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과 동고동락… 눈높이 중생제도

우두 법융 문하에서 깨달음을 얻고 법을 이은 윤주 지암의 진영. 속인 시절 무인이었던 그는 출가해서 대오하고 우두종 2세가 된 후에는 나인촌에 들어가 평생 나병환자들과 함께 살며 그들에게 법을 설했다. 이처럼 공감능력이 있는 수행자가 현대사회에는 필요하다.

우두종 2세 윤주 지암은

“중생의 아픔을 알기 때문에 무위(無爲) 세계에 머물지 아니하고, 중생의 고픔을 없애기 위해 유위(有爲) 세계를 저버리지 않는다.”
-〈유마경〉 ‘보살행품’

타종교와 달리 스님들은 성직자가 아닌 수행자라는 타이틀을 걸머진다. 즉 출가하면서부터 타인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발원이 아닌 자신의 생사해탈을 위해 출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초기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어 이 사바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최고 지향점으로 한다. 곧 ‘회신멸지(灰身滅智, 깨달은 성자는 당연히 윤회하지 않는다)’라는 열반론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위대한 진리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은 늘 아픔과 고픔 속에 서성인다. 이로인해 대승불교에 와서는 해탈 열반 경지에 안주하는 것이 아닌 무한한 마음, 대비(大悲)로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여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대승불교에서 보살 사상이 강조되었다. 곧 적멸세계가 최고가 아니라 깨달은 뒤에는 다시 중생세계에 돌아와 중생과 함께 한다는 점이다. 

속인 당시 武人이었던 윤주 지암
우두 법융 문하서 大悟·법맥받아
나인촌 머물며 법문… 78세 입적

깨달은 후 중생제도하는 ‘입전수수’
공감능력 가진 수행자 필요한 시대

그러면 현 시대에 맞는 중생과 함께함은 무엇인가?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필자 입장에서 내리는 답변이 있다. 이 시대는 감정을 공유할 줄 아는 진정성과 공감능력을 가진 수행자, 바로 이런 공감이 깊은 수행자여야 한다는 점이다.

신라시대 원효와 동시대 인물인 대안 스님이 있다. 원효가 대안을 만나기 위해 굴로 찾아갔는데, 대안은 없고 너구리 한 마리가 죽어있고 그 옆에 새끼 너구리가 슬피 울었다. 원효는 너구리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며 〈아미타경〉을 염하였다. 이때 대안이 들어와 이렇게 말한다. “ 새끼 너구리가 경을 알아듣겠소”하면서 대안은 동냥해서 얻어온 젖을 너구리에게 먹이며, 원효에게 말했다. “이것이 너구리가 알아듣는 〈아미타경〉입니다.”

바로 이 점이다. 배고픈 사람에게 진리를 설할 것이 아니라 빵을 주고, 자식 잃은 사람에게 법이 아니라 손잡고 함께 울어주는 것, 이런 공감능력이 필요한 시대이다. 오래전 공감의 귀감이 되는 선사가 있다. 우두종의 윤주 지암이다.

윤주 지암(潤州智巖, 577~654)은 선종사에서 우두 법융(牛頭法融, 594~657, 4조 도신의 제자)의 법을 받은 우두종 2세라는 이름이 문헌에 전한다. 지암의 생애와 단편적인 사상은 〈경덕전등록〉 4권에 수록돼 전할 뿐이다.

지암은 강서성 단양 곡아(江蘇省 丹陽 曲阿) 출신으로 젊었을 때, 군인으로 지혜와 용맹이 매우 뛰어났다. 신장은 7척 6촌이었다.

그는 어릴 적, 이런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현상만을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이 어떻게 삶과 죽음을 알 수 있겠는가?’ 그는 수나라 대업년간(大業年間, 605~616), 20세 무렵에 무인(武人)이 되었다. 수많은 전쟁에서 그는 전공을 세워 40세에 중랑장 지위까지 올랐다. 어느 날, 그는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 영광과 명예를 얻는 군인이 무슨 의미 있는 삶인가?’를 깊이 궁구했다. 지암은 사람을 많이 죽일수록 훌륭한 군인이 된다는 것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무덕년간(無德年間, 617~626) 나이 40세가 넘어 서주(舒州) 완공산(晥公山) 보월(寶月) 선사 문하에 출가하였다.

어느 날 선사가 좌선을 하고 있는데, 키가 10자가 넘는 승려가 나타나 그에게 말했다.
“그대는 나이 40세가 넘어 출가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2배나 더 열심히 정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후부터 지암은 더 열심히 정진했다. 그러다 깊은 산골에서 선정에 들었는데, 지암이 계곡 물에 잠기었다. 이런 와중에도 지암이 태연스럽게 선정에 들어 있자, 계곡물이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이때 지나던 사냥꾼이 이 모습을 보고, 지암에게 감동을 받아 엉겁결에 지암을 향해 합장하였다. 사냥꾼은 자신의 직업을 반성하고 참회하였다.
지암이 출가한지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옛 지인들이 찾아왔다. 그 지인들은 옛 전장에서 함께 한 동료들로서 지암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쳤느냐, 자네가 뭐가 아쉬워서 이런 산 속에서 고행을 한단 말인가? 그대가 다시 무인의 길을 걷는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오. 다시 세속으로 돌아오라.”

지암은 오히려 옛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친 사람이었던 내가 이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대들이야말로 정말 미쳐 있는 겁니다. 색(色)을 좋아하고, 소리에 현혹되며, 명예를 탐하고, 첩을 탐하는 것은 생사에 유전하는 겁니다. 어째서 그대들은 생사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가?”

옛 벗들은 감동을 받고 물러갔다. 이후 지암은 완공산 건업(建業, 현 강소성 남경)으로 돌아가 근교에 머물고 있던 우두산의 우두 법융 문하에서 깨달음을 이루고, 법맥을 받았다. 법융은 지암에게 말했다.

“나는 4조 도신의 법을 받아 모든 번뇌를 끊었다. 깨달음도 꿈속의 환영과 같은 것이다. 너의 경계에는 하나의 티끌이 날아서 하늘을 덮는 일도, 하나의 먼지가 떨어져 땅을 감추는 일도 없어졌다. 이제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다. 이 우두산의 법문을 너에게 부탁한다.”

이후 지암은 우두종의 2세가 되었다. 후에 지암은 법을 혜방(慧方)에게 전하고, 석두성(石頭城, 남경 청량산)으로 들어갔다. 석두성은 나인들의 주거 집단인 ‘나인방(癩人坊)’이다. 이곳에서 지암은 나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에게 진리를 설해주었다. 그렇게 머물다 78세에 그 곳에서 입적하였다. 입적한 뒤에 스님의 안색은 생전처럼 똑같았고, 스님이 머물던 방에는 기이한 향기가 풍겼다고 한다.

지암 스님처럼 나인들과 함께 생활하지는 않았지만, 나인들의 아픔을 안아준 선사가 있다. 소림사 불타선사의 제자인 승조(僧稠, 480~560)이다. 승조는 보리달마가 중국으로 와서 활동하던 무렵, 수행하고 있던 승려이다. 도선(道宣)은 〈속고승전〉에 승조(〈열반경〉 ‘성행품’의 사념처법에 의거)와 달마의 수행법을 비교해 기록하였다. 승조는 만년에 호남성(湖南省) 청라산(靑羅山)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 지역은 나병환자들이 많은 곳이었다. 나병환자들은 승조를 신통력이 뛰어난 선승으로 여기고 매우 존경하였다. 나병환자들은 악취를 풍기고 짓무른 피부에서 고름이 나오는 손으로 승조에게 음식을 공양 올렸다. 승조는 이들의 공양물을 흔쾌히 받아 맛있게 음식을 먹었다. 승조는 지암처럼 나병환자들과 함께 살면서 이들을 제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공양을 받아먹으며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었다.    
 
지암의 제자, 혜명 
지암은 무인으로서의 삶을 접고, 생사해탈의 절대 경지를 지향했다. 지암의 법을 받은 사람으로는 월주사문(越州沙門) 혜명(惠明)이 있다. 혜명이 깊은 산중에서 좌선을 하고 있을 때이다. 그런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길이 차단되어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다. 그는 7일간 물도 마시지 못한 채 견딜 수 밖에 없었다.

7일이 지나서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예로부터 사람이 먹지 않기를 7일하면, 죽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는 이런 고행을 겪은 뒤에 더 깊은 수행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깊은 산골 절벽을 찾았다. 절벽 부근 새끼줄로 나무에 묶은 뒤 새끼줄에 의지해 몸을 매달았다. 말 그대로 떨어지면, 바로 삶을 마감한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할 만큼 깨달음이 절박했다. 이런 절체절명의 단련이 있었기 때문에 해탈을 얻는다.

또 혜명은 형주(荊州) 사망산(四望山)에서 두타를 할 때, 두 마리 호랑이가 싸우는 가운데 들어가 화해를 시켰다고 하며, 계절에 상관없이 항상 옷 한 벌로서 생활하였으며, 어느 곳에 머물든 자유로운 삶을 누리었다.

지암과 혜명으로 본 초기 선사상  
우두종의 지암과 혜명을 통해 중국 초기 선사상의 단면을 살필 수 있다. 첫째는 선과 선종이 뿌리 내리기 이전이나 이후 중국에서는 선사들을 신이한 존재로 묘사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혜명이나 승조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 스님이 호랑이를 타고 있거나 호랑이나 사자 등을 제도하는 모습의 그림이 대부분이다. 물론 보리달마에 관한 달마도도 대부분 신이한 모습이다. 곧 중국에서 선이 처음 발달하는 무렵, 선을 신통방술처럼 묘사하였다. 이 점은 승려가 신통력을 나타내서가 아니라 신통있는 승려가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 중생을 보살펴준다는 일종의 요청에 의해서 선사들을 신이한 모습으로 묘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둘째는 선을 지혜적인 측면으로 보지만, 자비(실천적인 측면)를 겸비한다. 이 사상이 바로 십우도에서 마지막 그림인 ‘입전수수(入纏垂手)’이다. 깨달음을 완전히 이룬 뒤 홀로 적멸을 만끽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향해 발걸음을 돌리는 것이다. 운문종의 자각 종색도 〈좌선의〉 서문에서 “무릇 반야를 배우는 보살은 먼저 마땅히 대비심을 일으켜 큰 서원을 세우고, 정교하게 삼매를 닦되 중생을 제도해야 할 것이요, 자기 한 몸만을 위해 홀로 해탈을 구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였다.

고려의 보조 지눌(1158~1210)은 수선사에서 결사를 하면서 승려들의 청규인 〈계초심학입문〉에서도 환도중생(還度衆生)을 강조하였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초기 장원심 스님도 굶주린 백성에게 밥을 주었고, 걸인들에게 옷을 주며, 잠잘 곳을 마련해주었다. 또한 환자를 보살피는 일을 하였다.

승려들이 자신의 해탈만을 지향하여 중생들의 삶을 외면했다고 하지만, 수백년 전에도 공감능력이 뛰어난 전법 승려들이 존재했다. 현재 조계종 교육원에서 전법을 강조하는 점도 바로 이 시대, 공감능력의 승려를 키우고자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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