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믿음 편 7

인간은 태어나면 언젠가는 늙고 병들어 죽기 마련이다. 이러한 유한한 실존 앞에 인간은 괴로움을 느끼고 한없이 작아진다. 그렇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바로 영원한 삶을 꿈꾸거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그 꿈이 실현된 상태를 종교적 전통에 따라 구원, 혹은 깨달음 등으로 불린다. 인간이 종교를 믿는 이유다.

종교의 목적인 구원에 이르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지난 호에서 언급한 자력신앙(自力信仰)과 타력신앙(他力信仰)이 그것이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입장이 자력신앙이라면 절대적 힘을 가진 타자(他者), 즉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입장이 타력신앙이다. 기독교를 위시한 서양종교가 타력신앙이라면, 불교를 비롯한 동양종교는 자력신앙에 가깝다.

종교의 목적인 구원을 불교에서는 깨달음이라 표현한다. 그런데 깨달음은 어떤 절대적 존재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종교적 체험이다. 석가모니 붓다는 이를 직접 체험하고 ‘생로병사’라는 인간의 실존적 괴로움에서 벗어난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력신앙의 모습은 그의 생애와 가르침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그의 탄생게와 마지막 유훈에서 이를 잘 볼 수 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붓다는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으면서 한 손으로는 하늘을,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이렇게 외친다.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높다.(天上天下 唯我獨尊)”

흔히 탄생게로 알려진 이 선언은 사실이라기보다는 불교에서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이해해야 한다.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이 말은 나 혼자 잘났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에서 ‘아(我)’라는 말을 잘 알아야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나(我)는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보편적 인간성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말은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매우 존엄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간의 가능성을 매우 높이 평가한 위대한 인간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왜 인간을 위대하다고 했을까? 바로 종교의 목적인 구원을 인간 스스로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은 대승불교에 이르러 인간은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佛性)을 갖추고 있다는 불성사상이나, ‘여래의 씨알(如來藏)’이 있다는 여래장사상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는 나고 죽는 인간의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력신앙의 근거가 된다.

이러한 자력신앙의 모습은 붓다의 마지막 유훈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열반에 들기 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 자신을 등불 삼고 너 자신을 의지하라.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를 의지하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흔히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으로 알려진 붓다의 마지막 유훈은 깨달음이 어떤 절대적 존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등불 삼고 진리를 등불 삼아 정진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를 실제로 증명해보인 인물이 바로 석가모니 붓다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절대적 존재에 의한 피조물이 아니라 우주의 중심이며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나 스스로 노력하면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기본 입장이다.

이처럼 인간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 철학이나 종교가 있을까 싶다. 붓다의 탄생과 열반에서 확인한 것처럼 불교는 전형적인 자력신앙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절대타자인 아미타불께 의지하여 정토에 낳고자 하는 타력신앙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어떻게 된 것일까? 한 종교 안에서 자력신앙과 타력신앙이 서로 양립할 수 있을까? 다음 호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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