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믿음 편 9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전북 김제에 위치한 금산사에 놀러간 적이 있다. 당시 우리는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 쓰인 법당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곳에는 여러 불상과 보살상이 모셔져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불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불교는 석가모니 한분만 신앙하는 종교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대적광전에 모셔진 여러 불상을 보고 ‘이게 뭐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측에 노사나불과 약사여래, 우측에 아미타불과 석가모니불 총 다섯 분의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물론 당시에는 법당에 모셔진 불상 가운데 석가모니불 이외에는 모두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부처님들을 협시하고 있는 보살들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왜 교조인 석가모니 이외에도 신앙대상이 그렇게 많은 것일까?

이러한 현상은 중국이나 한국, 일본과 같은 대승불교 전통에서만 볼 수 있다. 스리랑카나 태국과 같은 남방불교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다. 그들은 오직 석가모니 붓다 한 분만을 신앙하기 때문이다. 신앙대상이 많아진 것은 초기불교가 아니라 대승불교에 이르러 나타난 현상이다. 〈금강경>이나 〈법화경>, 〈화엄경>과 같은 대승경전 또한 붓다의 친설(親說)이 아니라고 해서 경전으로 인정하지도 않는다.

대승불교에서는 역사적인 붓다를 확대해서 다양하게 해석하였다. 즉, 붓다를 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과 중생들의 바람에 응하는 보신(報身), 그리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직접 중생의 몸으로 이 땅에 온 화신(化身)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를 삼신불(三身佛)이라 한다. 대표적인 법신불로는 비로자나불이 있으며 보신불로는 아미타불과 약사여래, 화신불로는 석가모니불이 있다.

이뿐만 아니라 그들은 시간적으로 석가모니 붓다 이전에도 수많은 붓다들이 존재했다고 생각했다. 이를 과거7불, 혹은 25불 등으로 설명하였고, 미래불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역사적인 붓다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시방삼세(十方三世)에 두루 계신 새로운 붓다로 거듭난 것이다. 이는 초기불교의 일불설(一佛說)이 대승불교에 와서 다불설(多佛說)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붓다를 보좌하는 수많은 보살들을 헤아리면 신앙의 대상은 정말 무한대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다불설이 등장한 것은 불교가 지니고 있는 성격으로 볼 때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특히 대승불교의 불성과 여래장 사상에서는 모든 존재가 깨달음의 주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존재의 실상을 깨치기만 하면 부처가 되므로 깨친 수만큼의 부처가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신앙의 대상이 많아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지금까지 신앙의 대상이 많아진 현상을 역사적으로 간략하게 설명했지만, 이것은 인간의 실존과 관련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초기불교가 유한할 수밖에 없는 인간실존의 문제를 치유하는 일반병원이라면, 대승불교는 온갖 다양한 병을 치료하는 종합병원에 비유할 수 있다. 환자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의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승불교는 어떤 환자라도 수용하는 종합병원이었고, 그 병원에는 질병에 따라 맞춤형 의사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

중생들은 몸과 마음이 아플 때는 증상에 따라 약사여래를 찾았다. 자비심이 부족해서 자신의 삶에 문제가 생길 때는 관음보살을 찾았고 지혜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문수보살을 찾았다. 또한 입으로만 말할 뿐 실천이 부족할 때는 보현보살을 찾아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는 아미타불께 극락왕생을 빌기도 하였다. 종합병원에 장례식장까지 갖추게 된 것이다. 이러한 중생들의 요구로 인해 불교는 다양한 신앙을 수용하게 되었다. 병원이 더욱 커져 수많은 환자들을 치유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아픈 사람 입장에서 보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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