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태고 보우(太古 普愚)와 태고사

현재 중창불사가 이뤄진 중흥사 대웅보전의 모습. 절터만 남았었지만 현재는 대부분의 전각이 복원됐다.

한국불교의 중흥조 태고 보우
대한불교조계종 종헌의 전문과 제1조를 보면 태고 보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종조 도의국사께서 조계의 정통법인을 사승하사 가지영역에서 종당을 게양하심으로부터 구산문이 열개하고 오교파가 병립하여 선풍교학이 근역에 미만하였더니 여조의 쇠미와 함께 교세가 부진하려 할 새 태고국사께서 제종을 포할하사 조계의 단일종을 공칭하시니 이는 아국불교의 특색이다.”

“제1조 본종은 대한불교조계종이라 칭한다. 본종은 신라 도의국사가 창수한 가지산문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국사의 중천을 거쳐 태고보우국사의 제종포섭으로서 조계종이라 공칭하여 이후 그 종맥이 면면불절한 것이다.”

한국불교 중흥조 보우국사
중흥사 동쪽 태고암서 오도
중흥사 머물며 전법교화
중흥사 중창, 불교중흥 계기로

한국의 선종인 대한불교조계종에서 태고 보우 국사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이처럼 태고를 중흥조로 칭하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

1301년 홍주에서 태어나 그는 13세에 회암사 광지(廣智)의 제자가 되었고, 1341년 북한산 중흥사 주지로 왔다. 동쪽 언덕에 암자를 짓고 자신의 수도처로 삼았다. 중흥사의 사격이 왕성했을 때 이곳은 동암(東庵)이라 불렀다. 그 후 태고 보우가 이곳에 머물며 수행했다고 해서 태고암으로 불린다.

이곳에서 5년을 지내는 동안 중국 영가대사의 증도가를 본떠서 장문의 태고암가(太古庵歌)를 지었다. 총 82구로 내용이 절절하고 정서가 깊다. 이후 자신을 태고라 불렀다. 

태고암에서 깨달음을 얻은 그는 자신의 견처를 확인하고 싶었다. 1346년(충목왕 2) 원나라로 건너가 연경 대관사(大觀寺)에 머물렀다. 궁중에 들어가 반야경을 강설하며 중국의 고승과의 만남을 기다렸다. 마침내 1347년 7월 호주 천호암(天湖庵)으로 가서 선승 석옥(石屋)을 만났다. 40여 일 동안 석옥의 곁에서 임제선을 탐구하던 그가 떠나려 하자 석옥은 ‘태고암가’의 발문을 쓰면서 이 노래는 득도의 경지라고 평하였다. 

그리고 깨달음의 신표로 가사를 주면서, “이 가사는 오늘의 것이지만 법은 영축산에서 흘러나와 지금에 이른 것이다. 그것을 그대에게 전하노니 잘 보호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임제 의현의 18손인 석옥에게 인가를 받은 것이다. 그에게 사사한 까닭에 보우는 한국 조계종의 법통에서 임제선을 계승하며, 어려운 고려 말 선종을 부흥시킨 공으로 중흥조로 평가받는다. 

북한산성과 중흥사
북한산성은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다. 군사적인 지식이 없어도 천혜의 요새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삼국시대 백제의 영토였다. 백제는 이 성을 통해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 수도인 위례성을 지켰다. 또한 북진정책의 전진기지였다. 그런 까닭에 백제는 이곳에 행궁을 두었다. 숙종 36년(1710) 12월 판부사 이이명 등이 북한산성을 살펴보고 돌아와 축성의 일을 의논하면서 중흥사(重興寺)에 백제의 궁터가 있는데 창고를 지을 만하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 일부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수왕 때 이곳을 빼앗긴 백제는 수도를 공주로 옮길 정도로 치명타를 입었다. 신라의 진흥왕이 100년이 넘도록 지속된 나제동맹을 깨고 이곳을 차지한 것도 너무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북한산성을 비롯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한 진흥왕은 산성 인근 비봉에 순수비를 세웠다.

그 후에도 신라는 이곳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진평왕 25년(603) 8월 고구려 장군 고승(高勝)이 북한산성을 포위하자 진평왕 자신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이곳을 지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삼국통일을 이룬 태종무열왕도 재위 8년(661) 고구려와 이곳에서 혈전을 벌였다. 이 무렵 신라는 백제 부흥군과 대치하고 고구려와 전쟁 중이어서 삼국통일의 최대 고비였다. 성주 동타천(冬陀川)은 필사적으로 이 성을 방어한 공로를 인정받아 벼슬이 2단계 승급되었다.  

고려시대에도 북한산성은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현종 1년(1010) 거란이 침입했을 때 이곳으로 태조의 재궁(梓宮)을 옮겨오게 했고, 고종 19년(1232)에는 몽고군을 맞아 이곳에서 격전을 벌였다.

프랑스인이 찍은 옛 중흥사 삼문과 사천왕문.

태고암에 세워진 보월승공탑비
1348년에 귀국한 보우는 다시 중흥사에 머물렀다. 도를 더욱 깊이 하고자 미원의 소설산(小雪山)으로 들어가 4년 동안 농사를 지으면서 보임하였다. 1356년 왕의 청으로 봉은사에서 설법하였고, 그 해 4월 왕사로 책봉되어 광명사에 머물렀다.

1363년에 신돈(辛旽)이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불법을 해치고 나라를 위태롭게 하므로, 보우는 “나라가 다스려지려면 진승(眞僧)이 그 뜻을 얻고, 나라가 위태로워지면 사승(邪僧)이 때를 만납니다. 왕께서 살피시고 그를 멀리하시면 국가의 큰 다행이겠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그러나 신돈의 횡포가 더욱 심해지자 왕사의 인장을 반납하고 전주 보광사로 내려갔다.

우왕 7년(1381) 겨울 양산사(陽山寺)로 옮기던 날 국사로 봉하였다. 자신의 입적이 임박함을 느낀 그는 1382년 다시 소설산으로 돌아왔다. 그해 12월 23일 후학들을 불러 내일 유시(酉時)에 떠날 것을 말하고, 이튿날 새벽 유시에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시호는 원증(圓證)이다. 중흥사 동쪽 봉우리에 탑을 세워 탑호를 보월승공(寶月昇空)이라 하였다. 사리는 양산사, 사나사, 청송사, 태고암에 분장하였다.

태고암 대웅전 우측에 있는 원증국사 부도탑비는 우왕 11년(1385) 건립되었다. 비문은 이색(李穡)이 교지를 받들어 짓고, 글은 권주(權鑄)가 썼다.

조선시대 중흥사의 변모
조선 초 이곳은 왕실의 중요한 사찰이었다. 태조는 7년(1398) 1월 도당에 명하여 중흥사의 토지에 대한 조세를 면제하였다. 그리고 태종 11년(1411) 5월에는 승려들을 이곳으로 불러 금주하고 비 오기를 빌었다. 국행불사가 행해진 것으로 보아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중흥사는 산성 안에 있었던 관계로 전쟁 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이곳 주지가 승군대장을 겸임하여 전국의 승군을 총지휘하는 지휘소가 설치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북한산성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선조 29년(1596) 3월 임진왜란이 잠시 소강상태에 빠지자 병조판서 이덕형은 이곳을 둘러보고 주위의 형세를 그려 선조에게 올렸다. 그가 살펴본 북한산성은 사면의 산세가 높고 험절하여 진실로 10여 인이 지키게 되면 적의 숫자가 수만 명이 되어도 어찌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고 도성 근처에 이와 같이 유리한 지세를 두고 방치한 것을 매우 애석해하였다. 선조는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하도록 하였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성이 축성된 것은 숙종 37년(1711)이다. 서울 백성들과 삼군문(三軍門)의 군사들이 6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완성하였다. 이렇게 애써 축성하였지만 실제 사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 무렵 중흥사는 사세가 기울어 30여 칸만 존속하였고, 축성과정에서 행궁터로 지목되었다. 숙종 38년(1712) 11월 병조 판서 조태채(趙泰采)가 “북한산성의 행궁 자리는 중흥사의 옛터만 못하니, 행궁을 다시 이곳에 옮기어 세우도록 명하는 것이 합당합니다”고 아뢰었다. 그러나 행궁은 중흥사 위쪽에 세워졌고, 사찰은 숙종 41년(1715) 136칸의 큰 절로 중수되었고 팔도도총섭 겸 승대장 휘하의 승영이 설치되었다.

이처럼 산성 내 중요한 위치인 중흥사였지만 화마를 비켜가지 못했다. 1909년에 화재를 입었고, 1915년 대홍수로 남은 전각들이 유실되었다. 1916년에는 그마저 모두 불타 없어지고 한 채만 남았다. 일제는 이곳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헌병출장소로 두었다.

태고암서 지금의 조계사로 변모
중흥사의 변천에 따라 명맥을 이어온 태고암은 총본산이 설립되면서 본의 아니게 서울 안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31본산은 1937년 3월 5일 제1회 총본사건설위원회를 개최하였다. 한국불교를 관리할 총본사의 명칭을 조선불교선교양종총본사 각황사로 하였다. 현 재단법인인 교무원은 해체하여 총본산에 귀속시키며, 각황사는 매각하여 기지 확장에 사용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밖에도 총본산건설위원, 상임위원, 그리고 고문 등을 선출하였다.

31본산의 총본사 건립은 1937년 7월 27일 기공을 시작해서 1938년 10월 25일에 준공되어 봉불식이 거행되었다. 1938년 10월 26일 열린 본산주지회의에서 사명(寺名)은 각황사가 아닌 북한산 태고사를 이전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이를 1939년 5월 22일 총독부에 신청하여 1940년 5월 인가 받았다. 1940년 11월 31본사 주지들이 모여서 종래 ‘조선불교선교양종’이라고 사용해 오던 종명을 ‘조선불교조계종’으로 개정하였다.
총독부는 1941년 4월 23일 개정된 사찰령 시행규칙을 인가하였다. 이때 제정된 태고사법은 1941년 5월부터 시행되었고 태고사 안에 종무원이 설치되어 불교인들의 여망이었던 총본사가 출범하게 되었다. 지금 조계사로 불리는 것은 1954년 이후 진행된 정화운동 과정에서 바뀐 것이다. 

북한산에 있던 태고사는 6·25 때 전소되어 절터만 남았다. 그 후 1968년 옛 중흥사의 석재를 이용하여 대웅전과 요사채를 복구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절터만 있던 중흥사 역시 중창불사로 거듭나고 있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당우만 거듭날 것이 아니라 태고와 같은 수행자가 나와 한국불교를 중흥시키는 날이 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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