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에서도 그날의 함성을…

3.1운동은 한국 근대민족운동사의 정점으로 근대민족운동의 상징이다. 이런 3.1운동에서 불교계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불교계의 3.1운동은 그 이면에 역사적으로 흘러온 호국불교, 대승불교, 민족불교의 정신이 바탕이 됐다. 불교계의 3.1운동을 성찰, 그 의미를 재인식하여 오늘날 불교 정신의 재정립과 계승의 근간으로 삼는 것은 후학들의 과제다. 다양한 사료 등을 바탕으로 불교계의 당시 운동을 정리해보았다. <편집자 주>

김룡사 
 4월 13일 독립만세 운동

1919년 3월 25일 문경 김룡사 공비생(출가 교역자가 되기 위해 교단의 육영장학금을 받아 공부하는 학생)으로 불교중앙학림에 유학 중이던 전장헌이 구두 밑창에 독립선언문 한 장을 숨겨 김룡사에 와서 전해주고 다음날 급히 상경했다.
이것이 기폭제가 돼 4월 11일 오후 7시쯤 김룡사 지방학림 기숙사에서 송인수, 성도환 등 두 명이 만세시위를 위한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학생들을 촉구해 궐기를 준비했다. 당시 기숙사에는 최덕찰 외 10여 명이 있었고, 13일 일제 식민통치기관인 헌병주재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기로 했다. 
김룡사 부설 지방학림 학생들 18명은 13일 오후 3시 수업을 마친 후 독립시위를 위해 각자 태극기 4매를 준비해 일제 헌병경찰주재소가 있는 대하리에 가서 만세를 부르고자 산문을 나섰다. 산문 앞에서는 김룡사 주지인 혜옹 스님이 앞을 가로막았다.
김철, 민동선의 증언에 따르면 만세운동 당시 김룡사 지방학림에는 본·말사에서 파견된 공비생과 신교육을 갈망하던 상주, 문경, 예천 등지 불교신도 가정의 자제들을 합해 학생 수가 80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수업 연한이 2년이었으니 당시 1개 학년은 40여 명이었다. 학생들은 30명이 1개의 단을 구성해 태극기와 독립선언문, 또 경고문까지 감춰 길을 나섰지만 주지스님의 저지로 귀사하게 됐다. 14일 헌병들이 들이닥쳐 학생들을 교실에 몰아넣고 문전에서 차례로 결박해 27명을 문경 헌병대로 잡아갔다. 헌병대에 10여 일 구치돼 호된 심문을 받은 뒤 24명은 가까스로 풀려나오고 송인수, 성도환, 김훈영 등 3명은 상주지청에서 재판에 넘겨져 형을 받았다. 송인수, 성도환 두 사람은 결국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재판을 받기까지 한 달여 동안 모진 고초를 당해야만 했다.

봉선사 
3월 29일 광릉천 만세시위

김성숙(1898~1969)은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날 당시 봉선사의 스님으로 있었다. 만세시위 소식을 들은 김성숙은 1919년 3월 29일 봉선사 스님인 이순재(李淳載), 김석로(金錫魯), 강완주(姜完珠) 등과 함께 진접면 부평리 인근의 동리 주민들을 모아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고, 구체적인 실천방법으로 시위의 전개와 방침을 알리는 문건을 비밀리에 제작· 배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이들은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 임시사무소(臨時事務所)라는 명의로 동료들과 함께 격문을 만들었다. 이 격문의 취지는 ‘파리강화회의에서 12개국이 독립국이 될 것을 결정하였으므로 조선도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독립운동을 하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으로써 그들은 약 200매 정도를 작성하여 인근 동리에 배포하였다. 봉선사 승려들의 만세시위를 선도하는 이러한 움직임은 이후 3월 31일 부평리 만세시위에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독립문서의 배포 사건으로 김성숙은 동료 승려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성숙은 출옥한 후 봉선사로 잠시 되돌아 갔으나, 곧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3년에는 불교 유학생으로 중국의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간 뒤,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차장으로 활동하였고, 광복 후에는 혁신정당을 조직하여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1969년 4월 12일 사망하였다. 

신륵사 
 4월 3일 신륵사 만세운동

1919년 3월 26일과 27일 여주 주내면 상동리의 조병하와 심흥훈이 보통학교 학생들과 독립만세 시위를 준비했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4월 1일 이포에서 2000여 대중이 일본헌병대와 충돌했으며, 4월 2일 여주읍내서 1000여 명과 복내면 장암리에서 경성농업학교 학생과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펼쳤다. 신륵사 김용식 스님은 4월 3일 신륵사 인근 백사장에서 200여 대중을 모아 만세운동을 펼쳤다. 4.3만세시위를 조장한 혐의로 스님은 징역 2년형을 선고했으며 옥고를 치른다. 스님은 이후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만주로 갔지만 밀고로 도망을 다니다 신륵사로 돌아왔다. 

쌍계사 
 4월 6일 화계장터 만세운동

쌍계사 스님 김주석(金周錫)과 학생 양봉원(梁鳳源), 정상근(鄭相根), 이강률(李康律), 이정수(李汀秀), 임만규(林萬圭), 이정철(李正哲) 등은 4월 6일 화계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날 시위에 참여한 인원은 300명 수준으로 실제 참석 인원은 300명을 웃돌았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경찰들은 만세를 외치는 청년과 주민을 닥치는 대로 연행했으며, 김주석 스님을 비롯한 학생과 청년 등 주동자들이 검거됐다. 주동자들은 검거됐지만 화개장터 만세운동의 여파는 이어졌다. 이튿날인 4월 7일 하동보통학교 4학년 박문화 등 160여 명의 학생들이 소풍을 가는 길에 화개장터에서 만세를 불렀으며, 4월 6일 거사에서 검거를 피한 이강률, 이정수, 이정철, 임만규 등이 4월 11일 제2차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하지만 4월 11일 화개장터에서 4명이 검거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후 이들은 보안법 위반 죄목으로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과 마산지청에서 재판을 받아 쌍계사 김주석 스님은 징역 6개월, 이정수 징역 10개월, 이강률·이정철·임만규 징역 8개월 등의 형을 받았다.

대흥사 
불교전문강원 만세운동 추동

만해 한용운으로부터의 부탁으로 서울지역 연락책 등으로 활동한 응송 박영희는 광주를 거쳐 대흥사에 도착하여, 그 곳 승려인 정재성(鄭在成), 정흥창(鄭興昌), 김재선(金在善) 등에게 해남지역 만세운동을 추동하게 하였다. 그리고 완도로 들어가서는 오석균(吳錫均)을 만나서 선언서와 태극기를 주고 만세운동을 부탁하였다. 그 후에는 화엄사로 나와서, 중앙학림 출신으로 만세운동을 권유하려고 와 있던 정병헌을 만나서 구례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하도록 조언을 하였다. 이렇게 해남의 대흥사, 완도, 구례의 화엄사 등에 3.1운동의 파급을 위해 노력을 하고 응송은 상경하였다.

동화사 
3월 30일 동화사 포교당 독립만세 시위

대구지역 3·1운동은 크게 세 차례 일어났다. 제1차는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에서, 제2차는 3월 10일 덕산정 시장에서 일어났다. 제3차는 3월 30일 동화사 지방학림 스님들이 덕산정 시장에서 일으켰다. 
제3차 3·1운동을 위해 서울 불교중앙학교 학생 윤학조(尹學祚)는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가한 후 고향으로 내려와 권청학(權淸學)·김문옥(金文玉) 등 후배들을 만난 자리에서 동화사 지방학림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모두 대구 덕산정 시장(남문밖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합의하였다. 3월 28일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 전원은 동화사 심검당(尋劒堂)에 모여 3월 30일에 거사를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태극기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3월 29일 9명의 학승(學僧) 대표들이 동화사를 떠나 대구부 덕산정에 있는 동화사 출장소 김상의(金尙儀)의 집에서 시위를 준비하였다. 이 출장소는 당시 동화사의 포교당이었다. 이들은 3월 30일 오후 2시 남문밖 시장에서 수많은 장꾼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일으켰으나 일본 경찰들의 출동으로 시위는 제지를 당하였고 주도자들은 붙잡혔다. 지방학림 스님 권청학·이문옥 등 9명은 재판에서 10월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표충사 
4월 4일 태용리장터 독립만세 시위

1919년 2월 말경 범어사 스님 대표 7명은 만해 한용운의 지시로 상경하여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귀향하여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3월 20일 통도사 승려 50명이 밀양군 단장면 표충사에서 표충사 스님들과 비밀회합을 갖고 만세시위를 협의했다. 이들은 거사일을 4월 4일 태룡리장날로 정하였다.
드디어 4월 4일 태극기를 가지고 온 장석준(張碩俊) 등을 비롯한 표충학원 학생들은 재빨리 이를 스님들과 모여드는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오후 12시 30분 이장옥(李章玉), 이찰수(李刹修), 오학성(吳學成), 손영식(孫永植), 김성흡(金性洽), 구연운(具蓮耘), 오응석(吳應石) 등 표충사 스님들은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높이 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다. 시위대는 곧 헌병주재소로 몰려갔고 주재소는 군중들의 투석으로 유리창, 지붕, 벽 등이 전파되었다. 이에 밀양 헌병분견대로부터 일본군 헌병이 급파되어 이들의 발포로 오후 1시 30분 군중들은 해산하였다.

 

통도사 
3월 13일 신평장터 독립만세 시위

서울의 3·1운동에 참여한 경성 중앙학림 학생인 오택언(吳澤彦)은 한용운(韓龍雲)의 지시에 따라 독립선언서를 휴대하고 1919년 3월 4일 통도사에 도착한 후, 통도사 지방학림의 학생대표 김상문(金祥文) 및 통도사 강원 승려 등과 함께 3월 13일 신평 장날에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밀고자에 의해 계획이 탄로나고 오택언이 체포되었으나, 3월 13일 신평장터에서는 하북면 줄다리기 대회를 빙자하여 군중집회가 개최되었다.
이때 통도사 부속 보통학림 및 지방학림 학생 수십 명과 불교 전수부 학생 10여 명, 승려 10여 명 등이 신평장터에서 군중들과 합세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출동한 헌병과 경찰에 의해 군중들은 강제 해산되었으며, 시위 주모자인 김진오(金鎭五, 이명 金鎭玉)가 체포되었다. 이외 다른 시위 주모자인 김상문은 피신한 후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특파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하북면사무소에 근무하며 거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박세문(朴世文, 이명 朴世玟)은 면서기직을 사임하고 일본으로 피신하였다가 체포되었다.

범어사 
3월 18일 범어사 학생 만세운동

1919년 3.1운동을 앞둔 2월 하순 만해 한용운이 범어사로 내려와 오성월(吳惺月)을 비롯해 이담해(李湛海), 오이산(吳梨山) 등을 만나 만세 시위에 참여할 것을 독려했다. 이에 범어사 주지 오성월, 이담해 등은 김법린(金法麟), 김영규(金永奎), 차상명(車相明), 김상헌(金祥憲), 김상기(金相琦), 김한기, 김봉한 등 범어사 스님과 명정학교 및 범어사 지방학림 학생 7명을 범어사 대표로 하여 서울 3·1운동에 참가하게 했다. 이들은 3월 4일 독립 선언서 등 문건과 만세 시위에 참여한 경험을 가지고 범어사로 돌아왔다.
이 무렵 서울의 만세시위 소식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부산에서도 3.1운동의 열기가 달아올랐다. 이에 부산에서는 3월 11일 부산진일신여학교(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 학생들과 기독교도의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3월 13일 동래고보(현 동래고등학교)의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이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범어사 관계자들은 3월 8일 동래 장날에 맞추어 만세시위를 시도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범어사의 승려와 학생들은 새로운 거사일을 역시 동래 장날인 3월 18일로 잡고 동래 장터 일대를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마침 하루 전날인 3월 17일은 범어사 명정학교와 범어사 지방학림의 졸업식이 있는 날이었다. 이날 밤 개최된 졸업생 송별회 자리에서 김영규가 축사 도중에 만세시위를 독려했다.
시위의 주동자들은 어둠을 틈타 두 편으로 나누어, 18일 새벽 동래 복천동에 있는 범어사 동래포교당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사전 누설로 일본 헌병과 경찰에 의해 김영규, 차상명, 김상기, 김한기 등이 연행되고 나머지는 강제 해산됐다. 이에 검거를 피한 이근우, 김해관, 김재호, 윤상은 등 40여 명의 명정학교와 범어사 지방학림 학생들과 함께 동래읍성 서문 부근에서 동래 시장을 거쳐 남문까지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19일 오전 허영호가 주도하여 다시 한 차례 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고, 그 후 각각 두 차례의 시위를 더 감행했다.

해인사 
3월 31일 해인사지방학림 학생 독립만세 운동

황해도 해주군 출신으로 당시 해인사 부속 지방학림 학생인 홍태현(洪泰賢)은 그곳 학생인 백성원(白聖元), 김경환(金景煥), 김성구(金聖九) 등과 더불어 해인사 내 지방학림 기숙사에서 의거를 모의하였다. 1919년 3월 31일 오전 11시경 해인사 홍하문(紅霞門) 밖에 2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먼저 독립만세를 불렀다.
학생들은 오후 1시 해인사경찰관주재소로 몰려가 시위를 하였으나 경찰들이 총을 발사하여 일단 해산하였다. 그날 밤 11시경 150여 명의 군중들이 다시 봉기하여 해인사 앞 도로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자 학생들은 이들과 합류하여 독립만세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곧 일제 경찰들에 의해 강제해산을 당하고 말았다. 시위에 앞장 선 홍태현은 검거되어 1919년 6월 11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6월형을 언도 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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