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믿음 편 8

나는 수영을 못한다. 초등학교 4학년 이후로 수영장을 가본 적도 없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님은 내게 자주 말씀하셨다. 내 사주에 물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나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런 때문인지 성인이 되어 어디를 놀러갈 때도 ‘물에 가까이 가지 말라.’는 아버님의 당부는 끊이지 않았다. 나는 수영을 못하기 때문에 물에 빠지면 누군가 구해주지 않는 한 물에서 나올 수 없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신앙도 수영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두 생로병사라는 고통의 바다(苦海)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존재다. 종교적 신앙은 바로 온갖 괴로움이 가득한 이곳(此岸)에서 즐거움이 가득한 저곳(彼岸)으로 건너가는 여정이다. 자력신앙은 우리 모두 수영을 해서 피안의 세계로 갈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와 달리 인간은 수영을 못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힘을 가진 누군가의 은총에 의해서만 물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입장이 타력신앙이다.

지난 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불교는 전형적인 유형의 자력신앙이다. 모두가 수영을 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비록 지금은 수영을 못 하더라도 충분히 노력해서 그 능력을 향상시키면 고통의 바다에서 나올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인간은 스스로 수행을 통해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 깨달음, 즉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붓다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적어도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대승불교에 오게 되면 자력신앙과는 전혀 다른 유형을 보이기도 한다. 바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절대적 힘을 가진 존재에 의지해서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즉 정토(淨土)에 낳기를 바라는 신앙이 등장한 것이다. 정토신앙은 전형적인 유형의 타력신앙이다. 불교의 교조인 붓다의 교설과는 다른 입장이다. 자력신앙과 타력신앙이라는 서로 이질적인 두 입장이 불교 내에서 공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반적으로 자력신앙과 타력신앙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 붓다의 가르침과 타력신앙은 어울리지도 않는다. 깨달음을 본질로 하는 불교의 정체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대승불교에서는 붓다의 가르침과는 다른 정토신앙을 제시한 것일까? 여기에는 죄가 너무 깊어서 스스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인간마저 모두 구원하겠다는 간절한 서원(誓願)이 담겨있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의 도움을 빌려서라도 수영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모두 건지겠다는 것과 같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모두 괴로움이라는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존재다. 붓다는 누구나 스스로 헤엄쳐 나올 수 있다고 용기를 주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수영을 못해 스스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너는 충분히 수영해서 나올 수 있으니 힘을 내라고 할 것인가? 수영을 배우는 사람에게 ‘할 수 있다’는 말은 큰 용기와 격려가 되지만,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위급한 상황에서 이 말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바다에서 이끌고 나올 수 있는 구조대원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나처럼 수영을 못 하는 사람이 위험에 빠진 상황을 고려해서 긴급하게 특수 구조대를 파견하였다. 그들은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이들이 무사히 나올 수 있도록 구원의 손을 내미는 존재를 방편으로 설정하였다. 그 구조대장이 바로 아미타불이다. 든든하면서도 절대적 힘을 가진 존재가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정토신앙에서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면 정토에 낳을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처럼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겠다는 염원을 담아 타력신앙을 방편적으로 설정했다. 다양한 방편을 포용하는 것은 대승불교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얼마 전 치아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위아래 모두를 발치하는 큰 공사를 했다. 발치를 할 때 물론 마취를 했지만 솔직히 두려운 마음이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속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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