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자주주의 입각한 비폭력 평화운동
감복했던 타고르 ‘동방의 등불’ 노래해
운동 계기로 임정 수립… 현재로 이어져
잊혀진 불교 인물들 연구·발굴 노력해야

그림-강병호

2019년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맞이하여 정부, 시민단체, 학계, 종교계 등 다양한 차원에서 기념식과 행사, 학술회의가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3.1운동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등 종교계 인사들이 주도하여 일제의 식민통치에 맞서 대한의 독립을 외친 거국적 항일운동이다.

당시의 기록과 통계에 의하면 전국에서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국적으로 참여하였고 7,500명이나 되는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3.1운동 하면 흔히 유관순 열사가 먼저 떠오르지만 민족대표 33인에 들어간 한용운, 백용성을 필두로 서울과 지방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거사에 참여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3.1운동 이후 민족의식에 눈을 뜬 청년승려들은 일제의 사찰령을 비판하고 자주적 종단 건설을 위한 투쟁을 이어나갔다.  

비폭력투쟁으로 전개된 3.1운동은 전 세계를 제패하고 있던 제국주의의 침탈과 강권에 맞서 분연히 들고일어난 민족자주운동이었고 국제적으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두 달 뒤인 5월 4일에 중국 베이징에서 주로 학생들이 항일과 반제국주의를 부르짖으며 일으킨 5.4운동도 3.1운동의 중국식 버전이었다. 또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 10년이 지난 1929년에 일본에 와서 한국을 ‘동방의 등불’이라고 노래한 것도 3.1운동의 비폭력 평화주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수많은 민중들이 들고 일어난 3.1운동에 화들짝 놀란 일제 당국이 1920년대부터 경찰과 헌병이 주도한 무단통치를 대신해 문화통치를 하겠다고 선언했을 정도로 그 여파는 작지 않았다. 

무엇보다 3.1운동을 계기로 국내외에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민족해방운동이 더욱 활기차게 펼쳐졌다. 바로 한 달 후인 4월에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은 3.1운동이 한민족에게 얼마나 큰 감동과 자각으로 다가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임시정부는 이후 항일운동의 거점이자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고 현재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도 임시정부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군주제 국가인 대한제국에서 민(民)이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으로의 전환과 그 상징성은 독립된 민족국가를 이루려는 모든 이들에게 벅찬 기대와 희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이처럼 한국사에서 3.1운동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다.

현재의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던 요릿집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불교계를 대표해 참여한 이는 한용운과 백용성이었다.

한용운은 천도교의 최린이 제의하고 최남선이 초안을 만든 독립선언서 작성에도 관여하였고, 전날인 2월 28일 밤 자신의 집에서 신상완, 김상헌, 정병헌, 백성욱, 김법린 등 중앙학림 학생들에게 거사 소식을 알리고 독립선언서 수천부의 배포를 당부하였다. 중앙학림은 1906년에 세워진 근대적 불교교육기관인 명진학교의 뒤를 이은 학교로 중앙학림 학생들은 3월 1일 종로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나눠주는 데 발 벗고 나섰다.

이들은 탑골공원에서 나와서 종로경찰서를 지나 남대문 쪽으로 향하다가 정동을 거쳐 서대문 쪽으로 가면서 독립을 외쳤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의 연락으로 범어사, 통도사, 해인사 등 영남의 거찰을 중심으로 각지의 사찰에서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또한 신상완, 백성욱, 김법린 등은 4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1919년 11월에는 상해에서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이 선언서는 백초월, 신상완 등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데 오성월, 김구하, 김경산, 김상호 등 12명이 7천여 승려들을 대표하여 발의하였다. 여기에는 일제의 식민지배에 항거해 조국이 독립할 때까지 혈전으로 싸울 것을 결의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중앙학림의 학생대표와 유심회 회장을 지낸 신상완은 의용승군제를 추진하기도 했지만 일제에 검거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이밖에도 승려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만주의 군관학교나 국외의 여러 항일단체에 가담하였고 또 국내 사찰에서 군자금을 모집해 보내는 등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활동이 계속되었다.

3.1운동으로 촉발된 민족적 각성의 분위기는 1920년대에 불교계 혁신운동에 불을 지폈다. 1920년에 조선불교청년회, 1921년에 조선불교유신회가 조직되었고 이에 소속된 청년승려들은 사찰령의 철폐를 요구하고 일본불교에서 연유한 본말사 체제를 비판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계속 이어져 1929년 1월에 열린 전국승려대회에서는 조선불교의 종헌과 종회를 만들고 자율적 교정을 추진하려 하였다. 또한 1931년에는 조선불교청년총동맹에서 종헌의 실행을 촉구했다.

한편 1921년에는 백용성, 송만공 등에 의해 선학원이 설립되어 선종 전통의 계승과 중흥을 촉구하였고, 그 연장선상에서 1935년에는 선학원 측에서 주최한 전국 수좌대회가 열려 종규를 제정하고 조선불교선종을 종명으로 선포하기도 하였다.

3.1운동 이후 불교계에서는 자주와 혁신을 내세운 여러 목소리들이 분출되었다. 이영재는 <조선불교혁신론>에서 민주공화정 이념과 권력분립을 기조로 한 혁신교단의 수립을 주장했고, 백용성은 경전 번역의 현대화와 식산흥업, 대각교 운동을 벌이는 한편 선과 계율 전통의 수호를 꾀했다.

김용태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철저한 민족주의 불교운동가로 전향한 한용운도 사찰령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산간에서 가두로, 승려에서 대중으로’라는 표어에 집약된 불교의 사회화, 대중화를 추진하였다. 비록 식민지 현실의 장벽에 가로막혀 불교의 자율성 회복은 주권을 되찾은 해방 이후까지 기다려야 했지만, 3.1운동으로 불교계가 민족의식에 눈을 뜨고 겨레를 이끄는 횃불을 높이 들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해방 이후 1962년 한용운과 백용성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서훈이 처음 이루어진 이래 2019년 현재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불교계 인사는 104명에 달한다. 그럼에도 전체 독립유공자 15,180명 가운데 불교계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낮다. 이는 불교가 정치와 무관하며 세속을 떠난 출세간 승단이 가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일 수도 있다. 아니면 식민지 사찰령 체제 하에서도 사찰을 운영하고 불교의 명맥을 이어가야 했기에 보다 많은 스님들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속으로 조국의 해방을 꿈꾸고 간접적으로나마 독립운동을 성원한 이들이 많이 있었다. 따라서 역사의 기억에서 잊혀져간 이들과 관련된 사적을 조사, 발굴하고 불교계 독립운동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우리 미래의 발걸음과 직결되어 있다. 3.1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그 의미를 되새길 때 불교는 민족의 화해와 소통, 남북의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는 장도에 다시금 혜명을 비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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