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식 보며 부처님 열반 떠올리다

지난 2011년 마하시 선원서 수행 당시 미얀마 선지식 꾼달라 비왐사의 다비식에 참석했다. 스님들의 주도로 다비 의식이 진행되는 한국과는 달리 미얀마는 재가자들이 중심이 돼 엄수된다.

지난 2011년 머물렀던 마하시 선원에서의 9번째 날(12월 22일)과 그 다음 날은 미얀마 선지식의 다비식을 볼 수 있었다. 점심 공양을 마친 후 나오는 길에 선원장 스님의 정인(淨人, 속인으로서 사찰에서 살며 승려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 오후 큰스님 다비식이 있다고 알려준다. 선방에 올라가 좌선하다가 오후 3시 즈음에 내려와 기다리는 정인을 따라갔다.

도심지라지만 공원과 논밭을 통과하여 다비장에 도착하였다. 대략 40여분 가는 동안 다비식에 대해 이런저런 것을 물어보았다. 큰스님 다비식은 7일장이라 한다. 일반 스님들의 경우는 보통 3일장이나 1일장도 행한다 한다. 마하시 스님도 이곳 다비장에서 의식을 거행했다고 알러준다. 이번에는 꾼달라 비왐사 스님의 다비식이다. 

마하시 선원 머물던 9~10번째 날
선지식 비왐사 스님의 다비 참석
다비식 주관·엄수 재가자들 중심
부처님 장례도 출가자 관여 금지
탑 조성 없이 사리함 강에 띄워
스님 사리 신앙대상 경계한 의도


양곤 외곽 쪽의 다비장에 도착하니 많은 대중이 모여 있다. 그런데 마이크를 잡고 다비식을 주관하는 사람은 출가 스님이 아닌 재가자였다. 스님들은 다만 식장의 의자에 앉아 참관하고 있을 뿐이다. 다비식을 엄수하는 사람들도 재가자들이다. 모두 왼쪽 가슴에 노란 둥근 리본을 착용하여 표시하고 있다. 한국에서 스님들이 주관하는 다비식만 봐 온 나로서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경전에 나타나는 부처님의 다비식이 떠올랐다. 부처님의 마지막 여로를 담고 있는 경전에서 아난존자는 부처님에게 반열반 후의 여래의 유체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질문한다. 여기서 부처님은 여래의 장례에 출가자 관여를 금하고 있다. 대신 재가자들이 전적으로 알아서 할 일임을 설한다. 마침내 세존이 반열반에 들자 사방의 제자들은 쿠시나가라로 몰려들었다. 다비 후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여덟 등분되어 각각 자신의 나라에 불사리탑을 건립한다. 마찬가지로 불사리를 봉안한 불탑의 관리 또한 재가자가 담당해야 할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장례의식이 인도 불교와 다른 지역으로 전해져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일어난다. 우리나라의 다비식과도 비교가 된다. 한국은 거의 스님이 주관하고 있다. 왜 부처님은 스님이 장례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가를 이리저리 생각해 본다.

다비식장에는 입적한 스님의 진영이 모셔진 가운데 사부대중이 운집해 있다. 스님의 법구는 장작 위에 모셔져있는 것이 아니라 가스의 화로 위에 모셔져 있다. 다비 화로는 가스가 분출하는 노즐이 앞 뒤 각각 하나와 긴 양쪽에 각각 두 개씩 모두 여섯 개의 노즐이 갖추어져 있다. 누구이든 가까이 가서 참배하고 사진까지 찍는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니 밤색 가사를 입은 채 누워 계신 스님의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 마치 잠들어 계신 것과 같은 편안한 모습의 얼굴이다. 사람들은 이 모습을 사진에 담으려 한다. 이에 용기를 얻어 사진을 찍었다.

스님의 법구가 있는 다비화로에는 4개의 긴 대나무가 세워져 경계를 표시하고 있다. 다시 바깥 담장은 수많은 불교기가 바람에 펄럭였다. 숨죽여 바라보고 있는데 화로에 불이 당겨졌다. 갑자기 여섯 개의 화로 노즐에서 동시에 화염이 솟구쳤다. 또한 이를 신호로 거의 동시에 모든 대중이 합장한 채로 마치 소리를 길게 뽑아내듯이 큰 소리로 낭송을 시작한다. 후에 무엇을 이구동성으로 낭송하였는지 알아보니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말할 수 없이 많은 은혜를 주신 스님께 지은 크고 작은 허물을 참회합니다. 사야도 스님께서는 용서해 주십시오. 행복한 세계에서 저희들의 회향하는 것을 모두 받아 주십시오. 우리들이 지은 보시, 지계, 공덕 등을 모두 사야도 스님께 회향합니다.”

중간 중간 다비 화로에 화염이 솟구치자 33번의 폭죽이 터지고 모인 사람들이 모두 화들짝 환호하며 웃기까지 한다. 갑자기 초기경전인 <열반경>의 부처님 다비식이 떠오른다. 부처님 장례 절차에도 공양으로 춤과 노래가 행해진다. 이 대목을 처음 접했을 때 이해도 가지 않았고 조금 당혹스러웠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또한 부처님의 다비식에서도 슬피 우는 비구의 경우와 그렇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제자가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도 똑같은 장면이 재연되고 있다.

한 스님은 다비화로를 향해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연신 눈물을 손수건으로 훔쳐내고 있다. 또한 가까이 있는 재가자는 쉬지 않고 다비되는 스님의 법구를 향해 계속 절을 올렸다. 다비식이 진행되는 동안 대중들이 한국처럼 슬퍼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다만 스님 법구가 타는 모습을 모두 숙연하게 지켜본다. 참석했던 대중들은 누구도 떠나지 않고 다비가 마칠 때까지 끝까지 자리를 지킨다. 내가 외국인으로 보였는지 다비식 내내 비디오와 카메라를 자주 들이댄다.

혹시나 유명한 선지식이어서 운집한 많은 스님들 가운데에 아는 스님이 있지 않을까 궁금했다. 인도에서 같이 공부했던 미얀마 스님이 와 있지 않나 하는 기대감으로 살펴보아도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사찰의 어느 스님 하면 대강 아는 경우가 많은데 미얀마에서는 스님들이 많아서인지 서로 잘 모른다. 이 점이 또한 의외여서 신기해 한 적이 있다. 대학에 재직하는 등의 여러 활동을 하는 스님일지라도 물어 보면 아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런 가운데 뜻밖에도 미얀마 승복을 입은 한국의 비구니 스님을 만났다. 미얀마에 한국사찰을 건립한 고려사 혜송 스님이었다. 스님은 내가 선방의 좌선도 빼먹고 왔다하니 바로 “사념(死念, maraa sati) 공부도 중요하다”라고 한다.

다비식이 화염을 뿜으며 두 시간을 넘는다. 스님의 육신이 완전 연소되었는지 가스불을 끄고 그물처럼 생긴 불 달은 철판을 차례차례 모래 위로 꺼낸다. 단 밖에 준비된 황금색 단지 세 개가 준비되어 있다. 연소된 스님의 유체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사라함 단지에는 머리 부분의 유골을 수집하여 담고, 두 번째 단지는 몸통 부분의 유골을 담고, 그리고 세 번째 단지에는 하체 부분의 유골을 수습하여 담는다.

다비 이후 수습된 사리는 세 개의 사리함으로 나뉜다. 이후 이를 사리탑을 조성해 봉안하지 않고 강으로 흘려 보낸다. 사리탑을 조성하지 않는 이유는 스님의 사리를 신앙대상으로 삼는 것을 경계해서다.

그런데 여기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을 보았다. 오랫동안 지켜보던 재가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동시에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 다비 화로로 달려들었다. 화로 바닥에 남은 재를 준비해 온 종이에 조금씩 수집한다. 이 또한 경전에 나타난 부처님 다비식이 떠오른다. 부처님 사리는 물론 마지막 남은 재까지도 재가자들이 모두 남김없이 가지고 갔다고 한다. 다비식은 저녁 6시 30분경에 끝났다. 하늘에 별이 하나 둘 돋기 시작했다. 운집한 사람들은 차츰 해산하기 시작하였다. 오후 4시 경에 이곳에 도착하였으니 다비식은 약 2시간 30분가량 거행된 것이다.

내일 새벽에 다비식 다음의 행사가 있다고 한다. 내친 김에 장례의식의 전체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마침 마하시 선원의 외국인 감독스님도 참관하고 있어 허락을 받고 정인과 헤어졌다. 혜송 스님을 따라 고려사로 갔다. 오늘 다비식을 치룬 스님은 삿담마란시 수행처를 일으켜 세운 유명한 스님이다. 스님은 1921년에 태어나 2012년 입적했고 마하시 선원 출신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고려사의 법당에 마하시 스님과 꾼달라 비왐사 스님의 커다란 진영이 함께 모셔져 있다. 미얀마는 자신에게 영향을 주거나 존경하는 스님의 진영을 어느 곳에서나 모시기를 좋아한다. 현재 고려사의 혜송 스님의 은사이기도 한 것이다.

새벽예불 후 어둑어둑한 아침에 고려사 선원장 스님과 혜송 스님을 따라 갔다. 대로에 스님의 커다란 영정과 사리함 3개를 이운하는 차량이 멈추어 있다. 길가는 사람들도 모두 합장 정례해 있다. 어떤 사람은 스님의 사리함을 실은 차량을 향해 반복적으로 절을 한다. 어떤 사람은 차량 안에서 시종일관 합장하며 사리함을 실은 차량을 천천히 뒤 따르고 있다. 거리의 청소부는 빗자루를 곁에 세워두고 눈을 감고 합장한 채 멈추어 서 있다.

다시 양곤강에 도착하자 큰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차량으로부터 황금색 사리 단지를 배로 옮긴 후 포구로부터 멀리 강의 중심까지 물을 힘차게 가르며 나아갔다. 배에는 많은 사람들이 국화, 장미 등 온갖 종류의 꽃들을 준비해 와 강에 흩뿌렸다. 여기에서는 재가자가 다비식을 주관했던 것과 달리 스님이 마지막으로 3개의 사라함을 차례대로 강물에 던졌다. 이 때 예기치 않게도 탑승한 모든 사람들은 환희로운 탄성을 질러 놀랐다.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온갖 꽃들 사이로 던져진 사리함은 유유하게 흘러간다. 이를 사진에 담으려는 카메라 셔터 소리가 여기저기서 요란하다. 이로써 선지식의 장례식은 모두 끝났다.

이내 궁금했다. 한국처럼 따로 스님의 사리탑을 조성하지 않는 것일까? 이를 혜송 스님께 물었더니 “따로 사리탑을 조성하여 모시지는 않는다”고 답이 돌아왔다. 생각해보니 미얀마 사찰에서 스님들의 진영은 많이 봤지만 사리탑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의 사리를 모두 강물에 던지고 따로 남는 것은 없다. 다시 왜 그러한지를 묻자 “사람들이 스님의 사리를 신앙대상으로 간주하여 영험 유무를 따지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이는 덕 있는 스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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