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각 스님 (86·국민행복실천운동본부 이사장)

부산 데파트에 위치한 부산인권센터 사무실 앞에 서 있는 정각 스님. 부산 데파트는 부산 원도심의 상징물이자 민주화 및 인권 운동의 주요 활동처였다.

인권에 눈 뜨다
춘성 스님 닮고 싶어 출가
1968년부터 수감자 교정교화
부산구치소 관음보살상 조성
활동 중 인권 유린목도
1997년 마지막 사형집행 참여
사형수 보내며 인권원력 세워
사형제 폐지운동 앞장서
무료법률상담소 열어 상담봉사
소외층 위해 부산불교인권센터
동의대 사건후 부산인권센터 열어

 

인권, 사전 속에서는 선명한 명제이지만 삶에서는 늘 쉽지 않은 명제다. 동서고금에서 완벽한 인권의 시대는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만큼 모두가 행복하기란 힘든 것이다. 우리의 역사만 보더라도 그렇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사례들이 무수히 많다. 중요한 것은 단 한 사람의 인권이라도 유린된다면 그것은 완벽한 인권의 실현이라고 볼 수 없고, 한 사람이라는 것이 누구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권의 문제는 서로가 서로를 도와야 하는 가치이다. 어느 날, ‘인권이라는 가치에 눈을 뜨고 서로 챙겨주지 못했던 과오를 스스로 짊어진 삶이 있다. 자신의 인권을 스스로 챙길 수 없는 이들을 돕고 있는 국민행복실천운동본부 이사장 정각 스님이다. 많은 이력을 가지고 있는 스님의 이력은 모두 인권이라는 가치에서 출발한다. 인권을 국민행복이라고 말하는 정각 스님을 219일 부산인권센터에서 만났다.

 

마지막 사형집행 참여

19971230. 부산교도소. 살인(공모)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사형수 한춘도의 형이 집행됐다. 우리나라 마지막 사형집행이다. 그 이후로 사형은 집행되지 않고 있다. 그 마지막 사형집행의 현장에 정각 스님이 있었다. 검사, 교도관과 함께 정각 스님도 형집행자로 참여했다. 사형이 집행되고 정각 스님은 시다림으로 사형수의 마지막을 살폈다.

사형이 집행되기 바로 직전 사형수는 정각 스님께 삼배를 올리기 위해 밧줄을 풀어달라고 교도관에게 부탁했다. 스님은 삼배를 올린 사형수의 손을 잡고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형수의 얼굴은 두려움 없이 맑고 평온했다. 사형수는 부산구치소에 수감되면서 스님을 만났고, 불교에 귀의해 참회할 수 있었다. 불법의 가피로 생사일여의 가르침에 닿을 수 있었던 그는 죽음의 문제를 넘어섰다. 마지막 가는 길에서 그는 평온한 얼굴로 스님과 마주했다.

이후 스님은 물 한모금도 제대로 마실 수가 없었다. 슬픔을 참기에도 벅차 그 순간이 떠오를 때면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삼켜야 했다. 당시를 회상하는 스님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정각 스님은 그때부터 인권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사형수를 만나 오랜 동안 교화활동을 하고 사형집행을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인권에 관련된 일들을 목격할 수 있었던 스님은 그 자리를 숙업으로, 그리고 숙연으로 받아들였다.

사형수와 구치소에 있던 사람들을 만나면서 인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내가 서있는 이 자리가 내 인연자리라고 생각했고, 그때부터 그 인연의 회향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마지막 사형집행의 당사자였던 사형수 한춘도는 모범수였고 마지막에 자신의 안구와 시신을 기증했다. 스님의 눈에 그는 살인자가 아니었다. 한춘도를 비롯한 모든 수감자들은 일불제자였으며 불성을 가진 고귀한 생명이었다. 그들을 위해 스님은 관세음보살상을 세워 부산 구치소를 도량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끝내 제자를 자신의 손으로 보낸 듯해 자괴감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던 스님은 마침내 사형제 폐지 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정각 스님은 1968년부터 매주 수요일이면 교도소에서 법문을 했고 재소자의 생일을 챙기고 살뜰하게 그들을 살폈다. 하지만 그들이 교도관에게 매를 맞는 장면을 보면 눈을 질끈 감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형집행 후 스님은 무료법률상담소를 열었다. 예방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스님은 중앙대 법대를 졸업했다. 당시 함께 해준 인권 변호사들이 있어 가능했다. 당시 함께 한 변호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 조우래 변호사 등 젊은 인권 변호사들이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형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억울한 사연도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평하고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형편상의 이유로 상담 한 번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사람들도 많다고 봅니다. 법을 몰라서 생기는 일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알려주는 일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스님은 억울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시작했고 부산자비원에서 운영하는 자비의 전화로 법률상담을 진행해 어려운 이들에게 법률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상담을 이어가고 많은 사람을 만날수록 교도소에서 지켜봤던 인권 유린이 교도소 안의 일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교도소 밖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대학생들이 구타를 당하기도 했고,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을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해고 소식이었고, 사고를 당해 다쳐도 보상 한 푼 받을 수 없는 억울한 일들이 비일비재 했어요

스님이 그들을 위해 세운 것이 부산불교인권센터였다. 그리고 198953동의대 사건이 발생했다. 동의대 사건은 노동절을 맞아 부산 동의대 학생들이 노동자 대회 원천봉쇄에 항의하고 대회를 지지하는 시위를 벌인 것이다. 학생들은 학교 밖 인근 파출소에 화염병을 투척했고, 경찰은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실탄 24발을 발사하며 주동자를 검거했다. 학생들은 경찰의 총기 난사를 규탄했고 화염병을 투척했다. 경찰이 시위에 참가한 8명을 추가로 검거하자 학생들은 사복경찰 5명을 붙잡아 도서관에 감금했다. 학생들은 경찰과 연행된 학생들을 교환 석방 할 것을 요구했으나 경찰은 응하지 않고 도서관으로 진입했고 그 과정에 도서관 7층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로 경찰관 7명이 사망했으며 학생 90명이 연행되고 77명이 구속됐다.

수많은 학생들을 대변하기 위한 방안이 필요했고 스님은 힘을 모아야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부산인권센터다. 당시 함께 한 사람들이 김영수 목사, 김동수, 송기인, 배다지, 이정이, 문재인, 원형은 등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스님의 행보는 종교를 초월한 인간애로 확장되어갔다.

2017년 11월 23일 국민행복실천운동본부 창립대회에 참석한 정각 스님(앞줄 다섯번째).

세상 편견 극복한 선구자의 삶

지역의 대중은 스님을 선구자라고 이야기한다. 선구자는 앞서가는 만큼 온 몸으로 편견과 부딪혀야 하고 많은 아픔을 감수해야 한다. 스님은 부산인권센터 활동을 이어가며 정의사회구현 부산시민협의회 상임공동대표, 부산환경운동연합 상임대표, 부산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상임대표, 한국불교장례문화연구원 원장, 불교환경운동연합 상임대표, 부산종교인평화회의 공동 대표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앞서간다는 일은 힘든 일이었다. 거센 항의와 반발이 스님을 괴롭혔다. 당시 환경 문제와 인권 문제는 경제 이념 속에서 무시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일들을 겪어야 했다.

지금은 환경 문제가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이지만 제가 활동하던 당시는 오직 경제 발전만이 최고 가치였습니다. 낙동강을 살리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 대구에 있는 염색공장을 방문했어요. 염색공장 사장이 제 지인이기도 했지만 넘어 갈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오염폐수를 몰래 강으로 버리는 것을 적발하고 강하게 반발했지요. 또 새롭게 대구에서 추진했던 위천공단 설립을 최선을 다해 막아내고 환경을 위한 여론을 형성해 나갔습니다

스님은 오랜 관습과 이념과 싸워야 할 때는 협박도 받았다. 스님은 장례문화를 바꾸기 위해 화장(火葬)을 널리 알리려했다. 이유는 환경 때문이었다. 스님은 오래 전부터 환경문제를 생각했고 장례문화도 환경을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화장이 적절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발이 생각보다 심했다. 오랜 동안 유지해온 유교문화에서 화장은 불효였다. 스님에게 매일 협박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번호를 바꿔야 할 정도로 협박 전화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보세요. 화장을 누가 이상하게 생각합니까? 부산 최대 공원묘지인 영락공원에 최신식 화장 기구를 들이는 과정에서도 시민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지금은 모두가 인정합니다.”

스님의 많은 활동에는 대부분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교도소 교정 교화활동, 종교인 화합을 위한 열린 모임, 김해 노동선방, 군포교를 위한 찾아가는 법당 등 당시에는 모두가 혁신적인 행보였다.

교도소와 구치소에서 교정 교화 활동을 한지도 52년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독지가로 불렸지요. 지금은 많은 분들이 동참하고 체계화해서 노력하는 것을 보면 흐뭇합니다.”

선구자로서 가장 보람 된 순간일 것이다. 자신이 닦은 길이 여러 사람들의 이정표가 되고 시대의 흐름을 옳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값진 일이기 때문이다.

 

정각 스님은 열린 종교 화합하는 종교를 위해 노력했다. 2003년 부산종교인의 밤에 참석한 정각 스님(앞줄 세번째).

미래세대를 걱정하며
일찍이 환경문제도 심각성 인식
화장알려 장례문화 변화운동 
국민행복실천운동본부 발족
·유아 생명 살리기운동 시작
산모·영유아 위한 라이프가든

출가 인연사람이 좋아서

스님의 출가 동기는 사람이 좋아서. ‘부처님이 좋아서가 아니다. 스님은 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에서 자랐다. 크고 작은 일을 겪기는 했지만 스님은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올 준비를 했다. 스님의 인생이 출세간으로 향하게 된 것은 사람을 만나면서부터다. 사람이 좋아서가 스님을 출세간으로 이끌었다. 그 사람은 바로 망월사 춘성 스님(春成·1891~1977)이다. 정각 스님은 망월사에서 고시 공부를 하던 친구의 소개로 춘성 스님을 뵈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의 유일한 제자인 춘성 스님은 욕쟁이 스님으로 불릴 정도로 파격적인 언행으로 유명했지만 정각 스님의 기억은 달랐다.

추운 겨울 길을 가다 맨발인 사람을 보면 그 자리에서 신발을 벗어 주던 분이셨습니다. 선사의 기품과 자유로움에 저는 매료됐고 출가를 결심하게 됐어요.”

춘성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난 청춘에게 지금까지의 삶은 모두 의미가 없었다. , 명예, 권력, 모두 앞으로의 삶에 필요치 않은 것들이었다. 1960, 26살에 정각 스님은 닮고 싶은 스승을 따라 출가했다. 자유인의 삶을 보여준 춘성 스님의 삶에서 자신이 그동안 지켜온 부유함과 안정이 거짓말처럼 가치 없게 느껴진 것이다. ‘사람을 사람답게를 외치고 인권을 위해 함께 목소리를 높이게 된 건 당연한 인과일지도 모른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에겐 한없이 자비롭고 강한 권력자들에겐 사자처럼 엄정한 춘성 스님의 행보를 닮고 싶었기 때문이다.

 

행복 드림 사업전개

정각 스님은 또 다시 행복한 나라를 꿈꾼다. 인권의 또 다른 말 국민행복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스님은 20171123일 부산 영도에 있는 한 식당에서 ()국민행복실천운동본부 창립 발기인대회를 개최했다.

스님은 국민 소득 3000달러가 되지 않는 극빈국인 부탄은 행복도와 만족도가 97%로 세계 최고 행복한 나라고 꼽힌다행복을 위한 참된 조건을 다시 한 번 새롭게 생각해 봐야 할 시기다라고 강조했다. 성과와 경제개발 위주로 숨 가쁘게 달려온 발걸음을 잠시 고르고 미래세대에게 참된 행복의 조건을 제시할 때라고 말한다. 스님은 이를 위한 구체적인 사업으로 힘겨운 과제에 도전한다. 버려지는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는 행복 드림 사업이다. ‘베이비 박스라고도 불리는데, 아기를 유기하는 장소로 잘못 인식 돼 논란을 안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스님은 명칭을 라이프 가든으로 바꿨다. 전반적인 사회문제를 먼저 고찰하고 예방하며 현실적인 대안을 수립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생각했다. ‘베이비 박스가 아니라 생명을 지키는 정원(라이프 가든)이다. 이 정원은 아기만 보호 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임산부의 인권과 행복권을 보살피는 운동이다. 임산부인 엄마를 먼저 보호하고 아기의 생명을 구하며 그들의 삶이 깨지지 않도록 돕는 것이 주목적이다. ‘라이프 가든은 부산 홍법사에서 시설을 운영한다.

()국민행복실천운동본부는 지난 217일 홍법사에서 공식적인 영유아 행복 드림 사업의 시작을 알리는 발대식을 개최했으며 220일에는 대학생들이 참여해 정책 토론회를 열었다. 행복드림센터(라이프 가든)3월 중으로 정식 개소할 예정이다.

정각 스님은 부처님은 행복을 깨달았다고 정의했다. 행복이 부처님이 남겨 주신 지상과제란 의미이다. 불교를 전한다는 건 바로 참된 행복을 전하는 일이란 뜻이며 행복한 삶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이 곧 부처님의 가르침인 자비를 실천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모든 국민이 행복하게 웃는 나라, 그것이 바로 스님이 생각하고 발원하는 불국토이다.

정각 스님은?1934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났다. 망월사 춘성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강원도 춘성 수양사 주지, 법무부 춘천 교도소에서 지도 법사로 활동했다. 이후 부산 미룡사를 불사하고 부산구치소 및 교도소에서 교화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일붕 서경보 스님의 수법 제자로 일붕 서경보 스님 전국 문도회 수석부회장, 재단법인 일붕선교종 창종 초대 총무원장을 역임했다. 부산인권센터 공동대표, 정의사회구현 부산시민협의회 상임공동대표, 부산환경운동연합 상임대표, 부산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상임대표, 한국불교장례문화연구원 원장, 불교환경운동연합 상임대표, 부산종교인평화회의 공동 대표 등을 맡아 시민운동을 이어갔다.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조계종 총무원장 표창, 법화종 종정 표창, 법무부 장관 표창, 농수산부 장관 표창, 내무부장관 표창, 경찰청장 표창, 국민훈장 석류장 수상 등 100여 회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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