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짢은 마음이 들더라도 공식으로서 그냥 넣으세요

촛불재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질문: 올해 설날에 우연히 친구의 권유로 선원의 촛불재에 동참하게 되었는데 마음이 뭔가 모르게 뭉클해짐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다른 절과 달리 설날에 그렇게 촛불 의식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답변: 선원에서는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초삼일까지 새해맞이 촛불재를 하는데, 그것은 여러분이 눈으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면 모르기 때문에 그런 의식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본래 안다면 아마 전자에 선지식들이 그렇게 방편을 일러 주시고 많은 설법을 하지 않았을 거고, 또 부처라는 이름도 없었을 겁니다, 아마. 그런데 모르니까 염불도 있어야 했고, 그 옛날 법을 다 갖추어야 했고, 지금 현재 법과 예전 법이 둘이 아니게 우리는 항상 따라야 하는 것이 예의로 돼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뜻을 알고 행해야 합니다. 모르면서 남이 하니까 그냥 따라 해서는 아니 되죠.

우리가 왜 촛불재를 그렇게 정성스럽게 해야 되느냐. 그것은 보이는 물질의 촛불만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등불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촛불재를 하는 것은 방편으로서, 마음이 없으면 그 촛불을 들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본래 마음이 밝아 있지 않다면 밝다고 생각을 할 수도 없고, 내 마음을 밝힌다는 생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본래 마음이 밝혀져 있기 때문에 그 촛불을 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다 가설이 돼 있다고 항상 얘기하죠. 한 가정에 내 자식, 내 부모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다 가설이 된 겁니다. 전체가 그렇게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돌아가신 부모도 내 마음이 밝아지면 그 마음도 밝아진다는 얘깁니다. 전기 가설을 하지 않으면 불이 안 들어오듯이, 그것은 자연히 되어 있는 마음의 가설입니다. 우리 스스로 자식이다 부모다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가설이 된 겁니다. 그래서 이 촛불 하나 켜는 것이 돌아가신 부모의 마음을 밝아지게 할 뿐 아니라 현재의 내 마음도, 양면을 다 밝아지게 할 수 있는 마음의 촛불을 켜는 것입니다.

남을 내 생명같이 아끼고
내 모습같이 생각하고
내 마음같이 생각하고
그 모두를 둘 아니게 보시라.

또 이런 요건도 있죠. 이 세상에 나올 때 제각기 다 혼자 나오죠? 갈 때도 혼자 가고요. 대신 가 주는 사람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밝히는 것도 컴컴한 두뇌를 밝히는 것도 바로 제각기 각자 하는 거죠. 그런데 환경에 따라서 식구들이 오지 못할 때에, 올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마음이니까 대신하지, 뭐. 혼자 대표로 하면 되지.’ 이러지는 마세요. 촛불재라는 것은 유위법이나 무위법에서 내가 형성되고 살아나갈 때에 컴컴했던 일을 다시금 내 깊은 마음에 의해서, 밝은 지혜 물리를 내기 위해서, 항상 뿌리가 깊게 밝아 있으니 스스로 밝게 진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촛불재를 하는 겁니다. 들고 켜고 하는 것이 방편이라고 하지만은 방편이자 진실입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아이들이 공부를 못한다거나 열심히 하는데도 안된다거나 또는 본인 자신도 어쩌지 못하고 말썽을 피우는 것도 다 업식으로 인한 거니까 본인이 마음의 촛불을 켜 들고서 간절히 관하게끔 만들어 주고, 또 본인이 부득이 못하게 되면 부모라도 대신해 주어서 그 간절한 마음의 전달로 지혜 물리가 터지게 하는 겁니다. 각자 내가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오지 않습니다. 내가 해 놓지 않고 내가 무엇을 받을 게 있겠습니까? 내가 해야만 내가 한 것만치 받을 겁니다. 그러니까 촛불재라는 것이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태워서 어두움을 없애고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촛불처럼, 새해를 맞이하면서 무명을 밝히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항상 마음의 뿌리가 밝아지도록 발원하는 방편이자 진실한 의식인 것입니다.

아직 부자 상봉을 못하고 있습니다

질문: 큰스님께서는 부와 자가 상봉을 해야 한다고 하시는데 저는 오랫동안 마음공부를 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 부자 상봉을 못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있는 걸까요?

답변: 우리가 제일, 여러 마디 하는 거보다도 제일 급한 게 뭐냐 하면은, 자기 뿌리를 자기가 믿는 거다 이겁니다. 통하고 안 통하고 그걸 떠나서 자기 선장을 믿지 않는다면 누구를 믿습니까? 그래서 잔잔하든 파도가 치든, 양면을 다 놓고 그 선장한테 맡겨 놓는다 이겁니다. 만날 한 말이지마는 거기에 닿지 않고 가는 분들이 너무 많으시거든요. 그래서 이 마음이라는 그 자체의 선장. 우리는 그냥 마음이지만 그 선장의 마음은 한마음이거든요. 그러니 그 선장이 끌고 갈 수 있게끔, 이렇게 이끌어 가지고 갈 수 있게끔 만들어야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막 그냥 파도가 친다고 해서 배 뒤집힐까 봐 막 그냥 야단법석을 하면은 그 선장이 끌고 갈 수가 없어요. 결국에는 배가 뒤집히죠. 그와 같이 우리 몸뚱이를 배로 비유를 했다면 그렇단 얘깁니다. 선장이 자기를 끌고, 지금 선장 주인공이 자기를 이끌고 가는데 바깥으로 자꾸 끄달리고 그런다면 끌고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 거와 같습니다.

내가 항상 그러죠. “이 세상에 누구를 믿을 데가 있느냐? 못났든 잘났든 네가 이 세상에 나와서 너만이 너를 믿을 수가 있잖아!” 자불이 모두 있다고 그런 건 다들 아시죠? 그런데 이 세상에는 믿을 데가 없어요. 부모 자식 간에도 믿을 수가 없거든요. 대신 똥 눠 줄 수 없고 밥 먹어 줄 수 없고 잠자 줄 수 없고, 아파 줄 수 없고 죽어 줄 수 없고 깨달아 줄 수 없다 이런 거죠. 그러니까 믿을 놈이 하나도 없어요. 어떤 놈을 믿어야 할지 믿는 걸 하나도 믿을 수가 없어요. 자기를 이끌어 가는 자기 주인공, 자불밖에는 믿을 수가 없어요. 그 자불로 인해서 수없는 제불이 다 이렇게 찰나찰나 엮어지니깐요. 그리고 통신이 되니까요. 그리고 항상 들고 나고 하시거든요, 그 자불 주인공에.

보편적으로 우리가 “주인공, 주인공” 그러는데 드라마에서도 주인공이 고생은 해도 죽는 거 못 봤죠? 아주 끄트머리의 결과는 회향을 잘하고 끝내지 않아요? 그렇듯이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우리가 바깥으로 끄달리지 말고 안으로 열심히 관하면서 자기가 실천에 옮기고 자기가 실험을 하고 그렇게 해 보다 보면 차차차차 그게 경험이 되고 그래서 깨쳐진단 말입니다. ‘아, 이럭하면 되는구나!’ 하는 걸 알고선 좇아가니까 어떤 게 닥쳐와도 해결을 할 수 있으니 ‘아, 바로 이게 반야줄이구나! 이게 바로 그 부처님의 세계로 가는 길, 그 미세한 그 티끌 수와 같은 세계로 가는 거구나!’ 하고 그냥 생각을 할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대로 마음이, 그 헤아릴 수 없는 세계로 가는 길이 수천수만이 된다 하더라도 한 찰나입니다. 요기서 조기 나가는 것과 같은 거죠. 그러니까 그것을 한번 생각을 해 보시고요, 내 이 육체가 새 둥우리라고 합시다. 새 둥우리 속에 새가 들어 있다. 이 몸이 형성됐으니깐 그 속에 자불이 들어 있는 거지, 지붕도 안 해 놓고 부처님 모시는 거 봤습니까? 다 집을 마련해 놓고 자불을 거기다 모시는 거죠. 자불은 영원한 겁니다, 자기의. 여러분들의 자불은 다 같이 있죠.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업신여기지 마라. 미워하지 마라. 섭섭하게 하지 마라.” 모든 거를 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가르치셨죠. “벌레 하나도 살생하지 마라.” 이랬고요. “그것도 네 생명이다.” 하고.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살아서 공부하는 거지 죽으면 공부 못해요. 부딪치는 체가 있어야 되는데 체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공부를 못하고 차원에 따라서 차례차례로 곤욕을 치른다거나 또 차례차례로…. 곤욕을 치르는 게 다른 게 아니죠. 다른,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테니깐 말이에요. 그거를 또 한 번 벗어나려고 한다면 무척 고생을 해야 되니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통하고 깨치지 못했다, 즉 말하자면 부와 자가 둘이 아니게끔 상봉을 했다 이러지 않아도 내가 자꾸 한군데다가 몰두해서, 안 되는 거는 ‘안 되는 것도 되는 것도 거기서 하는 거니까 되게 하는 것도 너야!’ 하고 굴려 놔라 이겁니다. 이 ‘법륜을 굴린다’ 하는 것도 바로 이게 이렇게 굴리는 게 굴리는 거예요, 그냥. 그래서 그렇게 굴려서 놓으면 그것이 인제 깨치지 않았어도 그것이 직통, 즉 말하자면 찰나에 그, 대뇌로 해서 사대로 통신이 돼서 정수의 컴퓨터에 입력이 되어 그 입력대로 그냥 나오게 돼 있으니까요. 깨쳤다 깨치지 못했다를 떠나서 진짜로 믿는다면 말입니다.

암 진단을 받았어요

질문: 건강검진 표가 나와서 별 생각 없이 검진을 받았는데 위암 초기 진단이 나왔습니다. 관한다고 하는데 무섭고 두려운 마음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이 두려운 마음을 해결하고 싶습니다.

답변: 여러분이 일체의 해결책을 다 가지고 있어요. 진짜로 누구나가 다 주인이 있다면 심부름시키는 제 시자를 그렇게 돌보지 않겠습니까? 진짜로 자기 주인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진짜로 믿으라고 그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그러더군요. 이 마음의 도리를 공부해 나가는 분인데 병원에서 폐암이라고 그래서 죽게 됐더래요. 근데 그 순간에 마음이 더 넓어지더라는 얘기입니다. 아팠을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에 조바심을 냈는데 인제 죽는다는 생각이 들어가니깐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수술할 생각도 안 나고 그냥 ‘죽으면 편안하겠다.’ 이렇게 생각이 들더라는 겁니다. 그러고는 아주 더 간절히 주인공한테 관하고 오직 거기만 믿고는 기운이 없으면 찹쌀 물을 끓여서 냉장고에 넣어 놓고 그냥 물처럼 마시고 어디가 쑤시면은 감자를 생으로 갈아서 한 컵씩 먹으면서 그냥 그렇게 지냈다는 거예요. 보약을 한 재씩 지어서 때로는 먹기도 하고 이러면서 죽으나 사나 그냥 놔뒀다는거죠. 근데 지금 건강해서 잘 다닙니다. 그러니깐 모두 각자 자기 마음에 달려 있어요. 우습게 생각을 하니까 정말 우습게 되는 거예요.

또 한 칠십이 채 못 된 어떤 노인네가 암에 걸렸다는 겁니다. 암이 걸려서 도무지 얼마 못 산다는 거예요, 너무 오래 돼서. 그런데 “수술을 하면은 어떻게 하시겠소?” 이러니까 “수술을 하면 뭘 합니까. 그냥 편안하게 살다 편안하게 가야죠.” 이러더라고요. 그러더니 그냥 그걸 없애고 지금은 편안히 잘 살고 있어요. 그게 왜 그럴까요? 버리니깐 나아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믿음에 달려 있다는 얘기입니다.

공부하는 데도 믿지 못하면 힘이 드는 겁니다. 당신들 속에 주인공이 다 있다고 해도 나를 큰스님이라고 생각하니까 다른 거 같지만 불성은 누구나가 다 똑같아요. 둘이 아니에요. 그러니깐 수만 명이 한데 합치면 큰 에너지가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깐 걱정들을 하지 말고 머리를 써서 진짜로 믿을 생각을 하고 믿는 반면에 에너지는 그렇게 커진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이것도 과학적인 문제입니다. 불성은 다 똑같으니까 한데로 모아지면 큰 에너지가 되고 또 그 에너지를 안 쓸 때는 딱 펴지고 또 모아서 쓰고 이러는 거죠, 그거 뭐. 그래서 모두가 과학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정통의 길을, 정통의 길이라고 할 것도 없고 진짜 내가 나왔으니까 내가 있고 내가 있으니까 나의 불성이 근본적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생명의 근본인 것이지요. 우리가 작용해서 대치를 하려니까 주인공이라고 해야죠. 내 속의 의식들도 다 한마음이 돼 줘야만이 아픈 데도 파워를 일으키지 않고 화합이 돼서 아프지 않게 되는 거지, 간의 생명들이 싸움을 해서 죽으면 다 굳어지고 그래서 그게 간암이 되는 거예요. 싸움을 안 하고 호응을 하는데 어떻게 간암이 됩니까? 바깥에서나 안에서나 싸움을 해서 모두 한쪽이 죽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지 싸움을 안 하면은 죽지를 않죠.

그래서 둘로 보지 말라 이런 겁니다. 바깥에서 세균이 들어왔다 하는 것도 있지마는 안에서 생기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안에서 생기는 것도 너 나를 따져서 싸우게 되거든요. 그래 백혈병도 그렇고 다 그래요. 이게 바깥에서도 세균이 들어와서 또 그렇게 싸우는 게 있고요. 그러면 내 편을 다 만든단 말입니다, 또. 그렇게 해 가지고선 싸우게 되면 그거는 단박 그냥 순식간에 살이 굳어져 들어가니까 병자가 돼 버리고 마는 거죠.

그래서 모두를 둘로 보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나에 따라서 인과성, 업보성, 영계성 세균성, 유전성 이 다섯 가지가 주둔합니다. 다섯 가지가 주둔해서 모두 과거에 자기가 벌여 놨던 것이 현실에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꼭 하셔야 합니다. 이게 뭐, 돈이 드니 못합니까, 힘이 드니 못합니까? 수억겁을 거쳐서 자기를 이끌고 나온 자기 뿌리를 진짜로 믿어야 나무는 아주 푸르르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꼭 아셔야 합니다.

웃고 사는 화목한 가정이 되려면

질문: 제게는 두 딸이 있는데 자식들과 계속 마찰이 생깁니다. 저는 자식을 위해서 한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어긋나기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은 웃고 사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싶은데, 도움 말씀 청합니다.

답변: ‘자기가 없다’는 뜻을 아십니까? 반야심경에도 있듯이 하나도, 보는 것도 고정된 게 없어요.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만나는 것도 가고 오는 것도 모두가 고정된 게 없어서 함이 없이 하는 겁니다. 어떤 거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공했다고 하죠. “우주 삼세가 그대로 공해서 문이 없도다.” 하는 셈이나 같죠. 그래서 여러분들도 이거를 이유를 따지고, 속으로 이걸 따지고 저걸 따지고, 이게 좋으니 저게 좋으니 내 탓이니 네 탓이니 하는 거는 아예 공부하는 데 지름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수없는 겁을 거치면서 우리가 형성되고 진화되고 이러는 데다가 그렇게 해 가면서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고 이렇게 해 내려왔는데 그것이 전부 악이라고 그렇게 배척하면 나도 배척이 되는 겁니다. 둘이 아닌 까닭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게. “네가 잘못하면 너도 그렇게 받는다.” 이런 뜻이 뭐냐 하면, ‘남을 죽이면은 죽임을 받는다.“ 이런 것이 뭐냐 하면 둘이 아닌 까닭입니다, 그게. 일로 가면 일로도 옵니다. 그러니까 남을 내 생명같이 아끼고 또 내 모습같이 생각하고 내 마음같이 생각하고, 그 모두를 다 둘 아니게 보시라 이런 뜻이죠.

그러면 우환이고 싸움이 생기질 않고 화목이 생기고 사랑이 생기고 그렇게 됩니다. 그리고 부모들하고도 아주 극난히 언짢았던 사람들이 그냥 죽어서…, 그러면 그 마음들이 그냥 있기 때문에 자식 살아나가기가 참 힘드는 집들이 많아요, 가만히 보면. 그거는 둘 아니게 그렇게 조상들도 다, 둘 아니게 자꾸자꾸 자기를 거쳐서 그 공부를 같이 하게 만들어야 되죠. 그럼으로써 모든 것은 다 화평해지고 또 돈도 한마음으로 들어오게 돼서 돈도 생기고 살기가 점점 피어지죠. 마음들이 화목하고 행복하니까. 그렇게 행복하고 행복지 않다 이런 것도 없이 그냥 슬기롭고 웃고 살게 되는 그러한 가정이 모두 돼야 됩니다.

나쁜 사람은 피해야 되는 거 아닌지요

질문: 공부가 많이 된 사람이나 스님을 만나면 편안하게 느껴지는데 욕심이나 집착이 많은 사람을 만나면 혼돈스럽고 무거움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공부하는 과정에서는 그런 나쁜 사람을 만나거나 그런 환경이나 장소를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요.

답변: 자기 자신이 없다면 모두가 없다고 그러죠. 자기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인연도 만든 겁니다. 그런데 나쁜 사람이라도, 도둑이라도, 강도라도 만나서 내가 좋게 해 주면 다 좋은 겁니다. 다 언짢은 게 아닙니다. 그래 언짢은 마음이 들더라도 공식으로서 그냥 넣으세요. 공용으로 그냥 넣으세요, 둘 아니게. 넣으시고선 속으로 그냥 관하시고 좋게 말하고, 그냥 좋게, 그 상대가 좋게 생각할 수 있게끔 말해 주고 끝내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피하실 것이 없죠.

그런다면 언제 어느 천 년에 이 세상에, 지구뿐만 아니라 우주의 모든 물체도, 이 산사의 목신도, 또 땅의 지신도, 또 물의 수신도, 용신 말입니다, 모든 거를 어떻게 둘 아니게 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인연을 지으세요, 좋은 인연으로서. 그러면 아주 간편하게 사시게 되실 겁니다. 항상 무겁지 않게 사세요.

남편이 너무 미워요

질문: 제가 자꾸 바가지 긁는다고 툭하면 이혼하자는 남편이 너무 밉습니다. 제가 괜히 그러는 것도 아니고 집안 형편도 안 좋은데 남편이 친구 보증 섰다가 말아먹고 집안을 돌보지 않으니 그런 건데 말입니다. 자식들 때문에 이혼하고 싶어도 참고 주인공도 불러 보지만 미운 마음이 가시질 않아 속상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까요?

답변: 우리는 그냥 공생, 공심, 공체·공용·공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 부처님, 보살들은 다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근데 우리들이 그 도리를 모르니까, 그렇게 살질 못하니까 지금 그렇게 고통스럽게 이혼을 한다 뭐, 같이 또 사랑을 한다 이런 문제들이 생기고 고가 생기는 거죠. 자기가 다 벌겨 놓고 뭐, 죽겠다느니 살겠다느니 하거든요. 다 잘못해서 다 그냥 홀랑 다 까 버리고선 자기는 살지 못한다고 죽는다고 하거든요. 그게 그 무슨 일입니까. 과거로부터 내가 그렇게 쌓아 올리고 차원을 높이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 태어난 대로 그대로거든요. 생각이 모자라서 그렇죠, 그러니까.

예를 들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도, 어떠한 자리를 봐도 어떠한 용도에 따라서 물건을 우리가 할 것인지, 이 물건은 어느 자리에다 해야 좋을지. 시대는 어떠한지, 또 내가 돈을 꾸어서 해도 되는지, 꾸지 않고 해야 되는지 이것도 잘 생각해서 정해야 될 것을, 용도는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자리만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고, 또 뭐, 이거는 어떻게 보면 자기가 모자라서 보(保)나 서고 이렇게 해 가지고 보 선 걸로 인해서 다 날리고 이렇게 고생을 시키고, 자기도 고생 식구도 고생 남도 고생, 이렇게 시키는 사람들이….

그래서 모든 것은 한 몸에, 한 몸 가운데 그 깊고 깊은 내 마음 그 속에, 여의봉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그게 주장자죠. 주장자에다 다 놓고 이러면 정수로 컴퓨터에 입력이 돼서, 입력이 되면 입력이 되는 대로 자기가 입력한 거만치 나오거든요. “스님, 나는 주인공 이름을, 아니 주인공을 자꾸 불렀는데 어찌 안 됩니까?” 이름만 불렀지 진실히 통하질 못했거든요.

그래서 남의 말만 듣고 남을 흉본다거나 잘못한다고 한다거나 이래서는 안 되고, 언제나 겸손하고, 작고 큰 것이 둘이 아닌 이상, 또는 잘하고 못하고가 둘이 아닌 이상 잘하는 것도 법이요, 못하는 것도 법이니까 모든 걸 침착하게 생각하고 가르치고 이끌어 주고, 또는 모르는 사람이 돼서 그런 거를 모르면 그저 자꾸 마음 내서 일러 주고 이렇게 해 나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배움에 있어서 조끔도 손색이 없는 배움입니다. 남을 헐뜯을 게 하나도 없죠. 자기가 수없이 그 사람도 됐다가 나도 됐다가, 짐승도 됐다가 미생물도 됐다가…, 미생물에서부터 이렇게 된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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