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사 3.1운동 재조명’ 세미나서 전문가 주장 잇달아

1910년 촬영된 부산 범어사 명정학교 전경. 명정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1919년 3월 7일 동래장터에서 부산 첫 만세운동이 열렸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는 기존 동래여고 주도의 3월 11일 만세운동보다 빠른 날짜다.

“범어사가 부산 지역 독립만세운동의 시발점입니다. 당시 만세운동을 이끈 김법린 스님의 회고록에 따르면 ‘3월 7일 동래장터에서 시작됐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범어사 스님들을 주축으로 부산 최초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금정총림 범어사(주지 경선)는 2월 20일 경내 설법전에서 ‘범어사 3.1운동 재조명’을 주제로 3.1운동 100주년 기념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범어사는 세미나를 통해 “부산 최초 독립만세운동은 범어사 스님들을 주축으로 시작됐으며 범어사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수호하고 계승한 중심지가 됐다”고 강조했다.

김법린 스님 회고록 2편 근거
“3월 7일 동래장터서 만세운동”
기존 동래여고 기록보다 앞서

범어사 임제종 한국 선맥 계승 
불교 왜색화 막아낸 중심 역할

토론자로 나선 김화선 운영위원(문화유산회복재단 부산지역)은 “그동안 김법린 스님의 독립만세운동 기록은 외면당해 왔다. 하지만 1946년에 발표된 〈김법린의 3.1운동과 불교〉와 1964년에 발간된 스님의 회고록 〈동래읍 기미 만세 사건〉에 따르면 1919년 3월 7일 동래 장터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했다고 기록돼 있다”고 주장했다.

김법린(金法麟, 1899~1964) 스님은 14세에 출가 후 1915년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3.1운동 당시 영남 불교계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고, 1930년에는 만해 한용운 스님의 뜻을 이어 일제에 대항하는 비밀결사조직인 만당(卍黨)을 결성했다. 1952년 문교부 장관에 임명됐으며, 1953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위원장, 1963년 동국대 총장 등 불교 및 정계·사회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2월 20일 범어사 경내 설법전서 열린 3.1운동 100주년 기념 세미나 모습.

김화선 운영위원에 따르면 1919년 3월 11일에 열린 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의 만세운동이 부산 최초 독립만세운동으로 알려진 것은 범어사의 만세운동이 3월 17~19일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서다. 1969년 2월 10일 3.1동지회에서 발간한 〈3.1운동실록〉에 김한기 스님은 ‘3.1만세운동 참가한 후 범어사에 도착했고 그 날짜가 3월 15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화선 운영위원은 “김한기 스님은 3월 7일 진행된 범어사의 만세운동에 대해선 자세히 구술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당시 범어사 주지는 30본산 주지 대표로 3.1운동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내고 동참하지 말 것을 강요했다. 어려운 과정 속에도 범어사 사중 스님들은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범어사뿐 아니라 김해·정관·기장 지역 등으로 운동이 확장돼 그 의미가 깊다”고 강조했다.

‘범어사 명정학교의 3.1운동 재조명’을 주제로 발제를 진행한 배진영 경성대 사학과 강사는 “김법린 스님은 범어사를 중심으로 동래 장날 명정학교 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하고 결사대를 조직, 선언서 5000장을 등사해 3월 6일 오후 범어사에서 선언식을 거행했다”며 “다음 날인 3월 7일 동래 장날 밤에 동래로 잠입해 장꾼들이 모이길 기다렸다”고 설명했다.

범어사는 불교 왜색화를 막아내고 한국 선종의 법맥을 새롭게 계승 발전시킨 불교자주화의 중심지라는 설명도 이어졌다.

배진영 강사는 “민족문화적 측면에서 일제의 강제 침탈로 나타났던 불교의 왜색화를 막아내고 민족 고유의 불교를 지켜낸 불교 자주화운동이 범어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며 “송광사에서 시작된 임제종은 범어사로 종무원을 옮긴 뒤 동래·초량·대구·서울 등지에 포교당을 세우고 세력을 확장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 불교의 침투에 맞서 한국불교의 자주성을 지키고자 했던 민족수호운동의 일환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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