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부처라고 한다면, 마음이라는 게 이상야릇하게 생각 내는 것이 아니라 생각나는 겁니다. 그것을 어떻게 말해 줄 수 없어서…. 생각 내는 것이 아니라 생각나는 것입니다. 생각나는 것에 의해서 생각을 또 내게 되죠. 그래서 생각 내기 이전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항상 살아나가는 데도 스스로 마음 가운데에서 느낌으로 이렇게 생각이 저절로 나는 게 있고, 또 우리가 생각을 내서 내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우리가 공부를 하다 보면 티끌 하나 걸리지 않아야 된다는 뜻이죠. 그러면 의정도 없어지는 겁니다. 의정이 없어질 때까지 우리는 이날까지 역설을 했고 또 여러분 앞에 많은 말을 안 했다는 것은 했다는 거와 진배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했대도 아니 되고 했대도 아니 되는 것이죠. 우리가 그러면 뭘로 증명을 할까?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하고 있는 거 있지 않습니까? 어저께 것도 내일 할 거 걱정도 없이 말입니다.

한마음에서 우주 전체가 나고, 들고 나고 들고 난다
산은 없으나 나는 있고 나는 없으나 산은 있구나.
이 세상에 어느 물 하나 버릴 것이 없노라.

그런데 앞에 앉아 있는 학생을 위해서 한 가지 얘기해 주지. 공만 알았지 나투는 방법을 우리가 생각지도 못해. 모두가 나 하나로 뭉쳐서 나 하나도 세울 게 없다는 뜻은 무엇인가. 금방 엄마하고 만났을 때, 금방 만났을 때에 둘이 되었는데 금방 나 혼자 있으니까 혼자가 됐단 말이야. 그래 또 비켜 놓고 또 이모를 만났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거를 한번 생각해 봐. 나 하나라고 그래서 하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일체 만물만생이 나투면서 같이 돌아가. 나투며 화하면서 창조하면서…. 그래서 그 뜻을 여러 귀종 성현들이 별의별 수단을 다 써서 수좌들한테 가르쳐 주기 위해서 무척 애를 썼다고 보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 옛날에도 이런 말씀이 있었어요. “서천의 호자(胡子)는 어찌 수염이 없는고?” 하고서 수좌들한테 물은 바도 있거든요. 그 소리가 무슨 소리냐 하면 “달마는 어째 수염이 없는고?” 하는 거나 똑같아요. 서천이라는 거는 중국에서 인도를 서쪽으로 보니까요.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호인이라고 불렀으니 호 자를 넣어서 자를 붙인 거죠. 그렇게 내가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그것을 왜 그렇게 입담 좋게 그런 말들을 자꾸 건넸던가? 그래서 그것을 대답을 할 때 말이 없이 하지도 말고 말이 있이 하지도 말라. 사람도 때에 따라서 다양하게 ‘묻는 사람이 누구인가? 또 어떠한 차원에 있는 사람인가? 아리송한 사람인가?’ 이거를 봐서 되받아서 질문할 수도 있는 거며 또는 거기에서 대답 없이 대답을 할 수도 있는 그러한, 서로가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대답을 할 수 있는 거거든.

우리가 지금 이 마음으로 말없이 여러분한테 이런 말을 하죠. 듣기 싫은 말은 남편에게도 하지 말고 아내에게도 하지 말고 자식에게도 하지 말고 인의롭게 슬슬 돌려서 좀 거북하게 걸리지 않도록 말을 잘해 주면서 안으로 굴리라고요. 안으로 굴리는 그 마음은 절대적으로 그쪽 마음으로 전달이 되거든요. 왜? 내가 그쪽을 생각하고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대의 선지식들도 부처님도 역대 조사들도 다 마음과 마음을 전달해서 우리가 한마음이라는 거지, 마음과 마음이 전달이 되지 않는다면 한마음이라고 할 수도 없거니와 진리라고도 할 수 없고 또는 묘법이라고 할 수도 없는 거죠.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역대의 조사들이 어찌 쓰러져 가면서, 불을 태우면서 온갖 노력을 다해서 그 공부를 했겠습니까?

여러분이 속가에서 사는 것처럼, 우리도 이렇게 승려 노릇을 하고 사는데 입산을 한 스님네들이나 입산을 안 한 여러분이나 생각을 가만히 해 보세요. 어떠한 것을, 공장을 하나 하든지 무슨 기술을 하나 배우든지 피나는 노력을 안 하고는 돈을 벌 수도 없거니와 기술도 배울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과목이든지 어떠한 부분이든지 어떠한 기술이든지, 공장을 하든지 과학자든지 철학자든지 또 행정 과목이든지 뭐든지, 하여튼 피나는 노력이 아니라면 그것은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저 흥청망청 흥청망청 해 나가다가 보면 그냥 흐지부지해 버리고 망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집안이 망하는 거죠. 집안이 망하면 나라도 좋지 못해. 나라도 망해. 인군이 마음이 흔들리면 신하도 마음이 흔들리고 국민이 마음이 흔들리고 전부 안 돼. 그렇듯이 이 몸에도 지금 내 오장육부 속에 세포를 통해서 수많은 생명들이 있는데 내 한생각이 흔들린다면 그것들이 다 흔들려서 내 집안은 망하게 되는 거지. 내 육신이 망하게 되는 거지.

그러니 작든 크든 내 몸으로나 가정으로나 또는 국가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우주적으로 전체가 우리는 거기 환경에 따라서 나투면서 아, 가정에 들어와선 내 가정, 몸으로 봐서는 내 몸, 또 사회에 나가선 국가, 이렇게 모든 것을 다양하게 해 나갈 수 있는 이 나툼이, 옮겨 다니면서 수없이 천차만별로 생각 생각 해 가면서 성품의 활용을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우리 스님네들도 그렇고 공부하는 여러분도 그렇고 피나는 노력이 아니라면…. “노력하는 것도 놔라” 하는 것이 그걸 놓고 노력을 하라 이겁니다. 노력하는 것마저도 놓고 노력하라. 하지 말되 하고 하되 하지 말라. 노력하고 하고 하고, 세 마디만 하면 벌써, “안 하고” 하면 부정이지만 또 “안 하고” 하면 긍정적으로 하는 것이 되거든요. 그래서 안 하되 하고, 하되 안 하라. 놔라. 놓되 해라. 이 모두가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각자 내 마음은 내가 아는 거라. 그런데 내 마음도 내가 모르니까 그 마음을 알자고 해서 지금 하는 거거든.

그래서 이 도리를, 내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다면 세세생생에 우리가, 했던 말 항상 하지마는, 야! 그걸 모르면 어떻게 될까요? 모르고 또 옷을 벗고 모르고 또 옷을 벗고, 그러면서 좌천돼서 이 모습으로 저 모습으로 끌려다니면서 그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돼요. 그래서 어차피 여러분이 사시면서 돈을 벌려고 또는 살 양으로 피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우리 스님네들은 그것을 떠나서 노력을 또 해서, 똑같은 노력이라면 참 으뜸나가는 노력이죠, 지름길이고.

그런데 ‘내가 그럼 지름길로 빨리 입산을 해야겠다. 그랬으면 좋지 않을까?’ 이런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욕심도 없어서는 아니 되지만, 앞에 있는 걸 버리고 내가 먼 데 있는 거 좋은 거 찾으려고 하다가는 구덩이에 빠지거든. 그런 인정, 도리, 의, 사랑 이런 걸 모르고서야 어찌 도를 이루겠습니까? 앞에 있는 거 다 팽개치고. 옛날에는 사명 대사나 그런 분들은 다 팽개치고 갔다지만 팽개칠 수 있는 그런 환경이 되니깐 팽개친 거지, 환경도 되질 않는 걸 억지로, 강제로 팽개치고선 내가 도를 이루겠다고 달아나가 봤자지. 자기에게 주어진 대로….

어저께도, 그저껜가 그끄저껜가 얘기했지만, 말 한마디 잘못 대답해 가지고서 여우의 몸을 받아 가지고 오백 생을 지냈다는데, 왜 울고불고하면서 간절히 그 여우 몸을 벗으려고 무척 애를 썼을까? 어차피 여우 몸으로 바뀌었다면 여우로서 이 우주를 통치해서 그냥 집어삼킨다면, 여우의 몸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그 도리를 모르는 것보다도 더 위세 있지 않을까? 내가 여우의 몸으로 이렇게 받으니까 고생이 되지, 여우의 몸으로 받아서 여우로서 지내는 그 삶도 자기가 착을 버리고 여우라는 그런 생각도 없었다면 아마도 여우로서 온 우주를 활보했을 거라고 생각이 돼요.

그러면 스스로서 모습도 여우의 모습만 되겠습니까? 나는 어떤 때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내가 무슨 모습이라고 할꼬?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할꼬?’ 이 세상에 구더기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구더긴들 어떠랴.’ 이거야. 구더기면 똥통 안에 들어가서도 구더기기 때문에 그 구린내가 아주 좋은 요리 냄새로 되거든. 그러니 구더기도 구더기로 된다고 애타할 것도 없는 거지.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까? 인과를 받아서 잘못될까? 좌천이 돼서 어떠한 모습으로 또 나오면 어쩌나. 또 앞으로 고를 받으면 어쩌나.’ 이런 것도 모든 걸 놔 버려야 해요. 순리적으로 물 흐르는 대로 흘러서 내가 뭐가 되든지 뭐 그렇게 걱정이 됩니까? 우리 인간으로서 보자면 벌레를 봐도 ‘아유! 저거 저렇게 하고 어떻게 살아?’ 이러고, 파리를 봐도 ‘아유! 저거 저거 어떻게 저렇게 하고 살아?’ 이러지마는 파리는 파리 나름대로 재미가 있는 거거든. 그러니까 거기에 염두를 두지 말고 모든 것을, 어떠한 물건이 나에게 부닥치더라 할지라도 모든 거를 자기 주인공에서 나온 거, 그 그림자니까 모든 거를 거기다 놔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어떤 성현이든지.

지금 여러분이 오죽이나 공부하기 좋은 시댑니까? 텔레비전이 세계의 텔레비전이 나오죠. 우주적으로, 과학적으로 또 옛날 그 참, 뭡니까, 그거? 여러 가지로 인과에 대한 설법도 거기서 나오고 모두 많이 나와요. 그런데 우리가 그런 거를 보지 않았으면 생각조차도 없을 거예요. 그런데 보니까 생각이 나는 거거든. 그리고 세상을 다시 한번 돌아다볼 수 있는 거고, 자기를 한번 돌아다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거죠. 그럼으로써 얼마나 공부할 수 있는 그 계기가 주어져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잘못하면 잘못한 대로, 잘하면 잘한 대로 그것이 자기에 따라서 그냥 주어지는 거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이 공부하는 사람들은 잘못하는 거든지 잘하는 거든지 잘된 거든 잘못된 거든, 어떠한 물건이 되든 어떠한 물질이 되든 그런 거를 다, 좋은 거든 나쁜 거든 상관없이 놔라 하는 것이 바로 이 선 공부입니다. 어떤 스님네들은 “야, 거기는 앉아서 좌선도 안 하고….” 접때 책을 모두 상 탄 것들이라고 누가 내놨기에 이렇게 들춰 보니까, 좌선을 해야만이 수행이 된다고, 그 한 줄을 이렇게 봤더니 그러더군요.

좌선을 해야만이 되는 것은 선이 아니에요. 일상생활이 모두, 일거일동이 다 참선이거든. 앉아서 좌선을 해야만이 되는 게 아니라, 앉아서 좌선을 해서 내 마음을 숙연히 하고 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편리하게 이렇게 수행은 할 수 있을지언정 도는 이룰 수가 없어. 그래서 부처님의 자비는, 크고 작고 악하고 선한 것을 한데 합친 눈물이 바로 자비라 그랬거든. 참선도 악하고 선하고 앉고 서고 눕고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움죽거리는 거 하나하나, 티끌 하나 버리지 않고 모든 것을 놓는 것, 우리가 놓고 돌아가는 거, 나중에는…. 이렇게 말하면 아주 쉽겠군요. “색즉시공” 이랬죠? 색으로부터 들어갔어요, 공으로. 공에서, “공즉시색”, 색으로 다시 나왔거든. 그랬으니까 색으로 들어서 공을 돌아서 색으로 다시 난다 이겁니다.

그러니 참선이라는 것이 어떠한 것이 참선인가 말입니다. ‘동쪽의 샛별을 보고 깨쳤다’ 부처님께서 그랬는데, 우리는 육신이 임신을 해서 이 세상에 이 육신이 났다. 육신이 나 가지고 성장을 하니까 마음을 깨쳐라. 우린 다시 마음이 나야지 육신과 더불어 실상이 된다. 하나하나 버릴 게 없는 것이 그때는 또 나오지 않느냐 이거야. 하나도 가질 게 없고, 가질 게 없는 걸 알아야 하나도 버릴 게 없는 것이 나와. 그때 색으로 다시 나와. 그럴 때 하나하나에 소소영영하게 이것이 법 아닌 게 하나도 없고 또는 물질 하나하나 버릴 게 하나도 없는 거라. 버릴 게 없다고 하는 그 도리를 알면, 버릴 게 없기 때문에 하나도 내가 가지고 다닐 게 없어.

그래서 우리가 좀 더 나를 깨쳤다면 이 관문법이라든가 예전의 성현들의 선문답이라든가 이런 것을, 좀 더 내가 다 익혀서 성장이 될 때, 이 세상에 마음을 깨쳐서 다시 또 반복해서 보림을 해 가면서 성장이 됐을 때에 비로소 선문답이라든가 귀종의 말씀이라든가 관문이라든가 그런 것을 한번 쭈욱 훑어보는 거지. 이 종지를 그대로 우리가 따르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옛날부터 그대로 사람인 거라, 사람. 옛날부터 마음으로 마음이 전달돼서 화해서 계발해 가면서 우리는 성장이 된 것이니까. 그리고 우리는 변동을 하나 저 산은 그대로 있는 거라. 그래서 이런 말이 있죠. “산은 없으나 나는 있고 나는 없으나 산은 있구나. 이 세상에 어느 물 하나 버릴 것이 없노라.” 하고 말입니다.

육조 스님이 그 모든 것을 “무(無)다” 이렇게 버린 그 자체, ‘무일물(無一物)’이라고 한 그 자체, 그것을 우리가 생각한다면 그것도 또한 이론인 거라. 하지만 수좌들이나 학인들을 위해서, 할 일이 없어서 그 말씀을 모두 한 게 아니거든. 그 말씀 하나하나가 우리에게는 양식이 되고, 우리의 마음 깨닫는 데에 큰 도움을 모두 줬기에 모든 게 고마운 거예요.

허구장창 날더러 이렇게 설법을 만날 해 주신다고 하는데, 난 해 준 게 없어요. 왜냐? 내가 이것을 만날 할 양으로 신경을 쓰고 이런다면 나 벌써 죽었게? 허허허…. 그런데 이 세상 사는 거, 꽃 피고 사계절이 돌아가는 거, 물 없으면 못 살고 불 없으면 못 살고 길 없으면 걸어 다니지 못하고 야, 모두가 바람 없으면 또 못 살고 이 사계절이 없으면 못 사는 게 그대로 설법이고 그대로 법이라. 그대로 진리야. 여러분이 이 도리를 알면 우주의 다른 동네도, 동네라는 뜻은 다른 혹성도 위성도 항성도 그런 도리를 전부 알게 돼. 왜, 자유자재하지? 왜 그런가 이거야. 아니, 내가 이 동네에서만 꼭 살아야 한다고 써 붙여 놨나? 내 마음대로지. 아, 저 동네로 이사 가려면 이사 가고 이 동네로 이사 가려면 이사 가고.

이 중세계, 이 지금 지구 안에서는 없는 게 없이 다 있는 거예요. 왜 있느냐? 여기에서는 아래로 좌천도 될 수 있고, 위로 고운 체로 걸러서 고운 가루를 해서 따로 놓는 것도 있거든. 체 치듯이. 체에 떡가루 치듯이. 다른 어떠한 혹성에는, 어떠한 동네에서는 마음으로만 살고 있다는데, 그래서 먹는 것도 생각해서 먹고, 생각이 떴다 하면 그대로야. 그런데 여기선 왜 이렇게 움죽거려야 먹느냐 이거야. 그리고 물건을 하나 만들어 놓으면 이놈의 게 바숴질 때까지 끼고 돌아야 하고, 얼마나 고초가 많으냐 이거야. 여기가 사람 되고 안 되고 교차로가 아닌가 이렇게 봐요. 사람 잘 만들고 못 만들고 하는 공장 같아요, 내가 볼 때에.

가만히 보면 모두가 지수화풍으로 뭉쳐 가지고, 억겁 전으로 가서 본대도 현실과 똑같거든. 억겁 천 년 전으로 돌아가서…, 년(年) 자도 붙지 않지. 지수화풍으로 뭉쳐서 거기서 위력이 생겨서 별성이 생기고, 별성이 생겨서 바로 그 일심에 불성이 생겨서 삼세심이 됐고, 삼세심에 불성이 생겨서 북두칠성이 생겼고, 북두칠성이 생겨서 은하계를 이루었고 태양계를 이루었고, 그 많은 혹성들을 이루었고 위성들을 이루었다. 그 항성의 뜻이 그렇게 한생각으로 살기 때문에 그 항성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겁니다, 음? 우리한테도 항성이라고 이름을 지어 놨으니까 항성이지 우리의 근본, 아주 자성이라고 합시다. 뭐가 다르냐 이거야. 그 씨라, 모두가!

그러니 거쳐 온 게 그거니 내가 하나를 알면 전체가 알아질 수밖에는 없지. 염주알 꿰어지듯 했으니까. 이게 따로따로 있어야, 구슬이 따로따로 붙었어야 이게 글쎄, 저기 가서 배우고 저기 가서 배우지. 삼천대천세계의 우주 전체가 한마음에 든 거라. 한마음에서 우주 전체가 나고, 들고 나고 들고 난다. 이게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에요. 내가 조끄마해지려면 조끄마해지고 커지려면 커지고, 빛으로도, 빛이 제일 빨리…. (녹음 안됨)

… 생각하면 말로 이끌 수 없는 그런 문제들이, 참 이거는 어떻게 말로 해야 될까? 어떻게 이걸 글로 써야 되는 걸까? 이걸 말로 형용할 수가 없어. 너무 많아! 우리 이 국민 수효만 하더라도, 태어나는 사람이 많고 죽는 사람은 적고, 이렇게 해서 강제로 못 낳게 하고 이렇게 하지마는 우리들 인간들뿐만 아니거든. 버러지까지, 미생물까지 이 얼마나 수효가 많으냔 말이야. 그런데 이거는 문제가 아니라 요 손가락 끝의 요 티끌 같은 거라, 또. 요 지구 혹성 하나만 친다면 티끌 같은 거라, 또 이게.

그러니 야, 모습이 똑같으냐 하면 여기서도, 우리 이렇게 많은 중에도 똑같은 사람이 없어. 그런데 하물며 다른 혹성에 있는 사람들 생명들이 어떻게 똑같을 수가 있겠느냐 이거야. 지금 내 배 속에 있는, 오장육부에 있는 이 생명들이, 이거는 촌챙이 다르고 거위 다르고 전부 달라. 이 한동네가 요 한집안 속에서 있으면서도 고렇게 다를 수가 없어, 모습이. 그러면서도 모습은 다르지만 한 사람의 뜻을 받아서 그대로 운행을 하거든. 그건 그것대로 있어야 하고 저건 저것대로 있어야 하기 때문에, 모습도 그래야만이 그 환경에 의해서 공장장이 될 수가 있고 또는 인부가 될 수가 있는 거죠. 위 사장이 있는가 하면 위 공장장 또는 장 공장장, 직장 공장장, 허허허…. 이 공장장들이 여기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그 공장 모습들이 전부 달라. 똑같은 게 하나도 없어. 그와 같이 다른 혹성, 다른 데도 그렇게 모습들이 전부 달라. 자기가 편리한 대로 하는 거라. 편리한 대로 그려 가지고 나온 거라.

우리가 왜 허리띠를 매게 됐느냐?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기에서는 일을 하기 때문에 허리띠를 매지만 딴 데서는 허리띠도 없습디다. 왜? 일을 안 하니까. 선신들의 모습을 가만히 볼 때에, 허리띠 질끈 동여맨 그림 보셨습니까? 못 봤죠? 바로 일을 안 하기 때문이에요. 중세계에서 골고루 잡숴 보기도 하고 골고루 보기도 하고, 이 공부의 도리를 잘 알아야, 봐야 생각이라도 해서 그걸 생각하면 내먹지, 보지도 못하고 먹어 보지도 못한 건 생각조차도 안 나고 먹고 싶지도 않아요. 그 먹는 거뿐만 아니에요.

우리가 지금 이 국내에서나 세계에서나 어디든 다녀 보고, 보고 알고 듣고 이렇게, 요새 얼마나 좋은 세상입니까? 안방에 앉아서 세계를 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공부하기 얼마나 좋아요. 옛날 같으면 탁마를 하러 다녔지만 지금은 안방에서 탁마를 한다고. 왜 바깥으로 다니면서 얻으러 다니고 그래야만 합니까? 물으러 다니고. 안방에 앉아서 탁마를 하면서 다 익어지면 의정조차도 없어지는 거라. 그런데 뭘 물어?

옛날에는 무슨 라디오가 있었습니까, 텔레비전이 있었습니까, 전화가 있었습니까? 유유히 이렇게 다니는 차가 있었습니까? 뭐가 있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몇백 리 몇십 리를 걸어서 탁마를 하러 다녔죠. 그렇지만 예전 시대하고 지금 시대하곤 다릅니다. 우리는 시대를 좇아서 물 흐르듯이 흘러야죠. 세상에, 하룻저녁에도 어디를 갔다 오고 이 국내 안에서도 어디 갔다 오고 어디 갔다 오고, 춤추는 거 보고, 여기 보고 저기 보고 또 세계 어디도 보고 뭐, 소련도 좀 잠깐 다녀오고, 어디 몇 군데를 다녀오십니까, 모두? 그러니 지금 시대가 공부할 수 있는 아주 너무도 좋은 시대예요.

그러니 우리 신도님들은 의합하고 화목하고, 자기가 알더라도 모르는 사람을 그저 안아 주고 키스해 주고, 허허허…. 서로 사랑하면서,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대로 서로 화목하게 이렇게 지내면서 우리가 서로 마음과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또는 전달하기 이전에 우리가 그렇게 유유히, 뭐든지 한생각을 내지 않아도 내 부하들이 여기 수두룩하게 많으니까 나가서 다 할 수 있게끔 만들고, 바깥에선 바깥에대로 해 주고 안에는 안에대로 하고, 우주적인 일은 우주적인 일대로 그 자리에 모두 부하가 있고 내가 있는 거라.

여러분이 내가 저 목성이나 저 천왕성이나 이런 데서 만약에, 그런 전체에 내가 다 있다고 그런다면 못 믿을 거예요, 아마.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달마 대사의 수염은 왜 없는고?” 해도 못 믿는데, 허허허…. “털이 많은데 왜 없다고 그래?” 이러고 못 믿는데, 허허허. 그 모습을 가지고 말한 게 아니에요. 그 뜻을, 마음과 마음을 서로 전달하는 표현을 어떻게, 알면 어떻게 하나 요것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것도 아주 사람 봐 가며 다양하게, ‘어떠한 사람으로서 나한테 물었나. 알쏭달쏭한 사람이 나에게 물었나. 모르는 사람이 이론만 가지고 나한테 물은 건가. 나를 근수를 달아 보려고 했던가.’ 이런 걸 다 요렇게 파악해서 한마디 대답하고, 어떤 때는 대답하지 않고 할 때가 있고, 어떤 땐 되물어서 다시 한번 찌를 때가 있어요. 이렇게 다양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내 마음을 깨치지 않고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속이려야 속일 수가 없어!

오늘은 그만 일어날까요.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86년 2월 17일 일반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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