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제2칙 설봉보청(雪峯普請ㆍ설봉의 대중울력) 2

[評唱 2]

只如 雪峯普請處 踏倒這僧. 歸?似長生 長生是箇活潑潑地漢 便道 “和也須替這僧 入涅槃堂始得” 只這雪峯老漢 也好當時便休去 到這裏 作?生湊泊也. 須是三根椽下五尺單前 靜坐究取始得.

설봉이 대중울력 하던 곳(普請處)에서 이 스님을 밟아버렸다. 그리고는 돌아와 장생(長生)에게 (앞의 일을) 전했는데, 장생은 활발발(活潑潑)한 사람이라서 곧장 말하기를 “화상께서야말로 모름지기 이 스님 대신 열반당에 들어가셔야 합니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때) 다만 이 설봉 노장이 당시에 바로 쉰 것(休去)도 괜찮았지만, 여기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머물러야 하겠는가? 모름지기 삼근연하 오척단전(三根椽下 五尺單前, 선상)에 고요히 앉아 참구해야 한다.

看雪竇老婆 拈似與諸人. 到這裏見得去 自然打著南邊動北邊 ?拈起 便眼卓朔地. 雪竇拈? 他這因緣 人多邪解 別生知見義路 只管解將去 殊不知雪竇意元不如此. 且道 他意在什?處. 也好與一踏. 且莫錯會.

설두가 노파심으로 (이 공안을) 염해서 모두에게 보여 준 것을 보라! 여기에 이르러 (설두의 뜻을) 보았다면, 남쪽을 치니 저절로 북쪽이 움직여서 염하자마자 바로 안목이 뛰어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설두가 문제를 제기한(拈?) 이 인연을 사람들이 대부분 그릇되게 알고, 따로 지견(知見)과 의로(義路)를 일으켜 단지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하니, 설두의 뜻이 원래 이와 같지 않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자, 말해보라! 설두의 뜻(雪竇意)이 어디에 있는가? (여기에다 이러쿵저러쿵 하는 놈들은 모두 다) 한 번 밟아버려야 한다. 그러나 또 잘못 알지 말라.

장생교연의 활발발(活潑潑)에 관해 몇 가지를 소개한다(전등록 제 18권, 복주 장생산 교연 선사 편).

①설봉이 (장생에게) 물었다.

“경을 수지한 이는 능히 여래를 짊어 질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떤 것이 여래를 짊어지는 것인가?”

(그러자) 장생이 이내 설봉을 방망이로 치고는, 선상禪床 위에 놓았다.

②설봉이 (장생에게) 물었다.

“빛과 경계가 모두 없어지면, 또 이것은 어떤 것(무슨 물건)인가?”

스님이 말했다.

“교연(皎然, 저)의 허물을 용서해주시면 감히 상량해보겠습니다.”

설봉이 말했다.

“그대의 허물을 용서해주면 어떻게 상량하겠는가?”

스님이 말했다.

“교연 또한 화상의 허물을 용서해드리겠습니다.”

설봉이 깊이 인정하고, 뒤이어 수기를 했다. (후에) 장생산에 머물면서 교화를 베풀었다.

남쪽을 치니 (저절로) 북쪽이 움직인다(打著南邊動北邊)는 표현은 진대(晉代)의 승려 배도화상(杯渡和尙, 322~400)의 일발가(一鉢歌)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중략) 打著南邊動北邊 若覓法鷄足山中問迦葉 大士持衣在此中 本來不用求專甲 (중략)

남쪽을 치니 (저절로) 북쪽이 움직이는데 / 만약 법을 찾는다면 / 계족산 중의 가섭에게 물어라 / 대사는 옷을 가지고 이 속에 있지만 / 본래 한 벌의 옷도 구할 필요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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