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항일사, 연구로 되살리다

불교계가 건립한 중앙학림 전경. 중앙학림과 지방학림·사찰이 연계된 불교계 만세운동이 최근 연구를 통해 조명됐다.

불교계의 항일운동에 대한 연구는 만해 한용운·백용성·백초월 등 명망있는 스님들을 중심으로 이뤄져 온 것이 그간의 상황이다. 당시 불교의 종합적 상황이나 운동 과정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나마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소장 원철)가 지난 2017년부터 불교계의 항일운동을 총체적으로 연구해 신문·잡지·판결문을 망라한 자료집과 종합적 연구 성과를 담은 논문집들을 발간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관련 논문집·자료집 발간

기독교 주도 철원애국단
철원 도피안사서 결성돼
신상완 등 승려들도 참여

숨겨진 항일인사들 발굴돼
지방학림 만세운동 재조명


실제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가 수 차례의 세미나를 거쳐 발간한 연구논문집에는 새롭게 조명해야할 역사적 사실들과 인물들이 기록됐다. 

이경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의 ‘철원애국단 사건과 불교계 항일운동’을 발표하고 강원도 내 독립운동에서 불교계 인사가 어떤 활동을 펼쳤는지를 살피고 있다.

철원애국단은 독립운동단체 중 규모나 활동 면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상해 임시정부의 연통제 역할을 수행했던 한국독립애국단의 지방조직으로 결성부터 활동까지 대부분 기독교인이 주도했다.

하지만 이경순 학예사는 철원애국단이 도피안사에서 결성하게 된 이유와 철원애국단 사건에 연루된 승려들의 행적에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도피안사는 철원 지역의 대표 고찰로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던 곳이었다. 특히 도피안사 중건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신도 강대용이 일정 수준 관련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경순 학예사는 “당시 지역 유지였던 강대용이 철원 지식인들이 참여하는 애국단 활동에 관심을 안 기울일 수 없었을 것”이라며 “당국의 의심을 피하면서도 거주지에서 멀지 않고 지역민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도피안사를 결성 장소로 택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여기에는 당시 주지 홍월운 스님의 묵인과 결단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경순 학예사는 철원애국단 사건과 관련된 불교 승려인 신상완, 김상헌의, 이석윤의 행적도 살폈다. 특히 신상완은 철원애국단이 10월 제2 만세시위를 계획·실행하는 데 직접적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이경순 학예사는 “신상완은 임시정부 내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국내외를 오가며 상해 임시정부의 지시를 국내에서 실행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며 “그러던 중 철원애국단과 직접적으로 접촉해 시위를 주도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김상헌과 이석윤 역시 3.1운동을 경험했고,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결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수행했던 인물들”이라고 설명했다.


 

조계종 불교사의 연구소가 2017년부터 내놓은 3.1운동 관련 연구·자료집.

무엇보다 숨겨졌던 항일인물들이 새롭게 조명된 것은 큰 성과이다. 황인규 동국대 역사교육학과 교수는 미국 하버드대학의 첫 한국인 박사가 통도사 승려 출신 박민오(朴玟悟, 1897~1976)임을 밝혔다. 그는 3.1운동 당시 학생 대표로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고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활동한 바 있다.

황인규 교수에 따르면 박민오의 속명은 박노용으로 1897년 경남 남해 섬마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1살 때 집을 나와 양산 통도사로 출가했으며, 6년간 통도사에 머물렀다. ‘민오(旼悟)’라는 법명도 이때 받았다. 통도사 주지였던 구하 스님이 서울 중앙학교(중앙중·고등학교 전신)를 인수해 교장을 맡고 있던 인촌 김성수에게 박민오를 추천해 입학하게 됐다.

서울 중앙학교 4학년 급장을 맡기도 한 박민오는 3.1운동 당시에는 행동대장 역할을 맡아 독립선언서 배포와 민중동원에 나섰다. 3.1운동의 시작과 더불어 중앙학교 학생 등과 협력해 혁신단을 결성하고 ‘혁신공보’를 매일 발행해 독립운동을 고취시키는 데 매진했다. 1919년 9월에는 혁신단 특파원의 임무를 띠고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때마침 국내에서 혁신단의 독립운동자금 모집 등이 탄로되면서 백초월, 백성욱 등이 체포됐고 박민오는 곧바로 수배대상으로 떠올랐다. 그는 한동안 임시정부의 일을 도왔지만 그곳도 재정적 어려움을 겪자 1921년 뉴욕으로 건너갔다.

도미(渡美)한 박민오는 인쇄공, 행상, 접시 닦기로 일하면서도 에반스빌대학, 노스웨스턴대학을 거쳐 미네소타대학에서 학사학위를, 하버드대학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박민오는 <중국인의 기회> 등 저서를 잇달아 출간해 호평을 받았으며, 동양학 분야에서 이름이 널리 알리기도 했다.

김광식 교수는 해인사 주지를 지낸 이고경 스님이 만당 당원이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고경 스님은 해인사 주지 퇴임 이후 법보학원에서 민족교육을 하다가 1942년 12월 왜경에 체포됐고, 1943년 1월 고문 끝에 순국했다. 이런 업적으로 지난 2011년 이고경 스님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게 됐다.

김광식 교수는 “고경 스님은 1920년대 전반기에 만해 한용운 스님을 만나고 그의 민족불교 노선을 따랐고, 1930년대 해인사에 복귀해서도 이런 노선을 이어갔다”고 설명했다.
3.1운동 당시 이뤄진 해인사, 통도사, 표충사 등의 만세 운동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진 것도 연구의 성과다. 특히 중앙학림과 지방학림, 사찰이 연계되는 만세운동의 정황을 확인한 것이 주요하다.

한상길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는 2회에 걸쳐 통도사·표충사·김룡사의 만세운동을 조명했다. 한상길 교수는 “불교계의 3.1운동은 청년 승려와 각 사찰의 학교인 지방학림과 보통학교 등의 학생들이 주축으로 참여했다”면서 “사찰은 만세운동을 기획하는 회합을 열기에 적합했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등의 물품을 제작하기 어렵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용운과 유심사에 모여 만세운동을 기획했던 중앙학림 학생들은 대부분 각 사찰의 지방학림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본적에 따라 지방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주동했다”며 “불교계 3.1운동의 시작과 끝은 지방학림”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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