 용주사의 옛 이름이다.

2017년 10월 천 년의 비밀이 벗겨졌다. 서울 도봉서원(道峯書院) 하층 발굴현장에서 영국사 혜거국사 비 일부가 발굴된 것이다. 비편은 길이 62㎝, 폭 52㎝, 두께 20㎝ 정도였다. 발굴된 비편에 새겨진 글자는 281개인데 256자 정도가 판독할 수 있었다. 이 비편의 발굴로 영국사의 정확한 위치와 건립 시기를 알 수 있었고, 다른 동명이인과 혼돈도 사라졌다.

선·교 갈등 해소한 혜거국사
영국사 폐사 후 망월사 안치
대중 교화 사찰로 발돋움

국사의 휘는 혜거(慧炬)이고 자는 홍소(弘炤)이며 속성은 노씨(盧氏)이다. 고려 태조(太祖)가 후삼국을 통일할 즈음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비린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출가하여 송나라로 유학하였다. 법안 문익(法眼文益)에게 법을 배울 때 도안(道安)과 그의 제자 혜원(慧遠)에 비길 정도로 덕이 높았다. 귀국한 후 광종(光宗)이 선종과 교종의 갈등을 통합하려 할 때 지혜를 내어 왕으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혜거국사는 말년에 영국사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멀지않은 곳에 망월사를 중창하였다. 비편이 이곳에서 발굴된 것으로 보아 입적 후 부도와 비가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영국사는 조선 세종 때 진관사의 경내가 좁고 물이 더러워 수륙재를 옮기려 한 곳이다. 그 무렵의 관료이며 불자였던 김수온(1410-1481)이 영국사를 노래한 시가 있다.

골짜기 물은 졸졸졸 길가로 흐르는데(澗水潺湲瀉路隅)

행인이 가리키나니 스님들 머무는 곳이라네(行人指點是僧區)

수풀 헤치고 객이 이르니 가을은 저물려 하고(披悲 客到欲秋暮)

면벽 수행하던 선사에 햇살이 비끼네(面壁禪趺斜日威)

푸른 바위 반쯤 솟아 우러를 만하고(翠石半天高可仰)

큰 강은 바다로 이어져 아득히 보이네(大江連海遠堪漿)

삼생의 일 아득하여 아는 이 없으니(三生事杳無人識)

불전을 다시 짓는다 해도 오히려 기억할 수 있을까(佛殿重營尙記無)

이 무렵까지 존재했던 영국사는 폐사되어 도봉서원이 되었다. 1573년(선조 6)에 남언경(南彦經)이 양주 목사로 부임하였다. 평소 흠모하던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서원 건립을 계획하였다. 1574년 9월 부제학 유희춘(柳希春) 등이 서원의 사액을 청하였다. 선조는 다른 곳과 중첩되는 점과 도성과 가까운 것을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림들의 청원으로 마침내 ‘도봉’이라는 사액이 내려지면서 영국사의 전지 외에도 호남의 면세지 100여 결이 지급되었다. 이후에도 조광조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경제 지원이 이루어졌다. 이후 도봉서원은 300여 년간 서울·경기 지역 선비들의 주요 교유처가 되었다.

김수온의 사후 도봉서원 건립까지 90여 년이다. 이 사이 영국사가 폐사되었고, 비는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져 땅에 묻혔다. 부도 역시 수습할 수 없을 만큼 훼손되었을 것이다. 국사를 흠모하던 대중은 사리를 모실 곳을 찾았다. 그곳이 망월사였다. 그런 까닭에 지금의 부도는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민중 아우른 망월사 진언집

조선조 토지와 노비를 몰수당한 사원은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여러 차례 종파가 축소되어 결국 선교양종으로 통합되었다. 명맥만 유지되다가 급기야 양종마저도 폐지되면서 불교의 근간이 흔들렸다. 우수한 인재와 재원의 부족으로 불교문화를 창출할 힘이 없었다.

경제력을 상실한 사원의 불교의례는 점점 기복적이고 주술적으로 흘러갔다. 주술화의 핵심은 진언이었다. 불교신앙의 신비함이 응축된 아이콘이다. 예전부터 신비로움을 전하기 위해 진언은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런 진언이 상용화 되면서 진언집이 발간되기 시작하였다.

1800년(정조 24) 망월사 주지 영월(暎月)은 전라도 화순 만연사에서 간행된 판본을 수정하여 중간하였다. 그는 망월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선월당을 세우는 등 전각의 건립에도 힘썼다. 진언집이 중간될 때 발문을 쓴 사람은 수관거사(水觀居士) 이충익(李忠翊)이었다. 그 역시 1896년 천봉탑비(千峰塔碑)의 명(銘)을 쓰는 등 망월사와 관련이 깊다.

망월사 진언집은 목판으로 모두 121판이나 되는 방대한 양이며, 많은 재원을 필요로 하는 불사였다. 시주자 명단만 목판으로 3판이나 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시주자 가운데 특히 상궁 6명의 이름도 보인다. 이들이 발원한 내용이 모두 죽은 부모의 영가를 위한 것으로 조선시대 신앙사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이런 불사에는 양주지방에 사는 신도들만 동참한 것이 아니었다. 설악산 신흥사와 금강산 건봉사도 시주자 명단에 들어있는 것을 보면 전국적인 동참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진언집 중간의 감독을 맡은 거사 지영(智瑩)은 1795년(정조 19) 양주 불암사에서 간행한 <불선천지팔양신주경>의 간기에도 보인다. 이것은 망월사와 불암사의 간행사업에 모두 관여하고 감독한 것을 의미한다. 이런 사실은 지방의 불교신도가 한 사찰과 연계된 것이 아니고 그 지역에 있는 여러 사찰과 관련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망월사에서 발간된 진언집은 다음과 같은 의의를 지닌다. 먼저 국가적 차원과 민중적 차원의 종합적 신앙의식이 담겨져 있어 당시 시대적 여건 속에서 불교 신앙의 여러 요인들을 효과적으로 조화시킬 수 있었다.

다음으로 유교적 치국이념이 정립되었지만 지배층과 일반 기층민의 종교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신앙형태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진언집에 실려 있는 진언은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한량없는 종교적 복덕에 대한 신앙관이 내재되어 있다. 실제 진언집의 말미에 그런 신앙적 영험을 첨부하여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불교의식에서 많은 진언들이 독송되는 신앙형태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런 신앙적 경향은 밀교신앙 이외에 다른 신앙관에도 진언이 첨부되어 대중이 자세한 내용을 몰라도 그 진언을 독송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신앙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이런 신앙관은 이미 한국불교에 내재되어 있던 경전을 축소해서 독송하는 신앙과 의미가 일치하는 점이다.

근대 용성의 망월사 만일참선결사회

망월사 천중선원은 1925년 11월 용성이 만일참선결사회를 시작한 곳이다. 만일이면 27년 하고도 145일이다. 시간으로 볼 때 한 평생 참선하자는 뜻이다. 처음 결사에 수좌 50여 명이 동참하였다.

용성은 왜 이런 엄청난 일을 추진하였을까? 일본불교가 침투한 이후 계율에 대한 문제는 한국불교의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일본 승려들은 오래 전부터 축처영실(畜妻營室)을 하였다. 이런 분위기는 개항 이후 한국 불교에도 전해져 지계 정신이 약해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각 본말사법이 제정될 때 주지를 비구계를 수지한 자로 제한하여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비구계를 수지할 때 대처육식한 자는 허락되지 않았다. 이런 조항들 때문에 사법이 제정될 때 불만을 가진 승려도 있었다. 그렇지만 한국불교의 전통적인 분위기로 인해 대처육식의 승려에게 법계증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의 강점이 지속되자 한국 승려들도 일본 승려들 같이 점점 계율에 대해 관용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1922년 5월부터 시작된 사법개정은 처음에는 전통유지를 지켜가는 쪽으로 흐르다가 1925년 무렵 오히려 승려들의 대처를 허용하자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1926년 5월 총독부 학무국장은 대처육식이 만연해진 한국불교 현실에서 형식으로 이를 피하는 것은 모순이라 하였다. 그리고 법률상으로 승려에게 대처육식을 허용하는 것은 시세에 순응하는 조치이지 파계를 권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변하였다. 그렇게 되면 승려 가운데 소임을 맡길만한 승려도 많아질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물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특별한 대우를 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런 승려가 많기를 바란다고 하여 앞뒤가 맞지 않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개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한국 불교의 청정성 유지를 위해 대처육식을 반대하는 견해가 있었다. 용성은 석왕사 주지 이대전, 해인사 주지 오회진 외 127명의 승려들과 함께 한국 불교의 장래를 위해 대처육식의 생활을 금지해달라는 건백서를 총독부 당국에 제출하였다. 이들은 ‘서양의 종교가 들어오고 불교계도 바뀌는 상황에서 간혹 교리에 어긋나는 일이 있어 취처하는 승려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펼쳐놓고 그와 같은 생활을 하겠다고 선전하는 것이 되었다. 이것은 불교 교리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한국 불교를 망하게 하는 일로 생각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한국 승려들은 이런 개정에 대해 1,500여 년의 인습(因習)을 혁신하는 계기이며 시대에 순응하는 조치로 여겼다. 자연히 참다운 수도자는 줄어들었다. 그러자 용성은 망월사에 있던 만일참선결사회를 통도사 내원암으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1927년 8월 만일참선결사회를 자진 해소할 수밖에 없었다.

총독부 학무국은 한국의 모든 사찰이 본말사법을 개정하도록 독려하였다. 그 결과 1929년에 이르면 대부분의 본사들이 이 개정을 완료하여 한국 불교의 지계 정신은 급속도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그 해는 참다운 한국불교의 수행이 사라진 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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