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 이로우면 나도 이롭다

그림. 강병호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것이 무엇일까? 어느 날 갑자기 건강검진을 받아보니 암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것도 초기가 아니고 말기라는 것이다. 평생 잘 살았는데 왜 내가 암에 걸려야 하나? 억울해서 죽겠다.

생명체는 성장을 하고 번식을 하고 또 자극을 주면 반응을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생물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포는 원형질과 후형질로 이루어져 있다. 원형질은 중심 부위에 핵이 있고 핵을 둘러싸고 있는 세포질 물질이 있다. 이 생명체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체계화시키고 신에 도전한 최초의 사람은 다윈이다.

즉 생명의 진화론을 이야기했고 자연도태설과 종의 기원을 이야기했다. 다윈은 생명체는 생물 고유의 특성을 특정지우는 생물학적 정보를 저장하고 그 정보를 이용하며 다음 대에 물려주는 무언가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내게 손해처럼 보이는 이타행
깨달으면 손해 없음 알게 된다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성불하고 중생을 이롭게 한다

질서·조화 속에 있는 세포
다윈이 주장한 것을 더욱 깊이 연구한 사람이 멘델이다. 멘델은 그것을 유전자라고 했다. 이 유전자를 구체적으로 연구해보니 나선형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유전자의 본질을 밝혀낸 사람은 윗슨과 클릭으로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DNA구조를 밝혔다.

DNA구조를 보니 사람의 염색체 수는 46개인데 23개의 쌍으로 되어 있다. 남자나 여자나 22개의 쌍은 똑같고 마지막 한 개가 여자는 ‘XX’고 남자는 ‘XY’로 한 쌍이 다르다. 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다면 23쌍 염색체 두 개가 결합하는 것이다. 2의 23승개의 가능성을 가지며, 이것을 계산하면 840억 개가 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전자 조합은 840억 개의 가능성 중에 하나가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자녀는 부모의 빵틀이다. 다를 것 같은데 전혀 다르지 않다. 생명체를 좀 더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우리 몸 속에 있는 어떤 세포든지 질서와 조화를 벗어나는 세포는 한 개도 없다. 이것은 이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의 총체로 수억 겁을 살아오면서 우리의 업이 만들어낸 작용이다.

어떻게 이 몸뚱이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끝없는 질서와 조화 속에서 많은 세포가 자기 마음대로 활동할 것 같지만 한 개라도 자기 멋대로 활동하는 것이 없다. 전부 다 끝없는 질서와 조화 속에 있을 뿐이다. 질서와 조화가 깨질 때, 만약 세포 하나가 잘 났다고 모든 세포가 일정한 속도로 번식하는데 자기 혼자 빨리 번식하면 이것이 바로 암세포가 된다.

암, 질서와 조화의 파괴
몸 속에 있는 모든 세포는 일정한 속도로 번식한다. 그 중 한 세포가 다른 세포보다 훨씬 빨리 번식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우리 몸속에 없던 덩어리가 생겨서 목구멍을 막으면 식도암이 되고, 폐에 생기면 폐암이 되고, 위에 생기면 위암이 된다. 어디든지 조화와 질서를 무너뜨리는 순간 바로 암이 되는 것이다. 질서와 조화를 유지시키는 끝없는 공동체 의식 속에서 한 개라도 깨뜨려지면 그것은 암이 된다. 

우리의 정신도 똑같다. 끝없는 질서와 조화 속에서 무엇이 하나 허물어지거나 튀어나오거나 잘못되는 것이 정신병인 것이다. 육체에 생기는 병이 암이라면, 정신에 생기는 것이 정신병이다. 생명체라는 것도 질서와 조화 속에서 단독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 개라도 잘났다고 하면 전부 파멸해 버리는 것이다. 정신이라는 것도 정신적으로 모두 다 연결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은 물질 속에서 내 손에 자극을 주면 내가 아픈 것을 느낀다는 점이다. 생명체가 떨어져있다면 나하고 상관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자극을 주어도 아픈 것을 느끼지 못한다. 일단 내 몸에 붙어 있는 것이면 자극을 주면 내가 아프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지만, 태풍이 오고 이상기후가 닥치면 나를 포함한 더 큰 자신이 아픈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녀가 아프면 부모가 아플까? 새끼줄로 부모와 자식이 각각 끝부분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자녀가 아프면 부모도 아프다. 자녀보다 더 아픔을 느낀다. 한국에 전쟁이 터졌을 때 우리는 전쟁의 비극으로 슬픔과 아픔을 함께 느낀다. 바로 인류애라든가 동족애와 같은 정신적인 느낌은 연결되어 있지는 않아도 우리는 함께 느끼게 된다. 무아는 독립된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연결될 수 있는 뭔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할 수 있다.

탐·진·치서 계·정·혜로 이동
내 몸속에서 일어나는 탐·진·치를 계·정·혜로써 제거해야 한다. 내가 무아를 인식하고 무상을 인식하면 본질에 접근해가므로 충분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 깨달음은 무엇인가? 깨달음의 유용성은 알지 못했을 때보다 알았을 때 훨씬 더 큰 이익이 있다. 이처럼 내가 무상과 무아를 느끼면 마치 어마어마한 재산을 얻은 것과 같다.

부처님 경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스님이 산길을 가고 있었다. 산길을 가다가 도둑을 만났는데 도둑은 스님이 가지고 있던 은자를 다 털고 난 다음에는 혹시나 따라올까 봐 스님을 묶어놓았다. 그런데 주변에 묶을 것이 없어서 길가에 있는 긴 풀을 가지고 스님을 묶었다. 스님은 묶여 있는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풀을 끊고 갈 수 있었지만 스님은 땀을 뻘뻘 흘리며 그대로 묶여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나도 깊은 산속에는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 임금이 사냥을 나왔다가 그 길을 지나가게 된다. 스님이 풀에 묶여서 땀을 뻘뻘 흘리며 있는 것을 본 임금은 신하들에게 어서 스님을 풀어 주라고 하고 명령했다. 풀려 나온 스님에게 임금은 물었다. “스님! 왜 뜨거운 햇빛아래 땀을 흘리면서 풀에 묶여 있습니까?”

이에 스님은 이렇게 답했다. “임금님 고맙습니다. 임금님이 저를 풀어주셔서 저도 살리고 저 풀도 살렸습니다. 만약 소승이 힘을 주어 풀을 끊어 버리면 풀들은 죽게 될 것입니다.”

스님은 풀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땡볕에서 몇 시간을 땀을 흘리면서도 그냥 묶여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할 때 자신에게는 손해가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본질을 이해하고 나면 손해 보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된다.

혼란의 척도, 엔트로피
본질에 대한 이해를 얼마나 잘 하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 함께 살아갈 때 주어지는 내용은 혼란과 안정이다. 즉 엔트로피와 같은 것이다. 엔트로피 즉 혼란이라는 것은 우주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속성이다.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의 기본적인 속성은 혼란과 안정이다. 혼란한 상태에서 안정해지려고 하는 것이다. 안정해져야만 영생할 수 있고 연속할 수 있다.

우주는 멸망할 수가 없다. 혼자 있는 것은 혼란도가 100이지만 혼자 선정에 들어가 있으면 혼란도가 0이 된다. 이 우주를 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혼란도를 만드는 것은 내가 선정에 들어 열반적정에 드는 방법뿐이다. 우주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 최고의 방법이다.

우리가 결혼하지 않고 잘 못 살면 빵점짜리 인생이 되지만 결혼해서 사는 사람의 인생점수는 못살아도 60점, 잘 살면 80점으로 비교적 안정적이다. 그러나 혼자 살면서 잘하면 100점, 못하면 30점짜리 인생이 된다. 그래서 수행자가 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인과와 무아와 무상에 대한 철저한 확신이 없으면 혼자일 때 훨씬 더 힘들게 살 수밖에 없다. 스님은 스스로 묶인 풀을 왜 안 끊었겠는가? 무아에 대한 인식이 철저했기 때문에 그 풀을 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윤회의 실체
존재가 사라질 때 이생에서 다음 생으로 윤회하여 전생(轉生)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사실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즉 ‘나(我)’가 없다는 이야기다. ‘나’가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윤회가 설명될 수 있느냐? 부처님께서 <잡아함경>에 윤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윤회를 위해서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영혼과 같은 어떤 것이 반드시 옮겨가야 할 이유는 없다.”

어떤 실체가 있어서 옮겨간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윤회란 고정 불변하는 어떤 주체가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옮아가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변화하는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업이 이생에서 죽어 다음 생에 다른 몸뚱이를 받으면 그 업은 윤회한다는 것이다. 존재 그 자체가 계속 변화하는 것이 바로 윤회이다.

그것을 부처님께서는 “업과 과보는 있지만 그것을 짓는 본체는 없다”고 하셨다. 이 존재가 사는 것은 내가 이생에서 죽고 다른 존재로 계속 태어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것을 좀 더 쉽게 나비로 비유를 들었다. 나비는 알의 상태로도 있고 애벌레의 상태로도 있고 번데기 상태로도 있는데 결국 알이 애벌레가 되고 번데기에서 나비가 된다. 우리가 볼 때 알과 애벌레는 다르다. 또 애벌레와 번데기도 다르고 번데기하고 나비도 다른 모습이다. 이렇게 변하지만 알과 나비는 별개가 아닌 것이다.

알이 가지고 있는 속성에 의해서 나비가 되고 알이 변해서 나비가 될 뿐이다. 이것은 윤회하는 실체인 ‘나’가 없는 무아인데도 윤회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 이해해야 할 것이 있다. 모든 알은 나비가 되는가? 아니다. 나비알만 나비가 될 뿐이다. 모기알은 나비가 되지 않는다. 결국 나비알은 나비가 되고 모기알은 모기가 된다.

무아와 무상을 인식한다면
왜 무아와 무상을 알아야 되느냐? 무아와 무상을 제대로 알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삶이 이생으로만 끝나겠는가?

만약 윤회를 한다면 이생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생에서 몸 받고 살아가는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될 시간은 수억 겁이다. 지금부터가 정말 중요한 것이다. 진리를 아는 순간부터 내 삶은 변하기 시작하여 잘못된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게 된다. 예를 들어 여기에 불빛이 없으면 어둡다. 불빛이 있으면 밝아진다. 이런 부분들을 몰랐을 때는 욕심밖에 없지만 알고 나면 바르게 된다.

세세생생 사람 몸 받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바른 결정이 성불하게 만들고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은 곧 모든 중생이 이로운 것이다. 결국 모든 중생이 이로우면 내가 이로운 것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