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검속·친일조직 방해에도
‘굳세어라!’ 불교계 항일운동

신문과 잡지는 당시의 시대상과 사건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언론에 기록된 불교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소장 원철)는 지난 2017년 1년간 불교 3.1운동 및 항일운동과 관련된 신문 등의 자료를 수집했고, 이를 자료집으로 발간했다. 또한 민족사가 발간한 <한국불교 100년>의 사진 도판으로 실린 신문과 잡지 자료들도 당시 상황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이들 자료에 따르면 당대 불교계 독립운동 기사를 통해 우리는 ‘3.1운동 발발 직후’와 ‘통합 임정 출현’을 기점으로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불교계 항일 움직임은 1919년 3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싹텄다. 3.1운동 발발 직후 스님, 불자 등은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만세운동을 한 사실이 확인된다. 실제 매일신보 1919년 4월 3일 “대구 동화사서 포교소에서 승려 10명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러 일제에 검거됐다”고 보도했으며, 4월 22일에는 “밀양 표충사 승려가 농민들을 선동해 시위운동을 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사찰서 시위운동과 관련된 유력 증거품 등이 발견돼 경찰에 압수된 사건이나 만세운동을 펼치다 단속에 잡혀간 스님들에 대한 소식이 신문에 다수 실렸다.

이는 최근 연구·주목받고 있는 지방학림 스님들의 만세 유도 활동의 단면을 확인할 수 있는 단초다.

반대로 친일불교세력들도 활동한 정황도 확인된다. 김용곡 스님이 조선불교 30본산 기관지인 ‘조선불교총보’에 기고한 ‘경고법려’가 대표적인 보도 사례다. 그는 기고문서 불자 청년들의 항일운동 가담을 반대하는 내용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듬해엔 불교계 인사가 참여한 선언서들이 나왔다. 1920년 1월 1일 독립신문에 게재된 의친왕 선언서 명단에는 백초월 스님의 이름이 포함됐다. 그해 3월 1일에는 대한승려연합회 명의로 작성된 불교선언서가 독립신문에 게재됐다. 일명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는 1919년 11월 상하이에서 작성·발표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당해 파리강화회의 참석하는 세계 각국 외교관에게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당대 언론은 민족대표 33인 만해 한용운·백용성 스님이 수감 중과 출옥 후 보인 행보도 집중 조명했다. 

동아일보는 1921년 8월 28일자 사설서 백용성 스님의 역경사업 조직체인 ‘삼장역회’ 출범 의의를 보도했다. 스님은 삼장역회를 바탕으로 최초로 역경한 순한글 금강경 <신역대장경> 등을 펴낸다. 1921년 12월 23일, 동아일보는 한용운 스님이 출옥한 당시 모습과 발언을 보도했다. 기사에는 스님이 밝힌 “지옥에서 극락을 구하라”는 감상이 포함됐다.

일본 당국의 탄압은 점점 심해졌지만 불교계는 항일운동의 조직 규모와 활동범위를 넓히는 일을 계속해나갔다. 군자금을 마련하다 적발돼 체포된 뒤 총살당한 신지찬 스님의 기사를 비롯해 식민지 불교정책에 반발한 ‘사찰령 폐지운동’, 교계가 합심해 민족해방을 위한 대규모 계획을 세웠지만 발각돼 실현하지 못한 사건 등을 기록한 기사들은 이를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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