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품에서 진심으로 ‘참회’한 무기수
조국 품에서 진심으로 ‘참회’한 무기수
  • 정리=김지원 기자
  • 승인 2019.03.08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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㉘ 무기수 김희로(하)

1999년 9월 7일, 재일교포 무기수 김희로(65) 씨는 석방된다. 미결수로 구금된 기간까지 더해 31년 만의 석방이다. 김 씨는 석방과 동시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김 씨는 7년 이상 복역한 외국인 장기수를 국외 추방토록 하는 일본 법규에 따라 추방을 전제로 석방된 후 한국으로 귀화했다. 김 씨 품에는 그의 어머니 유골함이 있었다. 마침내 나는 김 씨 노모와 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재일교포 김 씨는 1968년 한 술집에서 “더러운 돼지새끼, 조센징”이라며 멸시한 야쿠자 2명을 죽이고 인근 여관에서 인질극을 벌인 ‘김희로 사건’의 주인공이다. 김 씨는 투숙객 13명을 인질로 잡고 일본 경찰과 대치하다 4일 만에 검거됐다. 체포 당시 김 씨는 혀를 깨물었다. 자결에 실패한 김 씨는 구마모토 형무소에서 24년을 복역했다.

약 20년 구명운동 끝에
‘추방’ 조건부로 가석방
귀국 후 폭력범죄자로서
비참한 말년으로 생 마감


김 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나는 김 씨가 투옥된 지 20년쯤 지났을 때 그와 처음 만났다. 그의 노모 박 씨가 지내는 요양원은 수시로 방문했지만 김 씨를 면회하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김 씨는 감옥에서 기독교에 귀의했기 때문에 나는 교화 목적이 아닌 일반 면회로 그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 이마저도 김 씨가 스님인 나를 만나지 않겠다고 하면 방법이 없었다. 

어렵사리 김 씨와 면회를 했지만 그는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와 요양원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자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다가왔다. 김 씨는 “어머니가 풍으로 쓰러지시기 전까지는 매일 면회를 오셨다”며 “요양원과 멀리 떨어진 구마모토 형무소로 이감된 뒤로는 몇 년째 뵙지 못해 어머니가 너무나 그립다”고 하소연했다.

당시 일본 현행법상 무기수로 복역한 지 10년이 넘은 모범수는 가석방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김 씨는 8번이나 교도소 표창을 받은 모범수였다. 하지만 그는 번번이 가석방 대상에서 제외됐다. 

나는 김 씨 노모와 한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을 드나들며 김 씨 구명에 나선 나는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김 씨 석방운동을 시작했다. 1990년 10만 명을 시작으로 ‘김희로 가석방’을 목표로 한 서명을 모아 세 차례 규슈 갱생보호위원회와 일본 법무성에 보냈다. 수만 명의 서명이 담긴 석방 청원서는 효력이 있었다.

그러던 중 잘 알고 지낸 한국 법무부 인사가 일본 법무성에 손을 써줬다. 덕분에 언제든 제약 없이 김 씨를 특별접견 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수년 간 김 씨와 면회하며 기록을 꾸준히 남겼다. 

어느 날 일본 대검 검사이자 교정국장이 나를 찾았다.

“스님, 이제는 석방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일본 법무성은 김 씨의 신원 보증인이자 신병 인수자로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그를 한국으로 데리고 갈 것을 제시했다. 일본 입국 영구 불허, 다른 말로 ‘추방’이었다. 교정국장은 “일본 형무소는 적법한 재판절차를 걸쳐서 형을 확정 지은 것이다. 그러니 김 씨가 한국에 가서도 일본에 대해 험담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가야한다”고 덧붙였다. 나는 그러겠다고 즉답했다.

출소를 1년 앞둔 1998년 김 씨의 어머니 박득숙(92) 씨는 요양원에서 숨을 거뒀다. 임종 직전 박 씨는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 하고 의식도 거의 끊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아들 이름을 “긴키로- 긴키로오(김희로의 일본식 발음)”하고 불렀다. 나는 아들과 한국에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는 고인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나는 석방 소식을 전하러 김 씨를 바로 만나야만 했다. 실제 석방까지는 순조롭지 않았다.
김 씨는 법무성 조건을 듣고 다른 조건을 달았다. 자신이 일본을 떠나기 전 어머니 묘소가 있는 곳에 3일간 머무르며 참배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조건이 허락되지 않는 한 일본 감옥에서 평생 살겠다고 선언했다.

일본 법무부 입장에서는 일본에서 머무르는 3일간 또 다시 인질극을 벌일지 모르는데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석방과 동시에 공항으로 이송한다고도 했다.

그러자 김 씨는 어머니 유골과 함께 한국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번에는 김 씨 어머니가 재가한 뒤 낳은 형제들의 반발이 문제였다. 의부형제 중 첫째 동생은 “김희로를 우리 가족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형무소를 드나들며 평생 어머니를 괴롭힌 그에게 어머니 유골을 맡길 수 없다고 단호한 입장을 전했다. 나는 일본어 통역가와 밤새 김 씨 의붓동생을 설득했다. 결국 분골해 반만 한국으로 가져가는 것으로 최종 합의했다.

야쿠자들은 김희로가 가석방된다는 소식을 듣고 김 씨를 죽이겠다고 나섰다. 김 씨는 물론이고 석방운동을 주도한 나까지 함께 해치겠다는 협박 편지가 끊이지 않았다. 김 씨가 죽인 야쿠자는 당시 지방 조직의 두목이었지만 그 사이 일본 3대 조직으로 커져 전국에 퍼졌다.

일본 법무성은 김 씨 석방에 대한 일시와 장소 등을 철저히 비밀로 했다. 김 씨와 내가 출소 직후부터 입을 방탄조끼까지 마련했다. 나는 스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양복 차림으로 김 씨와 함께 공항으로 이송됐다.

김 씨는 한국과 일본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귀국했다. 귀화한 김 씨는 친부 성 씨를 되찾아 권희로가 됐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김희로’로 기억했다. 부산에 정착한 그는 초반에는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할머니들을 위해 기부금을 내는 등 모금활동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 씨의 말년은 비참했다. 김 씨는 더 이상 민족차별에 저항하며 의로운 전쟁을 벌인 의인이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에게 흉기를 휘두르는 등 치정에 얽힌 폭력범죄자로 다시 한국에서 쇠고랑을 차기 시작했다. 

이미 귀국 당시 71세 고령의 나이였던 김 씨는 후견인이 필요했다. 나는 김 씨가 감옥에서 얻은 전립선암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약 12년 간 그의 생활비를 지원했다. 김 씨는 죽기 전 나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스님이 아니었으면 제가 어찌 조국에 돌아와서 10년 넘게 동포들과 살다 갈 수 있었겠습니까. 참 고마웠습니다. 참회합니다. 용서해주세요.”

나는 그의 마지막 말에서 진심을 느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유골의 반은 김 씨 아버지의 고향에, 절반은 어머니 유골이 있는 일본 땅에 전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김 씨의 첫째 의붓동생은 유골을 합장하지 않겠다고 했고, 대신 다른 여동생이 김 씨 유골을 거두기로 했다. 나는 김 씨 유골을 조금 남겨 가지고와 그가 인질극을 벌인 후미여관에 뿌리면서 “이 현장에서 비로소 ‘김의 전쟁’은 끝났다”고 읊조렸다. <>

태극기와 모친의 유해를 안고 귀국한 무기수 김희로 씨와 영정을 든 삼중 스님.
태극기와 모친의 유해를 안고 귀국한 무기수 김희로 씨와 영정을 든 삼중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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