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의 길, 시코쿠] 16. 고치현 순례 사찰 (상)
[정진의 길, 시코쿠] 16. 고치현 순례 사찰 (상)
  • 박지산 자유기고가
  • 승인 2019.03.08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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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생명력 지닌 고찰 만나다
시코쿠 순례 31번 사찰 치쿠린지 본당의 모습. 본존은 문수보살이다.
시코쿠 순례 31번 사찰 치쿠린지 본당의 모습. 본존은 문수보살이다.

이른 아침의 서늘한 냉기에 등이 시려 일어났다. 유리문 밖으로 나란히 서있는 무덤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죽은 자들의 옆에서 일어나는 산 자라니, 참 재미있는 경험이다. 잠시 무덤가로 걸어 나가 주변을 둘러 봤다. 아침 이슬로 묘비들이 반들거리는 것을 보려니 순간 티베트의 스승, 뒤좀 린포체의 고사가 생각났다.
뒤좀 린포체가 프랑스로 설법을 위해 왔을 때의 일이다. 뒤좀 린포체와 시자 스님이 프랑스의 마을길을 지나다가 공동묘지를 보았다. 대리석에 조각을 해서 아름답게 만든 묘비들을 보곤 시자가 말했다.

“여기 사람들은 정말 재미있군요. 죽은 이들을 위해 저렇게 공을 들여 아름다운 집을 만들어 주다니요. 죽은 이들은 저렇게 아름답고 훌륭한 집안에서 자면서도 그걸 누리지 못하지 않습니까? 무덤을 공들여 꾸미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짓이지요.”

그러자 뒤좀 린포체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살아있는 우리들을 위해서도 우리는 아름답고 훌륭한 집을 꾸미지 않느냐? 우리는 저기 누워 있는 이들의 과거이니라. 살아있는 시체들이지. 하루하루 죽어가는 우리는 우리를 위해 어리석게도 크고 아름다운 집을 만드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느냐?”

길가의 이름 모를 순례자 무덤들
무상의 가르침을 다시 상기시켜
순례 사찰 중 가장 아름다운 31번
‘푸름’ 가득… 문수보살의 가피도


무상을 깨닫기 위해 죽음을 관상하는 것은 동서양 모든 종교 전통의 공통점이다. 가톨릭 수도원 묘지에는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라는 경구로 산 자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순례길을 걷다보면 수많은 무덤들과 만나게 된다. 이렇게 공동묘지에 모인 무덤들 말고도 길가에 아무렇게나 서있는 무덤들도 많다. 오래돼서 다 닳은 묘비들을 읽어보면 근래 19~20세기에서 400년 전의 에도시대까지 거슬러 가는 무덤들이다. 길가에 서있는 무덤들은 대부분이 지쳐 쓰러진 순례자들의 무덤이다.

순례자가 길에서 죽게 되면 쓰러진 그 자리에 그대로 매장했다고 전한다. 짐에서 돈 몇 푼이라도 나오면 묘비를 세웠지만, 그조차 없으면 지팡이를 꽂아 묘비를 대신했다고 전한다. 그러니 1200년이 넘어가는 이 길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러져 갔는지 짐작할 수 없다.

순례자의 복장으로 수의인 흰옷과 묘비인 지팡이를 손에 쥐고 걸으면서도 몸이 피곤하다고, 날이 좋지 않다고, 길이 험하다고 등의 핑계에 사로 잡혀 순례자가 가져야 할 기본을 잊어버릴 때가 많다. 무상의 가르침, 단지 이번 생만을 위해서는 안된다는 기본 정신을 다시금 되새기며 묘지를 바라본다. 

아침 냉기에 으슬으슬한 몸을 문지르며 다시 숙소로 들어간다. 침낭을 말아 넣고, 배낭을 다 싸고도 시간이 좀 남았기에 불단을 정리하기로 한다. 화병의 꽃이 다 시들어 있었기에 꽃만 새로 꽂고 나가려다가 결국 대청소가 되어 버렸다.

물티슈를 꺼내서 불단을 전체적으로 닦고서 중앙에 모셔진 코보대사상을 보니 오랫동안 사람의 손이 닿질 않았는지 시커먼 먼지며 녹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더러워져 있는 불상을 보노라니 오래 전 구법승들에 관련된 이야기에 “길에서 탑묘와 불상을 보면 반드시 쓸고 닦은 뒤 예경하며 발원하였다”라는 말이 종종 등장하던 것이 기억났다.

시코쿠 순례길에 만나는 수많은 탑과 불상을 모두 깨끗이 할 수 없지만, 지금 내가 마음을 낸 이 순간만큼은 정성을 다하기로 했다. 적어도 내가 지난밤 따뜻하게 잘 수 있고 또 일어나자마자 무상에 대해 마음을 낼 수 있는 이 숙소에 대한 보은으로 불단을 청소하자고 마음먹었다.

불단을 치우고선 다시 숙소를 여기저기 치우니 거의 한 시간 반이 지났다. 너무 시간을 지체해도 오늘의 순례에 지장이 있기에 불단에 마지막으로 향을 올렸다.
“오늘도 힘내서 걷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29번 사찰 코쿠분지(國分寺)는 젠콘야도에서 4km 정도. 1시간 정도면 넉넉히 도착하는 거리다. 어젯밤 얼음물로 족욕을 해서인지 발이 탄탄하게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단 40분 만에 코쿠분지에 도착했다. 하늘이 영 흐려서 비가 오지 않을까 걱정된다.

코쿠분지는 앞의 현인 도쿠시마에도 있지만, 이곳 고치현에도 있다. 8세기경 나라시대의 쇼무천황은 일본의 각 ‘쿠니(國)’에 사찰을 하나씩 세울 것을 발원했다. ‘쿠니’란 우리말로는 ‘나라’라는 뜻이지만, 일본에선 현재의 ‘현(켮)’에 해당한다.

쇼무천황의 명에 의해 각 쿠니에는 각각 비구스님들의 도량인 코쿠분지(國分寺)와 비구니 스님들의 도량인 코쿠분니지(國分尼寺)가 세워졌다. 이곳 고치현의 코쿠분지는 741년 백제계의 후예인 쿄키 스님이 세웠다. 이후 한 때 사세가 기울었으나 코보대사가 중창하여 지금에 이른다.

굵은 나무들이 곳곳에 서있어 마치 숲속에 들어 온 듯한 느낌이 나는 도량이다. 본당은 16세기에 세워진 건물이지만 코쿠분지가 처음 세워졌던 시대의 건물은 그대로 모사해서 지었기에 건축사적으로도 중요하다고 한다.

촛대와 향로를 보니 아직 아무도 올리질 않았다. 오늘의 첫 공양을 올린다는 생각에 더욱 정성들여서 불을 붙였다. 예불을 다 올리고 다음 사찰로 향하려고 보니 단체 버스가 한 대 주차장에 들어온다.

새하얀 옷을 입은 단체순례자들이 질서정연하게 들어오는 산문을 조금 빗겨나가 순례길에 들어선다. 제30번 젠라쿠지(善樂寺)로 향하는 길은 논 사이로 나있다. 논두렁을 걸어가다 보니 길이 어딘지 알 수가 없어 이정표를 찾아 두리번거려도 길이 보이질 않는다. 왔던 길을 조금 되돌아가다 보니 풀숲 속에 반쯤 썩은 나무 이정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지도와 썩은 이정표를 집어가며 논길을 벗어나니 아침이슬에 바짓단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차도 옆으로 난 인도를 따라 고갯길을 하나 넘어가니 제30번 젠라쿠지에 도착했다. 제30번 젠라쿠지는 원래 사찰이 순례지가 아니라, 바로 옆의 토사신사(土佐神社)와 함께 붙어있었다. 그러다보니 메이지 시대에 신불분리령에 의해 사찰을 분해하여 고치 시내로 옮아가 안라쿠지(安樂寺)라는 이름으로 세워지고, 원래의 자리엔 빈터만 남게 되었다. 후에 새롭게 사찰을 세우고 시코쿠 순례의 순례지가 된 것이 지금의 30번 젠라쿠지이다.

몇 십 년 전까지는 이러한 역사적 문제로 고치 시내의 안라쿠지와 현재의 젠라쿠지간에 어느 곳이 30번 순례지인가에 대한 문제가 복잡했었다. 법정 공방까지 간 끝에 젠라쿠지가 30번 순례지, 안라쿠지는 오쿠노인으로 남게 되었다.

납경소에서 납경을 받고 나오니 비가 한 두 방울씩 떨어진다. 우비를 꺼내 입을까 하다가 좀 더 상황을 보기로 하고 출발한다. 비가 차라리 올 것이면 시원하게 내리면 좋은데 부슬부슬 왔다 그쳤다 하니 영 신경이 거슬린다. 그냥 맞고 걷기로 하고 터벅터벅 걸어간다.

31번 치쿠린지(竹林寺)가 있는 등산로로 들어가기 직전의 큰 길을 지나는데 전차길 옆의 술집에서 아저씨 한 분이 맨발로 뛰어 나온다.
“오헨로상! 쉬었다가!”

가게 문을 활짝 열곤 들어오라며 환영하는 덕에 얼떨떨하게 시원한 보리차를 얻어 마셨다. 덕분에 젖은 백의도 선풍기 바람에 조금 말릴 수 있었다. 주인아저씨의 말로는 젊어서 오토바이로 일본 일주를 한 끝에 이곳이 제일 좋아 가게를 차렸다고 했다.

“시코쿠를 일주할 때는 나도 88개소를 순례했어요. 순례자들을 보면 너무 반가워.”

아저씨는 출출할 때 먹으라며 술안주로 나오는 과자를 한 움큼 쥐어 줬다. 오늘도 감사한 보시를 받는구나 생각하며 가방에 집어넣었다.

31번으로 올라가는 길은 가정집 사이로 난 좁은 샛길이었다. 거기에 엄청난 경사에 그저 땅만 바라보며 오르다 보니 탁 트인 장소가 나왔다. 31번 사찰 옆에 있는 식물원인 마키노식물원이다.
순례길이 식물원 부지 안을 통해 가기에 “순례하시는 분들 중 식물원을 관람하시려는 분은 입장권을 구매해 달라”는 안내판이 순례길 옆에 세워져 있었다.

울타리를 건너 식물원 안으로 들어서니 가로등이나 계단 여기저기에 이정표가 붙어있다. 이정표를 따라 식물원 정문을 통해 나가니 바로 앞에 31번 산문이 나타났다.

시코쿠 88개소 중에 가장 아름다운 사찰이 어디냐고 질문을 받으면 나는 주저 없이 31번을 말한다. 31번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푸름’이다. 식물원이 옆에 있기도 하지만, 사찰의 정원도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사찰 전체가 푸른 생명력이 가득하다. 날이 개어 푸른 하늘이 보이는 치쿠린지는 더욱 눈부시게 빛났다.

문수보살을 모시는 치쿠린지는 일본 3대 문수도량의 한 곳으로, 코쿠분지를 세운 쇼무천황이 꿈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이곳을 찾아내 도량을 세운 것이 시작이다. 후에 코보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하며 중창하였고, 17세기 이후로는 고치현에서 학문의 중심지로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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