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전문가 초청 강연...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주제 : 고려시대 제다와 탕법(湯法)
 

국립중앙박물관(관장 배기동)은 2월 14일 박물관 대강당에서 고려 건국 1100주년 특별전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과 연계된 전문가 초청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날 강연회에서는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이 ‘고려시대 제다와 탕법’을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다. 
박동춘 소장은 “구법을 위해 송나라를 오고 갔던 승려나 사신들은 새로운 차의 이론을 이해했던 계층”이라며 “송의 새로운 제다기술(製茶技術)이나 탕법(湯法)을 적극적으로 들여와 고려만의 색채를 띤 차 문화를 구축했다”고 설명했다.

박동춘 소장은… 1953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청명 임창순 선생에게 한문을 배웠다. 1985년 초의선사의 차풍을 이은 응송 박영희 스님에게 ‘다도전게(茶道傳偈)’를 받음으로써 ‘초의차’의 이론과 제다법을 이어 받았다.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으로 ‘초의차’를 계승하는 ‘동춘차’를 만들며 한국 다도의 맥을 보존, 전수하고 있다. 제2회 화봉학술문화상과 제 22회 행원학술 특별상을 수상했다.


고려시대 제다법 단차·백차가 주류
송나라와의 교류 통해 茶문화 발전
宋황실이 보낸 용봉단차 영향 받아
자체적인 제다기법·탕법 정립하기도

고려 차 문화의 흐름

고려는 동아시아 제국과 활발한 문화교류를 통해 문화 수준을 높여갔던 시대이다. 이런 흐름은 차 문화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 차 문화가 소개된 것은 7세기 불교의 유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나말려초(羅末麗初) 구산산문(九山禪門)의 개창으로 불교의 교세가 확장되자 차 문화 또한 왕실 귀족층 및 승려, 관료 문인으로 널리 퍼지는 경향을 보인다. 

중국을 내왕했던 구법승(求法僧)들은 다사(茶事)에 밝았던 계층으로, 고려 초기에 왕실 귀족층과 함께 차 문화를 이끈 주역으로 부상했다. 사전(寺田)을 바탕으로 풍부한 경제력을 갖춘 사원에서는 수행에 필요한 차를 자급자족하는 방법을 모색하여 통도사 부근에 다촌(茶村)이 형성되기도 했다.

고려의 차 문화는 송나라와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송나라의 선진 차 문화를 받아들였다. 구법을 위해 자주 송나라를 오고 갔던 승려나 사신들은 새로운 차의 이론을 이해했던 계층으로, 송의 새로운 제다기술(製茶技術)이나 탕법(湯法)을 적극적으로 들여와 고려만의 색채를 띤 차 문화를 구축했다. 이들이야말로 풍요로운 고려 차 문화의 동력이었다.

무엇보다 고려시대 차 문화가 융성했던 배경은 종교와 정치의 영역에 차가 깊게 침투해 있었다는 점이다. 그 예로 왕실이 주관하는 연등회, 팔관회 등 불교 의식에서 왕이 몸소 차를 갈아 부처님께 올렸으며, 9품 이상의 관료나 80세 이상의 노인, 승려, 신하가 죽었을 때도 차를 하사했다. 

  
고려 시대의 제다법
차를 만드는 기술이 신라에 소개된 것은 9세기 이후로 추정된다. 10세기 말 이후 고려만의 색채를 띤 차를 생산, 자급자족을 도모했다. 11세기 이후에는 수준 높은 단차(團茶)를 생산하였다. 12세기 이후 고려는 송나라에서 유행하던 백차(白茶)를 생산하여, 흰 거품이 나는 차의 풍미를 즐겼다. 이는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제다법이 고려까지 소개되었던 것으로, 동시대의 차 문화를 양국이 공유했다는 증거이다. 

특히 고려 초 왕실이나 사찰에서 필요한 차는 차의 산지 부근 사찰에 다촌(茶村)에서 생산했다. 이 활동을 주도한 것은 사원의 승려였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계층이 관료 문인으로 확산되는 등 차의 수요가 많아지자, 왕실에서는 특화된 기술력이 집약된 다소(茶所)을 만들어 공납(貢納) 차를 만들었다. 이후 차산지에 차세(茶稅)를 부과했고, 왕실에 올리는 토공(土貢) 차는 지방관리가 관리하였다. 

한편 송나라 황실은 고려 왕실에 용봉단차를 보냈는데, 이는 고려의 차 문화에 두 가지 영향을 미쳤다. 한 편으로는 고려 왕실 및 귀족층이 차를 마시는 풍속에 영향을 미쳤고, 다른 한편으로는 송의 개량된 제다법을 받아들여 발전을 꾀할 수 있었다. 

좋은 차를 얻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조건은 오염되지 않은 천혜의 자연환경이다. 이규보의 ‘운봉주로규선사득조아다시지여목위유다사청시위부지(雲峯住老珪禪師得早芽茶示之予目爲孺茶師請詩爲賦之)’에는 차의 생육환경을 선명하게 언급하였는데, 그 일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남방사람 맹수도 두려워하지 않아
(南人曾不???)
험난함을 무릅쓰고 칡덩굴 휘어잡아
(冒險衝深?葛?)
간신히 채취하여 단차를 만들어
(辛勤採摘焙成團)
남보다 앞서 임금님께 드리려 하네
(要냉頭番獻天子)

 

이규보의 시에서는 12세기경 고려에서 만든 단차의 제다 공정의 일단(一段)을 살펴볼 수 있는데, “간신히 채취하여 단차를 만들어(辛勤採摘焙成團)”라는 구절이 그렇다. 더불어 이규보는 제다법을 ‘배성단(焙成團)’이라고 표현했다. 이때 ‘배(焙)’는 차를 만드는 방법과 건조하는 과정을 아우른 말이다. ‘단(團)’이란 완성된 차의 형태, 모양이다. 그럼 단차와 백차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단차(團茶)를 만드는 공정에서 차 싹을 따서 줄기나 백합(白合, 차 싹을 싸고 있는 겉피)을 제거하는 이유는 “백합을 제거하지 않으면 차 맛을 해치고 줄기를 따내지 않으면 색을 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좋은 차 싹만을 선별하여 시루에 넣고 증기에 쪄낸다. 

제다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은 바로 차 싹을 잘 익히는 일이다. 이 공정에서 차의 품질이 결정된다. 만약 차 싹을 덜 익히면 비린내나 풋내가 나며 아린 맛이 남아 있어 맛이 거칠어진다. 너무 익히면 색·향·미는 물론 기운이 줄어들어 맛의 탄력과 생기 있는 기운이 사라진다. 이 때문에 차를 마셔도 몸의 나쁜 기운을 제거할 수 없다. 차 싹을 찌는 공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음으로 쪄낸 차 싹을 식힌 후, 절구에 넣고 찧어낸다. 이후 차를 분(盆:동이)에 넣고 간 다음에 거의 가루처럼 부서진 차를 뭉쳐서 틀에 넣어 찍어 낸다. 틀의 모양은 대개 방형(方形), 화형(花形), 원형(圓形)이다. 이렇게 완성된 차를 뜨거운 숯불에서 말리는데 이것을 배건(焙乾)이라고 한다. 배건은 차의 수분을 완전히 제거하여 변질을 막고자 함이다. 이때 숯불의 온도가 중요하며 숯불을 피울 때 연기가 나거나 너무 뜨거워 차를 태우면 안 된다. 만약 차에 연기가 스치기만 하여도 맛과 향, 기운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좋은 차를 만들기 어렵다.

단차의 제다법보다 백차의 경우 더욱 공정이 섬세하다. 송나라 시대의 단차는 정위(丁謂, 966~1037)와 채양(蔡襄, 1012~1067) 등이 대소용봉단(大小龍鳳團)을 만든 후, 더욱더 섬세한 극품의 차로 완성된다. 이는 11세기의 제다법이다. 이 제다법 또한 고려에 소개되어 단차를 만들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백차의 제다법은 다음과 같다. 앞에서 언급한 단차와 비슷한 과정에서 고(膏)를 짜내는 단계가 더해진다. 또 차 싹에서 고를 짜내 분(盆, 동이)에서 곱게 갈아낸다고 해서 연고차(硏膏茶)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백차 만들기의 첫 과정은 단차와 마찬가지로 차 싹을 시루에 넣고 증기로 쪄낸 후 뜨거운 차 싹을 식히는 것이다. 이후 차의 물기를 제거하는 소착(小搾), 고를 짜는 대착(大搾)을 거친다. 다시 고를 짜낸 차 싹을 절구에 넣고 찧은 후에 분에 넣고 다시 갈아내 고운 가루로 만들어 다시 틀에 넣어 찍어낸다. 배건(焙乾) 방법은 단차보다 정교하다. 특히 백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고를 짜내는 연유는 엽록소를 최소화하여 부드럽고 향기로운 맛과 향을 얻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팽다(烹茶)할 때 찻 사발에 차를 넣어 다선(茶倉)을 이용하여 격불하면 차 거품이 흰 구름이나 흰 눈처럼 흰빛을 띤다. 그러므로 백차라 부른 것이다. 

 고려에서 이런 제다법으로 만든 차로는 뇌원차(腦原茶)와 대차(大茶)가 있는데 10세기 말~11세기에 생산되었다. 유차(孺茶)는 12세기, 원옥차(圓玉茶)가 13세기에 생산됐다. 화전춘(火前春)과 작설차(雀舌茶)는 14세기 왕실 하사품으로, 귀족층·승려·관료 및 문인들이 즐긴 차였다.
 

고려 시대의 湯法 
11세기 고려에서는 단차와 백차를 혼용하여 즐겼다. 이는 송나라에서 영향을 받았다. 한편 제다법이 변화하면서 탕법 역시 달라졌는데, 찻그릇의 형태이나 색깔도 영향을 받았다. 11세기에 유행했던 단차는 당대에 유행했던 병차(餠茶)보다 훨씬 섬세한 고급차인데 이는 제다법이 점차 개량되면서 나타났다. 단차를 점다(點茶)하는 방법은 요즘 유행하는 산차(散茶)와는 확연히 다르다. 그러므로 고려 시대에 유행된 점다 혹은 팽다(烹茶)라는 말은 가루차, 즉 단차나 백차를 즐길 때 차를 내는 행위를 의미한다. 점다와 팽다를 혼용해 사용하였다. 

팽다를 위해 우선 단차를 부숴 가루를 내야한다. 연(?)에 차를 갈아 체로 쳐서 고운 가루를 만든다. 햇차는 굽지 않아도 되지만 오래된 차는 굽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11세기경 고려에서도 단차를 연에 갈아 미세하게 가루를 내어 점다했는데, 휘종의 <대관다론> 에 연(?)의 재질과 구성에 관해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휘종이 최고로 평가한 연의 재료는 은이다. 숙철도 괜찮지만 생철은 차색을 해치는 폐단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는 생철의 틈에 낀 잔류물로 인해 차색이 아름답지 않게 된다는 의미이다. 10세기 고려에서는 다마(茶磨)와 연(?)으로 차를 갈아 가루를 만들었다. 최승로(崔承老, 927~989)가 성종 원년(982)에 올린 ‘시무28조’에 “전하께서 공덕재를 베풀고 혹은 몸소 차를 갈고, 맥차를 연마하시매(竊聞 聖上爲設功德齋 或親쾰茶 或親磨麥)”라는 구절에서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시대에 찻물을 끓이는 도구로는 철병(鐵甁)이나 석정(石鼎), 석조(石?), 석조(石?), 다당(茶?), 소정(小鼎), 다병(茶?) 등을 사용하였다. 

고려의 문인들이 차를 즐겼던 이유는 다양했다. 첫째, 병의 치료나 양생을 위한 것이며 둘째,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더불어 정치적으로 수난을 겪었던 문인들은 근심을 잊게 하는 위안처로 차를 즐겼다. 물론 뜻이 맞는 벗과 돈독한 정을 나눌 때, 수신과 양생, 문예를 풍요롭게 했던 여유는 결국 차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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