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옹졸하고 가난하다면 언제나 살림살이도 가난하다

왜 주인공이라 하시는지요

질문 이제 마음공부를 막 시작한 초보 불자입니다. 대행 큰스님께서는 늘 “주인공에 관하라.” 하셨는데 그 주인공이 참나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왜 주인공이라고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여러분 앞에 했던 말을 또 되하게 됐습니다마는 우리가 생활하는 것도 만날 되풀이하고 있는 거니까요. 불교다 하면 불은 영원한 생명을 뜻하고 교라는 건 아주 옳고 바른 말씀을 말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라고 하면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한 지구 안에서, 즉 독 안에서 같이 살고 있는 거라고 평이 됩니다.

그런데 일차적으로 이 세상에서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것조차도 모르고 사는 것이 아마 인간인 것 같습니다. 지붕에서 벌레가 하나 뚝 떨어지면서 생각하기를 ‘나는 이대로 갈 수는 없으니까.’ 하니까 뭐가 됐느냐 하면 매미가 됐거든요. 그런데 그 매미는 전자에 자기가 벌레로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또 자기가 매미가 됐다는 것조차도 모릅니다. 그와 같이 우리 인간도 자기가 전자에 어떠한 모습으로 살았는지, 또는 앞으로 어떠한 모습을 해 가지고 또 이 세상에 어떤 옷을 입고 나올는지 그것도 모르면서 우리는 지금 한 발 한 발…, 평소에 사람들은 죽는다고 그러죠. 그러나 저는 옷을 벗는다고 그렇게 말을 합니다. 옷을 벗으려고 한 걸음 한 걸음, 이 세상에 생겨났다면 벌써 “나는 옷을 벗기 위해서 생겨났다.” 즉 죽기 위해서 생겨났다. 또 죽는다면 “살기 위해서 죽는다.” 이렇게 하겠지마는 그걸 첨보해서 둘이 아니게 생각을 한다면 생사윤회도 벗어날 수 있다고 보죠. 끄달리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러면 어떠한 말을 해서 여러분한테 이해가 가도록 말을 하느냐. 첫째 내 몸, 둘째 가정, 셋째 사회, 넷째 국가, 다섯째 세계 전체에 우리가 너무도 하는 일도 많지만 오늘은 우리 몸으로부터 얘길 잠깐 해 드리죠.

우리가 이 세상에 몸이 태어날 때는…, 보통 우리가 말을 할 때 삼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건 삼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엄마 아빠의, 즉 말하자면 나 자체, 그러니까 모든 이 마음의 근원이라고 할까요? 그 근원 자체가 한데 합쳐져서, 정자와 난자가 한데 합쳐지면 어린애가 되듯이, 이렇게 정자와 난자가 한데 합쳐져도 씨가 없으면 안 되는 이치가 있다고 봅니다. 삼합이 한데 합쳐지니까 인간 하나가 나온다고 보는데 그것을 일컬어 삼신이라고 우리가 전자부터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태어날 때 말입니다, 물주머니에서 터져서 나오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지수화풍에서부터 이 세상이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지수화풍이 한데 합쳐지니 그것이 바로 큰 성을 이루었고 성을 이루었으니 온기가 거기 등장을 했고 모든 것이, 이 삼라만상이 벌어졌다고 보는데 거기에서 생명이 생겨났다고 봅니다. 우린 지금까지도 지수화풍을 떠나서는 못 삽니다. 지금 몸도 지수화풍이니까요. 그러면 우리 몸 안에 들어 있는 모든 물질이 무엇인가? 내가 억겁 광년을 거쳐 오면서 태초에 생긴 자체가 무슨 모습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할 때에 바로 여러분의 그 몸속에 있는, 갖은 각색으로 해 가지고 있는 세균, 그 생명들입니다. 그 생명, 모습이 바로 태초의 자기라고 볼 수 있겠죠. 하나로 인해서 생긴 것들이 그렇게 각각 제 모습을 해 가지고 지금 수만 개가 돼 가지고 이 인간의 별성 하나가 형성이 됐다고 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나왔는데, 내가 나오고부터 이 세상은 생긴 겁니다. 불교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삼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어요. 후로 갈 것도 없고요. 대충대충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니 참작해서 들으십시오.

사회 상식과 교양, 교육이 풍족하다 할지라도
한 인간의 대쪽 같은 그 한마음!
그거는 누구도 말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 태초의 모습이 하나가 수만 개가 돼 가지고 지금 몸에서 운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체들이 운행을 하고 있는 그 겹겹의 세포의 모든 것이 있는데 선장은 누구냐 하면 자기의 모든 마음, 즉 말하자면 공생이다. 우리가 전체 합치면 공생이다, 공용이다, 공체다, 공식하고 있다 이겁니다. 이것을 따져 본다면 내 몸 하나가 은하계도 될 수 있는 건가 하면 바로 혹성이기도 하고 별성이기도 하고, 우리가 지금 한시반시를 그냥 머무르지 않고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지금 지구가, 이 세상 우주가 전체 돌아가는 것이 우리 몸이 자도 깨도 항상 올라갔다 내려갔다 운행을 하고 있죠. 여러분이 그건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제일 문제는 이런 게 있습니다. ‘자기의 그 마음 하나를, 한생각을 잘하면 자기 몸을 잘 끌고 다닐 수가 있고, 한생각을 잘못하면 자기 몸을 구덩이에 빠뜨릴 수도 있다’ 이런 게 있습니다. 여러분이 차를 운전하고 가실 때에 잘 끌고 가면 차도 성하고 일이 잘 성사가 되고, 잘못 끌고 가면, 어디 꼬라박기라도 하면 몸이 다치고 이러듯이 사람 몸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어떠한 쇼크를 받았다거나 이래도 그 몸은 망가질 수가 있습니다. 화기가 치밀어서 말입니다. 병이 들 수가 있죠.

그래서 사람이 마음 자체를 어떻게 먹어야만 되느냐. 내가 나고서부터 세상은 일어난 거니까 나로부터 화두가 되며 나로부터 근원을 밝혀내야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도 사대 성인이 이렇게 말을 했죠. 자신을 알라고요. 자신을 알아야 남을 알고 남을 알아야 서로 공생하는 거를 알고 공용하는 거를 알죠. 그럼으로써 한마음이 선장이라고 한다면 모든 이 중생들을 지금 배에 태워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다면 어느 종교를 나누어서 찾을 게 아니라, 전체 우리는 바로 공생이며 공용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밥이나 해 놓고 떡이나 해 놓고 비는 것이 불법이냐.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고등 동물이라고나 할까. 인간은 90%, 99%가 부처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불쌍한 걸 보면 불쌍하게 여길 줄 알고 생각을 낼 줄 아니 그게 부처가 아니고 뭡니까. 그러니 몸으로부터 마음을 움죽거리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몸을 움죽거리면서 오관을 통해서 우리가 움죽거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태초도 내 몸에 있고 화두도 내 몸에 있고, 참선이라는 것은 생활에서 똥을 누든 밥을 먹든 자든 깨든 참선입니다, 그대로. 여러분이 사회에 나가서 일을 한다 하고 펜대를 붙들고 있다 하더라도 그건 참선입니다. 그건 자기 주인공으로 인하여 자기가 움죽거리고 있는 겁니다. 자긴 바로 자기 주인에 의해서, 즉 운전수에 의해서 차가 움죽거리듯 그럴 뿐입니다. 인간은 이 오온으로써 바깥 경계를 보고 안으로 들입니다. 안으로 들여서 또 가미해 가지고 안에서 만법을 또 냅니다. 그럼 여러분이 생각할 때에, 이렇게 찰나찰나 우리가 쉬지 않고 가는 그 도리, 하나도 고정됨이 없이, 눈도 고정된 게 없고 귀도 고정된 게 없고, 말도 고정된 게 없고 만남도 고정된 게 없고, 가고 오는 것도 고정된 게 없습니다. 그런 관계상 주인공이라고 한 겁니다. 내가 어느 때에 걸어갈 때에 나라고 할 수 있으며 어디 가서 누구를 만날 때 내가 만났다고 할 수 있으랴. 그래서 이름해서 주인공이라고 한 겁니다.

내 안에 부처가 있다는데

질문 저는 오랫동안 기복으로 기도하는 습이 있어서, 내 안에 부처가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가르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옛날에 약초를 캐는 착한 나무꾼이 하나 있었습니다.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서 약초를 캐면서도 항상 그 어머니를 잊지 못한 채, 나오면 몇 며칠이 걸리니까, 한 달도 걸리고 그러니까 그 어머니를 위해서 항상 마음의 기도를 하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약초를 캐다가 그만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져서 아주 몹시 다쳤습니다. 산골에서 다쳐서 내려올 수도 없고 그러니까 엉엉 울었습니다. 울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어느 대선사가 나타났습니다. 나타나서 하는 소리가 “너 나기 이전 너의 아비는 지금 네가 다친 꼴을 보고 울고 있구나. 아비는 울고 있고 아들은 아파하는구나.” 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하고 울다가 말고 여쭈니 “바로 네가 생기기 이전의 너는 지금 울고 있는 그 마음이니라. 네 몸이 아파하면 네 마음이 의욕이 없어지는 것도 네 아비가 자식을 위해서 의욕이 없어지느니라. 네가 의욕을 잃지 않는다면 그 아비도 의욕을 잃지 않느니라. 그것은 왜냐하면 아비는 더하고 덜함이 없기 때문에 너 하는 대로 따라가기 때문이니라.” 이렇게 말을 해 줬습니다. 그러고는 간 곳이 없어졌으니, 그 말을 들은 그 약초 캐는 나무꾼은 그러자마자 일어나도 다리가 안 아프더랍니다.

그래서 그 나무꾼은 인제는 나무를 하러 다니든 약초를 캐든, 어떠한 짐승이 있든 불쌍한 걸 보든 항상 창문을 통해서, 이 두 눈을 말하는 겁니다. ‘창문을 통해서 아버지가 똑똑히 보시고 이것 좀 살려 주셔야 되겠습니다.’ 했습니다. 창문을 통해서 본다고 했습니다. 이거는 창문에 지나질 않아요. 눈이 아닙니다. 창문에 지나지 않고 그 창문 속에는 진짜 눈이 있어요. 그래서 그 아비의 눈이라고 했어요. 아들은 자기의 눈은 눈이 아니고 창틀이고, 그 창틀 속에는 바로 아비의 눈이 시퍼렇게 있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러던 중 어느 날 부랴사랴 약초를 캐러 또 가다 보니까 덫에, 이렇게 깊이 흙을 파고선 덫을 놓고 풀을 덮어 놓지 않습니까? 그 풀을 딛고 가다가 산돼지가 그만 거기 덫에 걸렸단 말입니다. 그래서 빠졌는데 이 나무꾼이 가다 하는 소리가 그걸 보고 “아버지!” 대답이 있겠습니까? “아버지!” 그러니까 “왜 그러느냐?” 자기가 그런 겁니다. “저 돼지가 덫에 걸려서 저렇게, 저 생명도 생명이거늘 어찌 그냥 보고 가겠습니까. 보지 못했다면 모르지마는.” 하니까 “그럼 네 맘대로 살려 주려무나.” 했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이렇게 자기가 또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하고선 저 떨어진 나뭇가지 기다란 걸 가지고 가서 거기다가 이렇게 넣어 놨습니다. 그러니까 돼지는 거기에서 그걸 밟고 나왔습니다.

예전에 산돼지는 사람도 잡아먹고 그랬답니다. 그러나 나무꾼은 산돼지더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비가 너를 살려 줬거늘 앞으로 네 모습을 벗고 사람이 되려면 사람을 해치지 마라.” 그랬습니다. 돼지가 고개를 끄덕끄덕했습니다. 그래서 그 돼지는 그 후에 산에서 으뜸가는 맹수인 사자가 됐습니다. 사자가 됐는데도 글쎄, 돼지는 그때의 그 나무꾼이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모습을 바꿔서 맹수가 됐는데도 그게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나무꾼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무진 노력을 하다가 나중에는 자기 몸까지 그 나무꾼에게 바쳤다는 얘깁니다. 그건 뭐냐? 그 나무꾼을 못 잊은 그 마음과 이 맹수의 마음은 항시 둘이 아니어서 그만 이 모습도 벗고, 이 모습을 벗으니까 아주 이 세상에서 으뜸가는 대인이 됐다는 얘깁니다. 대인이 돼서 어진 정승으로서 중생들을 많이 제도를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말하고 싶은 거는 딴 데 있어서 그 말을 했습니다. 살아나가면서 여러분이 몸이 아프거나 또는 어딜 다치거나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거나 이런다면 살 의욕이 없어지는 듯합니다. 여러분을 볼 때 참 내 가슴이 아플 때도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만 고치는 게 부처님 법인가?” 이러지마는 그게 아닙니다. 보석이나 뭐나 다 가지고 있어도 자기가 죽게 된다면 아무 의욕도 없어지는 겁니다. 그 얼마나 묘합니까? 그러니 자기 몸을 자기가 얼마나 사랑하는 겁니까? 야, 몸뚱이가 좀 아프다고 하면 그 마음은 얼마나 의욕이 없어지고 슬프고 눈물이 나고 이러는지 모릅니다. 생각 한번 해 보세요, 모두. 얼마나 자기를 자기가 사랑하나.

그런데도 믿지 못하는 겁니다. 자기가 아프면 서로 같이 아파 주고 울면 같이 울어 주고 의욕이 없어 하면 같이 의욕이 없어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를 자기가 못 믿어서, 자기를 자기가 업신여기고 못 믿고 따르지 않고 이러면서도 저 먼 데 부처님이 계시다 하면 만날 그냥 ‘부처님, 날 좀 도와주시오. 이 몸 아픈 것 좀 낫게 해 주시오.’ 하고 빌곤 합니다. ‘우리 남편 낫게 해 주십시오. 우리 남편 잘되게 해 주시오. 자식 잘되게 해 주시오. 나 몸 좀 안 아프게 해 주시오.’ 하고선 빌고 있다 이 소립니다. 그러면 얼마나 멉니까, 그게?

나에게 참 사랑하는 바로 내 자부처가, 자신(自神)이 계신데도 불구하고, 일체 신이 바로 한마음에 계신 거를 알면서도 그것을 못 믿고 그렇게 빙빙빙빙 돌아간다면 앞으로 어떻게 내 몸과 내 가정 또 내 국가, 사회 이런 거를, 내 자식을 어떻게 길러 나가면서 에너지를 불어넣어 줄 것입니까? 지금 현재뿐만 아닙니다. 세세생생에 끝 간 데 없이 말입니다.

몰락 믿고 맡기려면

질문 주인공에 관한다고 나름 열심히 하는데 잘 안됩니다. 믿음이 부족한 탓일까요? 어떻게 해야 몰락 믿고 맡길 수 있을는지요.

답변 요새 너무 아는 게 많아서 그런지 혼란을 일으키고 말입니다, 남의 소리나 듣고…. 부처님이, 석가세존이 이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석가세존의 몸뚱이를 믿으라고 한 게 아닙니다. 그 말씀을 믿고 따르고, 진짜 믿는 것은 그 부처님의 마음이 내 마음속에 항상 서리고 있기 때문에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물질을 보고 끄달리지 말고 그 마음을 뚫어보기 위해서 내 마음부터 뚫어봐라 이 소리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첫째도 나를, 나라는 존재를 버려라. 버리는 게 아니라 맡겨 놔라. 아집을 버리고 말입니다. 그것은 왜냐? 여러분이 여직껏 살면서도 고정되게 보신 게 있습니까? 들으신 게 있습니까? 또 말하는 게 있습니까? 가고 오는 게 있습니까? 먹는 것이 고정됩니까? 하나도 고정된 게 없어요. 그런데 자동적으로 이 사람 만나면 이 사람 만나는 대로 뜻과 행과 말이 나가고, 저 사람 만날 땐 저 사람 만나는 대로 뜻과 행과 말이 나가니 그건 무슨 연고냐 이겁니다. 그러니 나라는 게 어딨는가? 누구 만날 때 내가 만났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부처는 없는 게 부처다 이런 소리죠. 그래서 관하라 하는 겁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 게 관하는 건지 그것조차도 모른다면 나를 어떻게 발견을 하며 내 습을 어떻게 녹일 수 있으며, 내가 생동력 있게 모든 생물들과, 즉 사생(四生)과 더불어, 우주와 더불어 대천세계를 막론해 놓고, 내 몸뚱이 집과 대천세계의 집과 도량이 둘이 아닌 걸 어떻게 알 겁니까? 그래서 알게 되는 도리를 이끌어 주기 위해서 자기부터 알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자기를 진짜로 일차적으론 믿어야 한다,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를. 둘째는 모든 일체를 거기서 해 나가니까 거기에 믿고 맡겨 놔라. 셋째, 거기서밖엔 일체를 할 수 없으니까 다가오는 대로, 아프면은 의사가 돼 주실 거고, 즉 약사가 된다 이거죠. 가난하면 관세음이 돼 줄 것입니다. 그래서 간략하게 말한다면 부처님의 마음, 한마음 안에서 그 모든 내 몸뚱이에 있는 중생들이 화해서 보살이 천백억화신으로 나투니, 털구멍을 통해서 바깥으로 나고 들면서 모든 중생들을 건진다 이겁니다, 생사에 뛰어들어서. 그래서 중생과 부처는 둘이 아니니라.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서 생사에 뛰어들듯이.

그러니까 우리가 관하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믿고 맡겨 놔라. 한군데서 들고 나는 거다.” 이겁니다. 역대를 한군데서 들고 나면서 이렇게 해 왔는데 우리가 모르고 바깥으로 방황하기 때문에, 그 한군데로 들고 나는 걸 모르기 때문에 돌아가지를 않는 겁니다.

좋은 인간관계 맺고 싶습니다

질문 회사를 다니는 청년입니다. 제 주변 친구들이나 회사 동료들은 거의가 기독교 신자들이 많습니다. 종교가 달라도 서로 잘 통하는 친구도 있지만 서로 생각하는 점이 다르니 대화를 하다 보면 꼭 종교적 부분에서 부딪치게 되어 관계가 안 좋아지는 상황이 생기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종교를 떠나 모든 사람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요.

답변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요런 걸 한번 대비해서 얘기해 드릴까요? 어떤 사람이 아주 나보다 모자랐습니다, 예를 들어서. 근데 나라고 한다고 또 난 줄 알지 마시고요. 여러분도 다 똑같습니다. ‘나’ 하면 벌써 여러분과 더불어 같이 나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예전에 예수가 “나를 믿어라.” 그러니까 나를 믿으란다고 그냥 전부 예수를 믿듯이 말입니다. 그건 나를 따르란 거지, 나를 믿으란 게 아니란 말입니다. 똑바로 알아들어야지, 잘못 알아듣는다면 그것이 바로 오산이죠, 오해고. 그러니까 똑같은 말이라도 그렇게 잘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많다 이겁니다. 부처님도 바로 나를 믿고, 나는 이게 물질이기 때문에 따르랬지 믿으란 게 아니거든요. “너를 발견하라. 너를, 각을 이루라. 너를 깨달아라.”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만 물리가 터진다면 대중 생활을 할 때도 능숙합니다, 그것만 알면. 왜냐? 내가 만약에 저 못난 사람을 봤을 때, 저 사람이 아주 빈약하고 그릇이 작고 폭이 좁고 졸렬했습니다. 그런데 이쪽에서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아, 저거는 과거의 바로 나였구나.’ 하니까 이건 과거의 자기이기 때문에 이것을 이끌어서 길러 줄 생각만 했지 ‘너는 작다’, ‘너는 졸렬하다’ 이러고 내치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그저 포근하고 따뜻하게 이끌어 가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이겁니다. 자기니까.

그랬고 윗분을, 아주 능숙하게 익은 분을 봤습니다. 그랬을 때에 존경하면서 바로 자기의 자(自)노승, 즉 말하자면 자기의 스승으로, 미래의 자기로 알기 때문에 또 숭배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것은 어디 가나 조화를 이루는 겁니다. 가정에서도 그렇고, 가정에서도 지금 내가 얘기해 드린 거, 대중 생활이든지 대중 생활 아니든지, 내 가정에서든지 사회에서든지 어떠한 정치인들이든지 다 요런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둘이 아닌 이 폭이 넓은 그릇이 돼야만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애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가정에서도…, 내가 항상 그러죠, 여러분한테. “아무리 못났든 잘났든 인연이 돼서 만난 사람, 이걸 그르면 그르다고 생눈을 뜨고 보지 마라. 가화일화니 바로 저 성주와 같은 거다. 네가 만약에 서까래라면 성주와 같은 거야, 대들보. 대들보를 올리지 않았다면 서까래를 올릴 수가 없으니 그것을 대들보로 믿고 나쁜 여건이 있으면 안으로 굴리고 좋은 여건이 있으면 얘기를 해서 좋게 서로 웃을 수 있는 그런 여건을 가져 봐라. 그런다면 마음의 자가발전소의 그 불은 가설이 본래 돼 있기 때문에 거기까지 불이 들어온다. 그래서 항상 밝은 방을 가지면서 어디나 우리 있는 데는 다 밝다. 밝기 때문에, 컴컴하질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웃고 즐기고 살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옹졸하고 가난하다면 언제나 살림살이도 가난해요. 배도 고프고. 이러니 본래 배부르게 가진 고등 동물이 제 밥을 찾아 먹지 못한 채 배가 고파서 만날 허덕이고 남의 심부름을 항상 해야만 하고, 남이 하던 거 따라가야 하고 자기가 생산은 못하고, 항상 이렇게 하는 겁니다. 사람이라면 좀 더 욕심 아닌 욕심도 있어야 되는 것이 뭐냐. 다른 거는 다, 사랑하고 인정 있고 도의, 의리와 이 사회 상식과 교양과 교육과 이것이 풍족하다 할지라도 바로 내가 살아오면서 한 인간의 대쪽 같은 그 한마음, 이거는 누구도 말리지 못합니다.

그렇게 조화를 이루어 가지고 풍족하게 가면서 이것을 밀고 나간다면 그것은 말할 수 없이 좋은 참, 봄에 꽃 피는 일이라. 새가 우는 것도 꽃이 피는 것도 계곡에 물이 흐르는 것도, 길이 이렇게 아스팔트로 돼 있는 것도 산 너머 계곡으로 넘어가는 길도 평전이 될 것이다 이 소립니다. 우리가 아스팔트는 다니기 좋으니 몸으로 다니고 계곡을 넘어갈 때는, 산이 높아서 못 갈 때는 내 한생각이 바로 계곡을 넘어갈 수 있고, 강이 있어서 못 건너가는 데는 내 한생각이 그렇게 강을 건너서 훌쩍 가게 되면 그 강 건너 있는 사람이 바로 나인 거죠. 산을 넘어서 가면 그 산 너머 있는 사람이 바로 나인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이 그 사람 병을 고치고 그 사람의 가난도 그 사람이 바로 조화를 이루어서 잘된다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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